99.9% 박정희 옹립한 북한식 거수기들, 그 실체는…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0> 유신의 몰락, 첫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지 7년 만에 박정희는 심복의 손에 목숨을 잃고 유신 정권은 무너진다. 그러나 1979년 10·26 이전에 이미 유신 체제는 말기 증상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한 유신의 몰락 과정을 찬찬히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1978년 '통대'에 의한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선거, 12·12총선, 대통령 취임 이 부분을 먼저 얘기하도록 하자. 1978년 5월 18일은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날이었다. 그런데 1972년 12월 제1기 선거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제1기 때에는 선거 직전까지 비상 계엄 상태였고 그런 속에서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정말 질서 정연하게, 조용하게 선거를 치렀다. 권력 쪽 기준으로 보면 관제 선거를 그야말로 잘 치렀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불과 6년도 지나지 않은 때에 치러진 제2기 선거에서는 상당한 반발이 일어나고 반대 시위 같은 것이 많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그해 5월로 접어들면서 유신 헌법 철폐와 민주 헌법 부활을 외치면서 곳곳에서 교내 시위를 벌였다. '통대' 선거 10일 전인 5월 8일 서울대생 1500여 명이 1시간 동안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다. 일부 학생들은 학교 밖 봉천동, 신림동으로 나와 유신 철폐를 외치면서 가두 투쟁을 했다. 그다음 날에는 이화여대생들이 시위를 했다. 300여 명이 대강당에서 시위를 시작했는데, 나중에 1000여 명까지 늘어났다. 경찰 기동대가 교내에 진입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여학생 18명을 연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통대' 선거 4일 전인 5월 14일, 이날은 석가탄신일이었는데 동국대생들이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5월 16일, 5·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7년이 되던 이날에는 한신대 학생들이 5·16 선언을 발표하고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통대' 선거를 전후해 한신대에 휴강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한 것에 항의하는 투쟁을 했다.

선거가 치러진 5월 18일에는 윤보선, 정구영 등 재야인사, 그리고 해직 교수, 해직 언론인 등 66명이 '오늘의 우리 주장'을 발표하고 '통대'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공화당 총재, 의장을 지낸 정구영이 이제는 재야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아투위를 비롯한 여러 민주화 운동 단체에서 '통대' 선거라는 건 무의미하다는 성명서 같은 걸 발표했다.

제2기 출범 전부터 강한 반발에 직면한 유신 정권

ⓒ오월의봄
프레시안 : 5월 18일 '통대' 선거, 어떻게 치러졌나. 그리고 주로 어떤 사람들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던 건가.

서중석 : 당시 신문을 통해 그 부분을 살펴보자. '통대'는 전국 1665개 선거구에서 2583명을 선출하게 돼 있었는데 경쟁률이 2:1 정도였다. 투표율은 78.95퍼센트로 매우 높은 편이었다. 서울이 67.84퍼센트로 제일 낮았고, 부산과 경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전부 80퍼센트를 넘었다. 상당히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통대' 선거에서는 선전 벽보, 선거 공보, 합동 연설회 이 세 가지 방법을 빼놓고는 다른 어떠한 선거 운동도 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그런 면에서도 참 재미없는 선거였다. 그런데도 투표율은 높았다. 물론 이 투표에 참여하라고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또 지역에 따라 대의원 후보끼리 과열 경쟁을 하는 곳도 있었지만 그런 것도 다 묵인하는 식으로 선거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부추겨보려고 노력한 점도 작용해서 이런 높은 투표율이 나왔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 유신 체제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선거가 없는 식으로 살아오지 않았나. 1973년 2월 국회의원 선거가 있긴 했지만 그건 유신 쿠데타 직후 아주 엄혹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것이었다. 하여튼 오랫동안 선거라는 걸 맛보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선거를 하니까 한 번 투표하러 간 것 아니냐, 이런 분석도 나오고 그랬다.

그러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어떤 사람들이 됐느냐. 농촌의 경우 대개 농업이라는 것을 자신의 직업으로 많이 써놓았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단위 농협 조합장이 단연 많았다. 전직 면장이라든가 새마을 지도자, 예비군 중대장 같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통대' 선거는 인구 비율대로, 즉 그것에 딱 맞춰서 대의원 숫자가 배정된 것이 아니었다. 농촌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많이 뽑게 돼 있었는데, 농촌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됐다.

소도시에서는 양조업이나 도정업을 하는 사람들 또는 의약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지역 유지인 셈인데 '이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한 번 해보자', 이랬던 것 같다. 사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라는 건 실제로 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는 자리 아닌가. 농촌이건 소도시건 명리를 탐내거나 이권 문제, 이해관계에 예민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당선됐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건 '통대' 선거를 맞으면서 유신 체제를 격렬히 반대하고 '통대' 선거가 무의미하다는 운동이 벌어진 것은 제2기를 맞는 유신 체제가 제1기 때와는 다르게 심상찮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물론 1기 때에도 몇 년 지나면 그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2기의 경우 2기를 맞으면서부터 그러한 어려움에 크게 봉착하게 됐다는 것을 얘기해준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통대' 선거 후 유신 체제 반대 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그러한 반대 운동은 5월 18일 '통대' 선거가 있은 후 더욱더 격렬하게 전개됐다. 6월 1일 서울대 농대생 200여 명이 민주 구국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2일부터 10일까지 동맹 휴학 투쟁도 전개했다.

더 큰 시위는 6월 12일 서울대에서 일어났다. 3000여 명이 3시간 동안이나 격렬하게, 큰 규모로 시위를 전개했다. 그날도 일부 시위대는 학교 밖으로 진출해 관악구청, 신림동 일대에서 한동안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로 60~70명이 연행되고 9명이 구속됐다.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위는 광화문 연합 시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6월 26일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숭전대 등 여러 대학 학생들과 각계 민주 인사들이 광화문 일대에서 밤늦게까지 시위를 거세게 전개했다. 신부도 참여하고 목사도 참여하는 등 여러 층에서 동참했다. 서울 한복판, 제일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광화문에서 이런 큰 시위가 벌어졌다는 건 유신 체제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얘기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 날인 6월 27일에는 '우리의 교육 지표'를 발표한 전남대 교수들이 연행됐는데, 분노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 학생들은 29일에는 단식 농성에 돌입했고 30일에도 시위를 벌였다. 아울러 6월 말, 7월 초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반대하는 유인물들이 서울과 지방의 여러 대학 그리고 서울 시내에 살포됐다.

나란히 실린 유신 체제의 민낯, 체육관 대통령 옹립과 아파트 특혜

프레시안 : 제1기 때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통대'의 대통령 옹립 과정에서 북한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면이 연출되지 않았나.

서중석 : 7월 6일, 전과 똑같이 장충체육관에서 제2기 체육관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다. 탁 트인 장소에서는 대통령이 어떻게 될까봐 체육관에서 행사를 진행한 모양이다. 이날 장충체육관에 2578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모였다. 선출된 전체 인원은 2583명이지만 이미 1명은 사망하고 1명은 사퇴해서 재적 대의원이 2581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몸이 안 좋았는지 3명이 불참해서 참석자는 2578명이었다. 여기서 1명 빼놓고 나머지는 다 박정희 후보를 찍었다. 물론 박정희 후보가 유일한 후보였다. 다른 사람은 감히 입후보를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2577표, 지지율 99.9퍼센트로 박정희가 제2기 체육관 대통령에 당선됐다. 1표는 무효표였다. 수천 명이 투표하다 보니 이렇게 '엉뚱한' 데에다가 찍어버리는 일이 생긴 모양이다. 이날 '통대' 회의는 오전 10시에 시작됐다. 개회사를 한 박정희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은 불과 20분 만에 회의장을 떠났다. 20분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날 동아일보에는 "박정희 후보 9대 대통령 당선"이라는 톱기사 옆에 바로 그 유명한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기사가 사이드 톱으로 크게 실렸다.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라고 할까. '통대' 대통령 당선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힌 옆에 유신 정권의 한 면모가 "아파아트 특혜 260명 소환"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실린 것이다. 유신 체제에서 한국 사회를 좀먹은 부정부패, 투기 광풍을 바로 체육관 대통령 당선 기사 옆에 압축적으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다음 날에는 박정희 처남인 육인수 공화당 의원이 바로 이 사건으로 사퇴서를 냈다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유신 체제에서 권력자들의 부패상을 다시 한 번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점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한 체육관 대통령 선거를 즈음한 사회 분위기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 "박정희 후보 9대 대통령 당선"이라는 톱기사 옆에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 기사를 사이드 톱으로 게재한 동아일보 1978년 7월 6일 자 1면. ⓒ동아일보


프레시안 :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옹립을 전후해 유신 반대 세력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나.

서중석 :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선출하기 전날인 7월 5일 민주주의국민연합 발기 대회가 예정돼 있었다. '통대' 행사에 맞춰 발기 대회를 열려고 했던 것인데, 이 대회에 참석할 예정이던 주요 인사가 그 전날 대부분 발이 묶였다. 대회 전날인 7월 4일 윤보선, 함석헌 등 40여 명은 가택 연금을 당했고 젊은 활동가들은 강제 연행됐다. 그래서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선출에 맞춰 발기 대회를 열지는 못했다.

대회는 좌절됐지만 민주주의국민연합 자체는 7월에 출범하게 된다. 이 단체는 1974년 말에서 1975년에 많은 활동을 했던 민주회복국민회의와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보다 확대된 단체였다. 그렇게 확대된 형태로 재야인사들의 단체가 출범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개신교·천주교 인사, 문인, 교수, 청년, 언론인, 양심범 가족, 노동자, 농민 등 12개 단체와 그 구성원, 그리고 재야 정치인 등 350여 명이 발족 선언 명단에 들어 있었다. 개인만이 아니라 소속 단체까지 명기했다는 것도 민주회복국민회의와는 다른 점이었다. 재야 단체가 점점 더 조직적이고 규모가 있는 단체로 커가고 있었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민주주의국민연합은 8·15 선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반유신 투쟁을 "한 사람에 의한 전 국민의 질식이냐, 전 국민에 의한 1인 통치의 종결이냐를 결정짓는 싸움"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민주주의국민연합은 박정희 유신 정권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 정권과 가차 없는 일전을 벌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새 학기에 들어선 9월 학생들은 다시 투쟁을 했다. 9월 13일 서울대생 2500여 명이 시위를 3시간 동안 대대적으로 했다. 60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상도동 장승배기로 나와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가투 투쟁을 했다. 9월 14일에는 고려대에서 3000여 명이 참가한 큰 시위가 벌어졌다. 1975년 4월 긴급 조치 7호가 고려대에 발동된 후 고려대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큰 시위였다. 11월에 가면 경북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규모가 큰 시위가 전개되는 등 이해 연말에 이르기까지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계속된다. 그런 속에서 1978년 1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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