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분노 폭발했는데 잔치 벌인 청와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0> 유신의 몰락,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부마항쟁은 유신 정권에 결정타를 날린 역사적 사건임에도 오늘날 많이 잊힌 투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마항쟁이 있었는지조차 잘 모르는 이들도 적잖은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마항쟁은 김영삼 제명 때문에 일어난 것 아니냐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후자의 경우 광주항쟁은 김대중 문제 때문이라고 일부에서 오해하는 것과 닮은꼴이다. 부마항쟁, 광주항쟁이 일어나는 데 각각 김영삼, 김대중 문제가 여러 요소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두 정치인과 관련된 사건들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두 항쟁을 특정한 지역에 가두고 그 의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위험한 논리다. 그런 의미에서 부마항쟁이 어떠했는지부터 찬찬히 살폈으면 한다.

서중석 : 부마항쟁은 1960년 4월혁명,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부마항쟁? 어디서 들은 것 같긴 하다' 하는 식으로 알 듯 모를 듯한 상태에 있다. 부마항쟁을 잘 모른다, 이 말이다.

왜 이렇게 부마항쟁을 아는 사람이 드문가 하면, 우리 현대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부마항쟁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17일까지 어떤 언론 기관도 보도하지 않았다. 18일 0시에 계엄이 선포되니까 보도하기 시작했다. 계엄 선포는 국가의 일이고 정부에서 선포한 것이니까 언론 기관에서 크게 보도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계엄을 선포할 정도로 큰 사태인데도 아무런 보도도 없는 그런 나라였다. 전 세계에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제대로 보도하기는커녕 취재조차 막은 부끄러운 언론

프레시안 : 무엇 때문이었나.

서중석 : 긴급 조치 9호 때문이었다. 긴급 조치 9호 아래에서는 유신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또는 권력 쪽 기준으로 볼 때 모욕한다고 할까 헐뜯는 어떤 것도 보도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게끔 돼 있었다. 거기에는 유언비어 금지도 들어 있었는데, 그 유언비어라는 게 어디까지가 유언비어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돼 있었다. 실제로는 어떤 것이라도 유언비어로 단정해 때려잡을 수 있었다.

부산에 두 개의 큰 신문사가 있다. 10월 16일에 그렇게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신문사에서는 당연히 가서 보도하자는 얘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한 신문사에서는 기자들을 거리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취재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자들이 개별적으로 취재를 열심히 해온 경우에도 17일 아침 편집국 회의에서 이것에 관한 얘기가 한마디도 안 나왔다고 한다. '어제 우리 고장에서 이렇게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쓸 것인가', 편집국 회의에서 이런 논의를 마땅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쓸 수 없다면, 못 쓰는 상황에 대해서라도 문제를 제기하든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거대한 사건에 대해 편집국 회의에서 한마디도 얘기를 안 했다고 한다. '쓰지도 못할 것을 알아서 뭐할 거냐. 그러니까 취재하지 마라. 쓰지 못하게 돼 있는 건데 뭐하러 회의 안건으로 올리느냐', 이런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취재하러 간 기자들이 질책을 받고, 기자들한테 중요한 현장에 가지도 못하게 하는 기막힌 세상이었다.

(금족령과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현장에 나간 기자들 중 상당수는 현장에서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밖에서는 연속 전화가 걸려왔다. (…) 취재에 임하고 있는 기자들은 고민을 호소해왔다. 기자 신분임을 밝혀도 시위대는 시위대대로, 진압대는 진압대대로 기자를 마구 폭행한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대다수 언론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공권력의 경멸이 결합해 발생한 현상이었다. '편집자')

그런데 계엄이 선포된 후 그런 신문사들의 데스크 쪽에서 '이제 살았다', 이랬다고 한다. '이젠 계엄사에서 하라는 대로만 보도하면 되니까 큰 근심을 덜었다', 이런 얘기다. 조갑제 기자가 6월항쟁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유고>라는 책을 1, 2권으로 냈다. 여기서 유고라는 건 박정희의 유고, 즉 10·26을 가리킨다. 글의 내용상 부마항쟁이라기보다는 부산 항쟁이라고 해야 할 터인데, 그 부산 항쟁에 대해 취재를 참 잘해서 쓴 부분이 그 책에 있다. 부마항쟁 당시 조갑제는 부산 국제신문 기자였는데, 물론 이 사람도 그 당시 신문에 한마디도 쓰지는 못했다. 조갑제가 그 책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1979년 10월 18일 계엄이 선포됐을 때 부산에서건 서울에서건 다른 신문들은 다 계엄사 발표대로만 내보냈지만 동아일보 하나만은 진실을 한마디라도 집어넣으려고 애를 썼다고 하면서, 그렇게 몇 마디라도 진실을 보도하려고 노력하면 할 수도 있는 건데 다른 모든 신문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썼다.

그처럼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가운데 계엄이 선포되고 위수령이 발동되면서 부마항쟁은 일단락된다.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한테는 '부마항쟁? 잠깐 어디서 들은 것 같긴 한데…', 이렇게 돼버리고 만 것이다. 굉장히 큰 민주화 운동, 시민과 학생들의 항쟁이었는데도 그렇게 돼버렸다.


▲ 부산에 비상 계엄이 선포됐다는 소식을 전한 1979년 10월 18일 자 동아일보 1면. ⓒ동아일보

항쟁에 불을 붙인 부산대 학생들, "고생 많다" 응원한 시민들

프레시안 : 부마항쟁,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부마항쟁은 10·26과 직결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부산을 살펴보자.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에서 두 개의 유인물이 돌았다. 시위를 선동하는 선언문(민주 선언문, 민주 투쟁 선언문)이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거의 모이지 않았다. 그래서 15일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16일 상황은 달랐다. 이날 오전 10시경 부산대 상대 2학년 학생인 정광민이 중심이 돼서 유인물을 뿌리고 학우들이 있는 강의실에 뛰어들어 선언문을 나눠준 뒤에 '투쟁하러 나가자'고 선동하면서 시위가 시작됐다. 40여 명이 일제히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이 계속 늘어나서 조금 지나면 2000여 명이 됐다. 학생들은 새로 만든 정문, 이걸 신정문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경찰하고 투석전을 벌였다.

그렇게 투쟁을 하면서 몇몇 학생이 놀라운 발상을 하게 된다. 뭐냐 하면 시내로 빠져나가자는 것이었다. 교문에서 경찰하고 싸울 게 아니라 시내에 나가서 투쟁하자는 것이었다. 구정문 옆 블록 담장을 무너뜨리고 500여 명의 학생이 드디어 학교 밖으로 진출했다. 경찰의 허를 팍 찔러버린 것이다. 다른 학생들도 다른 쪽 담장을 무너뜨리면서 거리로 나왔다.

프레시안 : 시민들 반응은 어떠했나.

서중석 : 부산대가 외진 데 있어서 중심가까지는 꽤 멀지 않나. 학생들이 버스에 탈 때 여성 차장은 차비도 안 받으려 했고, 승객들은 어깨를 두드리면서 손을 잡아줬고, 운전기사는 격려의 말을 해줬다. 경찰차가 쫓아오자 버스를 더 빨리 운전한 기사도 있었다. 이러니까 버스에 탈 때부터 학생들은 신이 났다고 할까, 기세가 올랐다. '시민들이 이렇게 우리를 지원하는구나', 이걸 느낀 것이다.

낮에 학생 시위대는 남포동과 광복동을 중심으로 한 중구 지역 도심지에서 계속 시위를 했는데 이게 부산에서는 서구, 동구로 퍼져 나가고 나중에는 마산 지역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학생들은 시내에서 경찰에 쫓기면 거미줄처럼 뻗쳐 있는 골목으로 숨거나 시민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다시 쏟아져 나왔다. 일종의 도시 시위 게릴라전이라고 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경찰과 끈질기게 싸웠다.

시민들은 이렇게 여러 군데에서 도시 시위 게릴라 투쟁을 벌이는 학생들한테 힘을 실어줬다. 학생들을 추격하는 경찰을 향해 시민들은 건물 위에서 재떨이, 화분, 병 등을 던져 진압을 방해했다. 어떤 데서는 옥상에서 색종이 가루를 시위대 쪽에 쫙 뿌리기도 했다. 상인들은 쫓기는 학생을 보면 셔터를 내리고 숨겨줬다. "학생들 고생 많다", "밥 먹었느냐"고 하면서 음료수도 내놓았다. 호주머니를 털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김밥, 빵, 우유, 삶은 계란, 박카스, 음료수 같은 걸 사서 시위대에 던져주는 시민들도 있었다.

오후 5시쯤 됐을 때 국제시장 골목에서는 2만 명 이상의 학생과 시민들이 뒤섞여, 멀리서 보면 막 출렁이는 것처럼 시위를 벌였다. 오후 6시경이 되면서 시위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학생 시위 차원을 넘어서 민중 항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서 시위 주도권은 점차 학생들로부터 시민들에게 넘어가고, 아주 과격하다고 할까 격렬하게 시위가 전개된다.

어둠이 깔리면서 민중 항쟁으로 변모…파출소 부수고 박정희 사진 태우고

ⓒ오월의봄
프레시안 :
시민들이 주도권을 갖게 된 후 시위 양상,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오후 7시 부산 도심의 대로가 시위 인파로 넘쳐흘렀다. 5만 명 정도 되는 거대한 시위 행렬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대학생은 이젠 소수가 돼버렸다. 넥타이를 맨 퇴근길 회사원부터 노동자, 상인, 접객업소 종업원, 재수생,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이때 고등학생들이 많이 참여한 걸로 돼 있다.

5만여 명의 성난 민중은 "유신 철폐", "독재 타도", "언론 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토록 외치고 싶었던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마음 놓고, 실컷 외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는 투쟁이었다고 한다.

밤 8시 경찰 진압대가 도심의 밤하늘을 온통 최루가스로 뒤덮어버렸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돌과 병으로 대항하면서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 벌어졌다. 경찰이 숫자가 적으니까 퇴각하게 되는데, 퇴각하는 경찰을 향해 군중은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면서 파출소, 언론 기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밤 8시 40분경 남포동에 있는 남포파출소를 습격, 파괴했다.

밤 9시 이후에는 경찰이 더욱더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면서 밤 10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한다고 발표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밤 10시 바로 그 시간에 군중은 부평파출소를 파괴했다. 곧이어 밤 10시 반에는 보수파출소, 10시 50분에는 중앙파출소를 부쉈다.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계속된 민중들의 항쟁으로 남포·부평·보수·중앙·제1대청·흑교파출소 등 모두 11개의 파출소가 파괴됐다. 또 시위대는 여러 파출소에서 떼어낸 대통령 박정희 사진도 불태워버렸다.

이날 부상자도 많이 나왔다.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관 95명이 다쳤는데 그중 18명이 중상, 92명이 경상으로 돼 있다. 그리고 학생 282명을 포함한 시민 400여 명이 연행된 것으로 나와 있다.

유신 선포 7년 되던 날, 다시 타오른 항쟁의 불길

프레시안 : 17일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10월 17일은 다 알다시피 유신 선포 7년이 되는 때였다. 부산대는 임시 휴교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부산대 학생 1000여 명이 오전에 다시 구정문 앞으로 모여들어 "유신 철폐", "학원 사수" 등을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이들은 전날에 이어 다시 시내로 나가게 된다. 이때 동아대에서도 2000여 명이 교내에서 시위를 하다가 시내로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몇 갈래로 시위대가 형성됐다.

밤이 되자 전날과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200명 내지 300명으로 이뤄진 시위대가 여러 개 조직돼서 부산 각지를 누비고 다녔다. 시민들은 경찰들의 머리 위로 연탄재, 화분, 빈 병 등을 집어던졌다. 시위대는 오후 7시 25분경 충무파출소를 부수고, 서부경찰서에 돌을 던진 다음에 동대신파출소를 또 파괴했다. 그런 식으로 서구 지역을 휩쓸었다. 오후 8시 20분경 부산역 방면에서는 초량1파출소를 습격하고 부산진역 쪽으로 올라갔는데, 부산진역 앞에 있는 동부경찰서에서 경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고 나서 2500명 정도 되는 시위대가 부산역, 시청 쪽으로 진출했다. 또한 중부세무서, 서대신3동사무소를 습격했다.

경찰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3400여 명을 투입했지만 항쟁의 불길을 잡지는 못했다. 밤 10시경 육군 2관구 사령관 정상만 소장이 이끄는 지역 부대를 투입하기로 했지만, 그것으로도 시위대를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때쯤부터는 시위가 좀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18일 새벽 1시 30분까지 항쟁이 계속됐는데, 이날 시위로 모두 21개소의 파출소가 파손되거나 불탔다. 경찰 차량 6대가 다 타고 12대가 파손됐다. 경남도청과 중부세무서, MBC, KBS, 부산일보, 일부 동사무소 등이 파괴되고 돌팔매질을 당했다. 파출소, 경찰서라든가 관공서, 언론 기관들이 전날보다 더 많이 공격당한 것이다. 그런 속에서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 계엄이 선포됐다. (이때 모든 언론사가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CBS는 시위대의 공격 목표에 들어가지 않았다. 기독교계 일부의 민주화 운동과 발맞춰 보도, 시사 교양 프로그램 등을 통해 유신 체제에서도 나름대로 진실을 알리려 노력한 곳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진실 보도라는 사명을 저버리고 권력의 나팔수 노릇을 하던 언론사가 민중에게 공격당하는 일은 4월혁명(서울신문), 광주항쟁(광주 MBC·KBS) 때에도 발생했다. '편집자')

비상 계엄 극약 처방한 박정희, 또 월권한 차지철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비상 계엄을 선포한 건 1972년 유신 쿠데타 이후 7년 만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됐나.

서중석 : 10월 17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 선포 7주년 기념 만찬이 열렸다. 가수들이 나와서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고,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은 두 패로 나뉘어 노래자랑을 했다. 그러고 있는데, 내무부 장관이 여러 차례 대통령한테 접근해서 귓속말을 했다. '부산 사태'에 대해 보고한 것이다.

밤 10시 30분 비상 연락을 받은 장관들이 국무회의실로 모여들었다. 밤 11시 30분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비상 계엄 선포가 제안됐는데, 이것에 다 동조한 건 아니었다. 일부 장관은 '좀 신중해야 하지 않느냐'고 얘기했고 이용희 통일원 장관은 서명을 못하겠다고 버텼다. 계엄을 선포하려면 국무위원들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용희 장관이 버티면서 애를 먹였다고 한다. 조갑제 책에는 구자춘 내무부 장관, 노재현 국방부 장관, 박찬현 문교부 장관도 비상 계엄을 펼 만한 사태는 아니라고 개인적으로는 판단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굳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 것으로 돼 있다. 부산 현지에 있던 2관구 사령관도 군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지만 소용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야말로 극약 처방을 한 것이다.

이 비상 계엄을 선포하는 과정에서도 차지철은 월권을 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17일 밤 9시 30분이 조금 지나서 육군 군수기지사령관 박찬긍 중장한테 전화를 했다. 계엄 선포에 대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이미 청와대 쪽에서는 계엄 선포를 결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18일 새벽 서울의 공수 여단을 부산으로 공수하고, 군수기지사령관 박찬긍 중장에게 계엄 선포 및 계엄사령관 임명을 통보한 것도 차지철이었다. 국방부 장관이나 육군 참모총장과 상의하지 않고 자기가 먼저 그렇게 해버린 것이었다. 지나친 월권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짓을 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18일 새벽 2시경 부산의 계엄사령부에 김재규가 나타났다. 야간에 비행기로 급히 내려온 것이다. 김재규는 박찬긍 중장 등 여러 사람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현지를 시찰했다.

1980년 광주의 비극 조짐 드러낸 공수 부대의 무자비한 폭력

프레시안 : 계엄 선포 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2개 여단의 공수 부대 등이 투입됐다. (공수 부대와 더불어, 포항에 있던 해병대도 일부 동원됐다. '편집자') 그러면서 당국은 대학을 휴교시키고, 집회와 시위 등 모든 단체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과 출판을 검열하고, 사업장 이탈이라든가 태업을 금지하고,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연장하고,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고 알리는 포고문을 시내 곳곳에 붙였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각 대학, 관공서에 들어왔다.

이때 여단장 박희도 준장이 이끌고 온 공수 부대가 부산 시민들한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다. 얼굴에 시커먼 위장 크림을 바른 공수 부대는 참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을 마구 폭행했다. 예컨대 '건방지다'면서 시민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려 뇌 수술을 받게 하고 그랬다. 공수 부대의 폭행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백번 양보해서 곤봉으로 때릴 때에도 어깨 밑을 갈겨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공수 부대원들은 머리를 주로 때렸다. 다친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 경찰조차 군인들한테 맞았다. 동부경찰서의 한 경위는 공수 부대원들이 시민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걸 말리다가, 다른 형사 2명과 함께 10여 명의 공수 부대원한테 몰매를 맞았다.

조갑제 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만, 광주항쟁에서 나타나는 공수 부대의 폭력은 이미 부산에서 많이 드러났다. 계엄이 선포된 건 부산에서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였다고도 볼 수 있다. 큰 시위는 16일, 17일에 있지 않았나. 그렇지만 일부에서 계속 시위를 하고는 있었다.

공수 부대가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속에서도 18일 오후 8시경 남포동 동명극장 앞에 300여 명의 학생, 시민이 집결해 "계엄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벌였다. 얼마 후 시위 인원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시청을 향해 전진했다. 그러자 시청을 방어하던 공수 부대가 최루탄 공세를 퍼부으면서 대검을 꽂은 총을 앞세우고 돌진해왔다. 차려 총 자세로 시위대를 향해 달려든 공수 부대원들은 닥치는 대로 총을 휘둘렀다. 공수 부대원들의 소총 개머리판에 수많은 시민이 다쳤다. 결국 시위대는 비 내리는 남포동, 광복동 거리로 흩어졌다. 사흘에 걸친 부산 항쟁은 그렇게 해서 끝을 맺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여든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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