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때 왜 그 많은 농민들은 떠나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8> 유신 체제, 스물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새마을운동에 대해 일각에서는 농민들의 자발성을 매우 강조한다. 자발성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요소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어떤 '자발성'인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권 차원에서 위로부터 동원했다는 점을 빼놓고 새마을운동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게 사실 아닌가.

서중석 :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정부가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는 점이다. 시멘트를 나눠주고 철근을 나눠준 것도 정부였다. 필요한 재원을 전부 무상으로 준 건 물론 아니지만 하여튼 정부 지원이 대단했다. 이런 지원은 1973년부터 대폭 늘어났다. 1972년에 33억 원으로 돼 있는데 1973년에는 215억 원으로 돼 있고 1974년에는 308억 원으로 급증했다. 그러면서 새마을 지도자 연수도 대폭 강화됐다. 1972년에 1409명이었던 것이 1973년에는 4354명으로 통계에 나온다.

정부에서 이렇게 추진했다고는 하지만, 정부라고 하더라도 그중에서 바로 청와대가 전적으로 주도한 일이었다. 핵심은 대통령이었다, 이 말이다. 실무 차원에서는 1970년대 초기에는 내무부가 중심이 됐다. 여기에 경찰, 건설부, 보건사회부가 일역씩을 맡았고 다른 모든 부처가 도와주는 형태였다. 그런데 점차 소득 증대 사업이 중요시되면서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농산부가 큰 역할을 맡게 된다.

내 제자 이환병, 이 사람은 교사인데 새마을운동에 대해 박사 논문을 썼다. 이환병은 "공무원 동원 체제는 새마을운동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부작용도 속출했다. 가장 일반적인 부작용은 이른바 성과 부풀리기 혹은 윗사람에게 무조건 잘 보이기 등이 대표적이었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이환병은 중앙 단위의 행정 기관뿐만 아니라 마을 단위까지 전시 행정의 폐해가 나타나게 된다고 얘기했다. 또한 1973년부터 남녀 새마을 지도자 제도가 정착하게 되는데 1975년 6월의 경우 남성이 3만4809명, 여성도 3만4809명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전국 마을 수가 이러했던 것으로 돼 있었다. 마을마다 남녀 한 명씩 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20만 명 정도가 배출됐다고 이환병은 썼다.

이렇게 정부 주도로 진행되면서 권위주의적, 획일적, 대중 동원적, 관료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는 비판이 나오게 된다. 또한 새마을 지도자들은 대부분이 공화당원이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같은 것으로 간다. 지난번에도 소개한 농민 일기를 쓴 평택의 그 농민, 공화당원이기도 했던 이 사람은 이장으로서 새마을 사업을 해야 하지 않았나. 이렇게 어떤 한 사람이 공화당원에다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그리고 새마을 지도자까지 겹치기로 하는 건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가는 것을 정부에서 막고 싶더라도 막을 방법도 없었다.

왕겨를 퇴비로 위장하고 보리 사다가 실적 채우고…강제성이 만든 성공 신화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관료주의를 앞세운 대중 동원 방식은 어떤 문제를 발생시켰나.

서중석 : 이런 권위주의적, 대중 동원적, 관료주의적 방법이 어떤 문제를 낳았느냐. 그 부분에 관해 들여다보자. 김영미 교수는 새마을운동에 대해 꽤 두꺼운 <그들의 새마을운동>이라는 책을 냈다. 여기에서는 두 개의 마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농촌 활동이 이뤄졌는가, 또 그 마을들이 일제 때부터 새마을운동 때까지 어떤 식으로 변모해왔는가를 사례 검토 방식으로 연구했다. 이 연구에도 그것에 관한 얘기들이 나온다.

경기도 이천에 아미리라는 마을이 있다. 새마을 사업 성과를 바탕으로 1970년대에 두 번이나 우수 마을(자립 마을)로 선정돼 대통령 하사금도 받은 모범 마을이다. 그런 대단한 마을이었는데 그 이면에서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일도 있었다. 행정 기관에서 퇴비 증산을 강요했다. '퇴비 생산을 이만큼 늘려라', 이렇게 목표액이 내려온 건데 문제는 그 목표액을 무리하게 책정해놓고 강압적으로 진행했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걸 해낼 방법이 없으니까 왕겨를 퇴비로 위장했다. 아미리 같은 대표적인 모범 마을에서조차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이 연구에서 다룬 다른 한 마을, 그러니까 역시 이천에 있는 나래리에서도 나타난다. 이 마을에는 보리 2모작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이건 지역 실정에 전혀 맞지 않았다. 관에서 강압하니까 주민들은 할 수 없이 보리를 심기는 했지만, 검사받은 다음에 밭을 다 갈아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고추 모종을 냈다. 문제는 수확기에 보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리를 심은 것으로 돼 있으니까. 그래서 주민들이 다른 마을에서 또는 다른 지방까지 가서 보리를 아주 비싸게 사오는 기막힌 일이 있었다. 이 마을 이장도 공화당원이었는데, 이 사람은 새마을 사업의 강제성으로 인해 피해가 적지 않았고 주민들뿐만 아니라 공무원들도 과다한 할당량 때문에 모두 엄청난 압박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김영미 교수는 이 책에 이렇게 썼다. "(새마을)운동의 수행 주체인 농민들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동원된 주체들이다. (…) 새마을운동의 작동 원리에서 강제성은 기본적인 동력이었다. 자발적 농민 운동을 표방한 새마을운동의 이면에는 권위주의적 정치 질서와 행정 방식이 작동하고 있었다. 안 하면 안 되는 강제성이 새마을운동의 성공 신화를 만들어낸 동력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번에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농촌 여기저기서 여러 활동이 자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가나안농군학교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 학교는 일제 때부터 농민 운동을 한 김용기 장로가 해방 후 설립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후에는 새마을운동과 협력 관계에 있었다. 새마을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 1973년에 477명, 1974년에 1568명, 1975년에 4530명, 1976년에 9276명, 이렇게 많은 새마을 일꾼을 교육해냈다. 정부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빼면 제일 많은 교육 인원을 배출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이 되면서 김용기가 새마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제일 중요한 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게 정부 주도로 추진되면서 정권을 유지하고 실정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또 새마을운동을 지도하는 권력층의 부정부패 같은 것도 지적하고 그랬다. 그러면서 김용기는 1975년에 <운명의 개척자가 되자>, 일제 때부터 주장해온 것을 다시 담은 이 소책자를 출간했다. 그러자 문공부 검열관들이 "이 소책자가 젊은이를 선동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할 소지가 있다"고 하면서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로 판매 금지 조치를 취했다. 이환병은 바로 이런 사태가 새마을운동이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고 기술했다.

유신 체제 강화 우선…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준 새마을 교육

프레시안 : 다른 각도에서 보면, 강제성을 어느 정도 수반하더라도 마을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필요했으며 그런 부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건 사실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또한 이전에는 농촌 여성들이 숨죽이며 지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여성 중 일부가 새마을운동을 통해 앞에 나서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점은 평가할 만하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다.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새마을운동을 보면 초기에는 환경 개선 활동이 주로 진행됐다. 이건 그 후에도 상당 기간 계속되는데 제일 큰 것으로 농로와 마을길 정비, 지붕 바꾸기, 그리고 공동 세탁장 같은 여러 공동 시설을 만드는 것, 소하천 정비 같은 것을 얘기한다. 이런 것들의 경우 상당히 눈에 띄게 개선된 점이 있다. 물론 너무 외형에 치우치고 강제적으로 됐기 때문에 제대로 되지 못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그 당시에 가각(街角) 정리라는 게 읍이나 조그만 시 같은 데에서 많이 이뤄졌다. 큰길을 따라서 건물들을 똑같이 정리하게 만든 건데, 있을 수 없는 획일화 작업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마을운동 전반에 그런 점이 있었다. 거듭 이야기한 것처럼 관료주의적으로 하면서 그렇게 된 건데, 그게 박정희 대통령이 선호한 방식이기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그렇다고 하더라도 환경 개선 측면에서는 농촌을 많이 바꿔놓은 면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정말 열성적으로 농촌을 발전시켜보자', 이런 사람들도 이 시기에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여성의 경우 가부장제에서 오랫동안 신음하면서 눌려 지내지 않았나. 그런데 이때 부녀회장이 되니까 면사무소에서도 만나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하고 악수까지 할 수도 있고 하면서, 자기가 보기에는 인간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남자들한테 마을에서 그렇게 눌려 지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새마을 사업 같은 것에 굉장히 열성적으로 참여하면서 열심히 일한 사람들도 꽤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역할을 일정하게 해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들이 유신 체제에 많이 끌려다닌 것 아니냐, 유신 체제를 강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것 아니냐,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새마을 지도자나 부녀회장이 됐다고 해서 얼마만큼 힘이 있었겠느냐 싶으면서도, 그래도 20만 명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새마을 지도자였다고 했는데 그게 적은 게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양면을 다 봐야 하지 않겠나.

마을이 3만 개가 넘었다고 얘기했는데, 마을별 차이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아미리, 나래리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도 있는데 두 번이나 우수 마을로 선정된 아미리와 달리 나래리 같은 데서는 새마을운동에 별로 치중하지 않았다. 이처럼 마을마다 차이가 났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 : 이 부분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사항, 즉 새마을운동에서 농민의 '자발성' 또는 '자율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 해방 공간이라는 특정한 국면에서 전면에 드러났던 농민들의 자발성, 자율성, 자치 역량이 '빨갱이 사냥', 그리고 한국전쟁과 학살 등을 거치며 국가 권력에 거듭 짓밟혔다는 점을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크게 위축된 상태가 오랫동안 불가피했음을 충분히 감안해야만 새마을운동 시기에 제한적으로 나타난 '자발성' 또는 '자율성'이라는 것의 실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돌아오면, 새마을운동은 유신 체제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고 전에 이야기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나.

서중석 : 지난번에도 얘기한 것처럼 새마을운동이 1973년경부터는 유신 체제 강화와 긴밀히 연계되는데, 그러면서 이제는 본말이 전도된 느낌까지 주는 것들이 나타난다. 그건 새마을 지도자 교육에서도 나타난다. 1972년 독농가 연수반이나 새마을 지도자반 교과목 같은 걸 보면 농촌이 어떻게 해야 근대화되고 잘살 수 있느냐, 이것에 초점을 맞춰 상당히 다양성 있게 내용이 구성돼 있다. 그런데 1973년 이후 1979년까지 진행된 새마을 지도자반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그렇지 않다. '지도 이념과 유신 과업', 이게 제일 앞에 나오고 '새마을운동과 지도 이념', '새마을운동과 정신 혁명'이 그 뒤를 잇는다. 그다음에 '국난 극복사', '새 국가관 확립', '새 역사의 창조', '통일 정책', 사실 그 얘기가 그 얘기이긴 한데 하여튼 그렇게 구성돼 있다. 다시 말해 유신 체제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교과목이 이제는 훨씬 중요하게 다뤄지고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을 볼 수 있다.

아울러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이건 농업 정책이건 식량 안보 차원에서 식량 증산에 박정희 대통령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에 얘기했는데, 유신 후기에 가면 이게 또 제대로 안 된다. 이 무렵 박 대통령이 한 연설을 보면 신품종 벼 개발을 장려하는 내용이 나온다. 1977년쯤 되면 통일벼가 여러 가지 이유로 농촌에서 많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런 가운데 통일벼 품종을 개량한 유신벼라는 게 새로 나오고 정부에서 이걸 장려했는데, '마디썩음병'이라는 게 발생해 많은 농민들이 피해를 봤다. 그것에 이어서 등장한 게 노풍인데, 나오자마자 정부에서 권장해 이것을 막 심었다가 1978년에 도열병으로 엄청난 노풍 피해가 발생하지 않나.

나중에 다시 얘기하게 될 터인데, 이렇게 되면서 농민·농업 경제력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1978년 통일벼 계통인 노풍 피해 이후 통일벼 보급은 급속도로 쇠퇴한다. 그 결과 쌀 생산량도 1979년 3870만 석이던 게 1980년에는 2470만 석으로 36퍼센트나 감소했다고 돼 있다. 이 수치 자체는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1980년에는 지독한 냉해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니까 '꼭 통일벼 잘못만은 아니다. 두 가지가 겹쳤다', 그렇게는 얘기해야 한다.

이환병 연구에 의하면, 새마을운동 성공 사례 발표를 많이 하게 했는데 이게 새마을운동에서 초기에 기반을 조성하거나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 발표에 참가한 모범 농민들도 농업에 계속 종사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조합장이나 공무원 같은 게 되려고 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사실은 다수가 농촌을 떠나버린다. 이환병은 "초기 모범 농민들은 새마을운동의 초기 모델은 될 수 있어도 농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농민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새마을운동의 근본적 모순이자 한계점이 됐다"고 썼다.

그러니까 1970년대는 새로운 농업 정책, 농촌 정책, 농민 정책을 펼칠 수 있게끔 돼 있는 아주 중요한 변화의 시기였는데도 그게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이때 농업 생산력을 단순한 주곡 생산력으로만 하지 말고 새롭게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고, 농촌에 붙박이로 살 수 있는 농민에 의해 그게 이뤄지도록 유도했어야 할 일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아주 중요한 시기에 그러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새마을운동이 왕성하던 때, 빚더미에 깔린 농민들

ⓒ오월의봄
프레시안 :
왜 그렇게 된 것인가.

서중석 :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됐느냐. 그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내가 거듭 이야기하지만 유신 정권이 경제 발전 문제를 비롯한 모든 것에서 단기적인 성과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에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촌의 겉모습 변화, 식량 자급, 주곡 생산, 이런 것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 구조를 조정하는 작업이나 자립형 또는 경영형 농민을 키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말이다.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비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대만과 달리 공업과 농업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킬 수도 없었다. 농업을 희생시켜서 공업화를 이루는 방식을 한국은 박정희 정부 때 택했던 것이다. 물론 대만하고 다른 면도 있다. 대만에 비해 공업의 재료가 될 수 있는 농업이 약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업과 농업, 양쪽의 연관이 너무나 없게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내가 1970~1980년대에 많이 생각한 것인데 농촌과 도시가 연결됐어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연결이 되면서 주곡만이 아닌 다각적인 농업이 이뤄졌어야 할 일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농촌과 도시가 연결돼야 하는데, 그런 연결을 시키려는 노력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농촌과 도시가 따로 노는, 그러면서 도시 중심으로 한국 사회가 급속히 커가는 식으로 됐다.

그렇게 되면서 농촌이 소외된 모습 중 하나는 농민들이 생산해낸 것이 도시에 가면 농촌에서 팔리는 것보다 월등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는 것이다. 가락동 농산물 시장 같은 대규모 농산물 판매소에서조차 어째서 현지 가격하고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건가, 이런 생각을 난 전부터 많이 했다. 대만 같은 데에서는 농산물 가격이 농촌이나 도시나 별 차이가 안 난다고 하는데, 성공적인 정책으로 이것이 꼽힌다. 이렇게 된 데에는 독재가 크게 작용을 했다고는 하지만, 대만 사례를 들으면서 왜 그게 한국에서는 안 됐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대만의 그런 사례와 비교하면 농촌 상황이 1970년대에도 굉장한 차이가 났고 1980년대에도 그랬는데, 아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를 합하면 장개석-장경국(장제스-장징궈) 독재 못지않지 않느냐, 이 말이다. 이것도 제대로 하려면 정부가 상당히 힘을 써서 구조 조정을 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걸 안 하려고 한 것이다. 시쳇말로 쉽게 먹으려고만 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 같은 게 작용하면서 농촌이 소외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영미 교수 연구를 보면 이런 게 나와 있다. 이천 나래리의 경우 새마을운동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자체적인 농업 개발을 위해 굉장한 노력을 했다. 나래리 주민들은 마을 토질에 적합하고 자신들이 잘 팔 수 있는 여러 작물을 발굴해 그걸 심었다. 나중에 소득 수준을 비교해보니 나래리가 아미리보다 더 자립적인 모습을 갖추고 소득 증대도 더 이뤄진 것으로 김영미 교수는 파악했다. 아미리가 새마을 사업 성과를 바탕으로 두 번이나 우수 마을, 자립 마을로 선정돼 대통령 하사금까지 받았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강압성이 일시적인 효과는 가져오고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건 틀림없지만, 길게 보면 그렇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부분은 1970년대 후반부터 농가 경제가 악화됐다는 통계가 여러 가지로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1976년에 오면 쌀 자급률이 102퍼센트라고 해서 주곡을 자급하게 된다고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이 시기에 주곡 자급률이 높아진 건 틀림없다. 통일벼를 누가 먹느냐 하는 문제 같은 건 제쳐놓고 보면 그렇다. 그런데 주곡에 한정하지 않고 양곡 전체를 보면 상황이 다르다. 양곡 자급률은 해마다 낮아졌다. 1970년에 86.1퍼센트, 1975년에 79.1퍼센트였는데 1980년에 가면 56퍼센트로 크게 낮아졌다. 1980년대 이후 세계 농업이 크게 변화하면서 한국의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라는 요구가 거세지는데, 양곡 자급률에서도 드러나듯이 그것에 대비하지 못했다. 그런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농가 부채가 급증했다. 한 자료를 보면, 1971년에 2만9500원이었던 1호당 농가 부채가 1975년에 가면 3만3000원으로 늘어나는데 그게 1980년에 가면 무려 80만8400원에 이른 것으로 나온다. 10년 사이에 27배로 늘어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면서 도시 근로자 가구 대 농민의 비중을 보면 1974년에는 농민이 1.08인 것으로 통계에는 나와 있는데, 1978년에는 0.98로 줄어들고 1979년에 가면 0.88로 더 낮아진다. 아울러 이 시기에 대규모 이농 현상이 일어나는 걸 볼 수 있다.

새마을운동 시기에 왜 농민들은 대거 고향을 등져야 했나

프레시안 : 이농 규모,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한홍구 교수가 쓴 책에서는 '1960년대 전반에 농촌 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 마을을 떠났는데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왜 새마을을 떠났는지 설명할 수 없다', 이렇게 비꼬는 내용을 다른 곳에서 인용하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이농 현상이 급증했다. 이농 현상은 1950년대에도 꽤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대규모 이농 현상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났다. 순 인구 이동량으로만 따져보면 1960년에서 1965년 사이에 95만3000명이 자기 지역을 떠났는데, 그 대부분은 이농자라고 봐야 할 터이다. 이것이 1966년에서 1970년 사이에는 249만2000명, 1971년에서 1975년 사이에는 187만3000명이 되고 1976년에서 1980년 사이에는 257만3000명이 된다.

1966년에서 1970년에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대규모 이농 현상이 일어난 데에는 자연재해가 큰 역할을 했다. 1967년, 1968년, 1969년 그 당시에 내가 호남 지방에 가보고 그랬는데 그야말로 지독한 한발이 연달아 들었다. 거기에다 홍수도 나고 하면서 신문마다 역에서 보따리를 짊어지고 농촌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 끝없이 보도됐다. 그런데 농민이 잘살게 됐다고들 하는 1976년부터 1980년 사이에는 왜 257만3000명이라는 최대의 인구 이동이 일어났느냐, 이 말이다. 이것은 '만약 새마을운동이 성공했으면 이런 일이 안 일어난다. 농촌은 살 수 없는 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나.

프레시안 :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 인구가 줄어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서중석 : 다른 통계를 가지고도 이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산업화가 되면서 농촌 인구가 줄어드는 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1970년대 것은 조금 이해가 안 되는 측면이 있다. 1970년에는 농촌 인구가 1442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4.7퍼센트였다. 해방 후부터 이때까지 대체로 이 정도 비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1980년에는 여기서 300만 명 넘게 줄어든 1082만 명이 돼서 전체 인구의 28.4퍼센트를 차지하게 된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줄어드는 게 당연하다고는 한다지만, 왜 새마을운동이 전개된 시기에 이렇게 많이 줄어들었느냐 하는 건 물어볼 수 있다.

이건 농업을 가장 믿을 수 없는 직업, 심지어 천덕꾸러기 직업으로까지 여기게 만든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면서 농업이 오히려 비하되는 상황을 맞았고 그러면서 전국의 마을 주민 다수가, 특히 한창 열심히 일할 나이인 중·장년층이 대부분 농사일을 그만두고 농촌을 떠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얘기하듯이 농촌은 이제 어린아이 울음을 들을 수 없고 마을 어귀에서 애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볼 수 없는 곳이 됐다. 그러면서 그전에 만들어놓은 분교가 거의 다 없어져가게 된다. 초등학생 숫자도 대폭 줄어들었다. 노인들의 마을이 돼버리는 현상을 가져온 것이다. 심지어 60대가 농촌 청년회장을 맡아야 하는 상황도 많이 나타났다.

농촌이 살고 싶은 마을이 된 게 아니라 떠나고 싶은 곳이 돼버린 것이다. 또한 도시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 되지 못하고 농촌과 도시가 각각 따로 돌아가는 생활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어린아이들이 농촌에 안 가려고 하고 도시민들도 잘 가려고 하지 않는다.

김대중 자서전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농촌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아침마다 마을에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정작 농촌은 골병이 들고 있었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 농촌은 변한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도시로 몰렸다.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잘살게 됐다는 선전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농촌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 농민들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당했다. 사진은 2013 전국농민대회(2013년 11월 22일, 서울광장)에서 배추를 머리에 쓰고 FTA 폐기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농민의 모습. ⓒ연합뉴스


유신 체제는 농민을 위해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세력을 원치 않았다

프레시안 : 고도성장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당한 농촌은 이제 인구마저 크게 줄어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서중석 : 참 슬픈 일인데, 그렇게 된 데에는 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고속도로 노선 문제 같은 것도 사실은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길게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농촌 진흥 운동을 펼치지 않았나. 그때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자각, 자립을 그렇게 강조했다. 그런데 사실 식민지 당국자가 농민들이 자각하고 자립하는 것을 과연 바랐겠는가. 바로 그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때 농민들의 자각, 자립, 자조 이게 그렇게 많이 강조됐다. 그런데 정말 농민들의 자각, 자조를 돕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지 않고 강제 농정으로 추진됐다. 그리고 유신 체제에 강력히 흡수된 형태로 진행됐기 때문에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변혁 세력, 정부의 농촌 정책과 농업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기가 굉장히 힘들게 돼버렸다.

농협이 농민의 것이 못 된 건 그전부터 그랬던 것이지만, 이렇게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변혁 세력, 비판 세력이 존재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면서 종교와 결합한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에 들어가면 전남 함평의 고구마 문제 같은 게 불거지면서 드디어 농민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1980년대에는 상당히 큰 규모로 농민 자조, 자립, 자각 운동이 전개된다. 이처럼 위에서 심는, 그러니까 말로만 자조, 자립, 자각을 강조하는 운동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새로운 운동이 벌어진다. 그런데 그때쯤 되면 세계적인 규모에서 농업 개방이 강요돼버린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중 곡가제 같은 걸 통해 쌓인 양곡 적자를 정부가 부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조성된다.

그러면서 이래저래 농촌은 골칫덩어리가 돼버리는 식으로 됐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극단적인 불균형 성장 정책이 영향을 끼쳤다. 또한 영호남 갈등 같은 것 때문에도 차별 대우를 심하게 받는다고 생각하는 호남인들이 더 많이 이농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의료, 교육, 사회 정책 같은 것들이 제대로 된 농업 자체에 매달려 살겠다는 농민들을 육성하는 문제와 연관 관계 속에서 이뤄지면서 전체적으로 농촌이 변화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전에 내가 농촌을 취재하러 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농촌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가 교육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무척 많더라. 우리나라에서는 먹고살려면, 좋은 자리를 가지려면 뭐니 뭐니 해도 교육을 잘 받아야 하는데 지금 같은 농촌에 어떻게 자식을 둘 수 있겠느냐, 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직접 도시로 가서 살든가, 돈이 많이 들더라도 자식을 도시로 내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거듭 얘기하지만 농촌, 농민, 농업과 전반적으로 연관된 형태로 교육, 의료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인 문제, 경제 문제를 같이 다뤘어야 했는데, 그게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 결국 오늘날과 같은 농촌의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 것 아니겠느냐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난 지금 농촌에 가보면 참 예뻐 보인다. 동네도 잘 다듬어져 있고 도로도 예쁘고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살 만하다. 가스 같은 것이 공급되는 마을도 많다. 그전보다 월등 편하게 연료가 공급된다는 말이다. 담장을 꽃나무 같은 것으로 잘 가꿔놓은 데도 많다.

우리가 새로운 형태의 농촌 새마을운동을 펼 때가 이제 된 것이다. 요새 귀농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그게 전반적으로 더 확대돼야 한다. 그러면서 한살림처럼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는 활동이 더 규모 있게 전개돼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를 어느 때보다도 많이 생각해야 할 때라고 본다.

(농촌, 농민, 농업 문제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조금 더 생각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자 시절 쓴 글의 일부(< > 부분)를 옮긴다. 한중FTA 8차 협상 직후인 2013년 11월 25일에 게재된 기사('제2 새마을운동' 찬가 속 '이등 국민'들의 절규)의 결론 부분이다.

<한국 현대사는 농민 잔혹사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때는 한국전쟁 수행 및 전후 복구를 위해 현물로 세금을 거둔 임시토지수득세가 대표적으로 농민들을 힘들게 했다. 대량으로 들어온 미국의 잉여 농산물도 농촌엔 커다란 부담이었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들어 산업화가 본격화하면서 강제된 저곡가 정책은 농촌의 숨통을 죄었다. 저곡가 정책은 도시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개방 폭이 넓어질 때마다 농민과 농업은 우선적으로 희생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농촌이 피폐해지자 1970년대에 등장한 것이 새마을운동이지만, 이 역시 농촌의 쇠락을 막지 못했다. (…)

이처럼 한국이 해방 후 이룩한 놀라운 산업화의 밑바탕에는 농촌의 희생이 있었다. 병영 같은 공장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피땀과 함께 농민들의 고통을 먹고 자란 '한강의 기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시간을 거친 2013년, 한국에서 농민들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수출 중심 경제의 고도화를 위해 언제든 희생될 수 있어야 함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에 뒤처진 이들', 이따금 과격 시위나 벌이는 '2등 국민' 같은 존재로 적잖은 이들의 눈에 비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한중FTA나 TPP를 무조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국가 전체의 이익이라는 차가운 숫자만을 제시하며 또다시 따르라고만 요구하는 건 이들에겐 너무나 잔인한 일이라는 말이다. '2등 국민'을 체계적으로 만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맞지 않는 일이다. 차가운 숫자 이전에 노동으로 얼룩진 이들의 굵은 주름을 찬찬히 살펴보고, 이들에게 '2등 국민'의 딱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경제의 고도화를 추진할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그 출발점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제2의 새마을운동',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정부가 소리 높여 외치기 전에 새마을운동과 '한강의 기적' 동안 이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살피는 것, 이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