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사관 표출했던 박정희는 왜 돌변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4> 유신 체제, 스무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1970년대 사상, 문화 동향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제 1970년대 문화를 몇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자. 그중에서 충효 사상, 전통 문화 강조로 얘기되는 복고주의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복고주의 통로를 이용해 국가주의를 교육시킨 것인데, 학교에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TV 황금 시간대에도 그런 걸 하게끔 돼 있었다. 그 부분을 살펴보자. 충효 사상은 국민교육헌장, 반공, 새마을운동 교육과 함께 유신 후기로 가면 굉장히 중요한 교육 과정이 된다.

유신 체제는 파시즘적 국가주의를 뼈대로 하고 있었다. 파시즘을 보면 위대한 인물이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참 위대한 지도자, 퓌러(Führer) 그러니까 총통 같은 것으로 표현된다. 한국의 경우 '위대한 인물, 영도자가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했다. 특히 군사적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구해준 위대한 지도자다', 이런 상이 반공 운동에서 많이 생겨났지만 충효 사상이나 전통 문화 강조도 그러한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데, 국가주의가 머릿속에 박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영도자에 대해 누군가 부정적으로 얘기하거나 비판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에 관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도자 말은 절대 진리다 하는 식의 논리 구조를 갖게끔 하는 데 충효 사상 같은 게 상당한 역할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런 전통 문화 강조, 충효 사상 교육에 관해 진중권 교수가 비판한 내용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충성과 효성, 충신과 효자, 의리와 절개, 인덕 정치 같은 봉건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충성을 강조하는데 이건 단순한 봉건주의 재생이 아니라 봉건주의와 전체주의를 결합해 수령 절대주의, 수령의 개인 독재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라고 진중권은 비판했다. 그러면서 진중권은 남한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덧붙이면, 지난번에 이야기한 반공 포스터 중에서 진중권은 "간첩 잡아 충성하고 상금 타서 효도하라", 이런 걸 문제 삼았다. 충효 사상을 가지고 간첩 잡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이 충효 사상을 강조한 속내

ⓒ오월의봄
프레시안 :
 이 시기 충효 사상 교육, 어떤 식으로 이뤄졌나.

서중석 : 남한에서는 이 문제와 결부해 어떻게 교육시켰느냐 하는 걸 전에 얘기한 문교부 자료(1975년에 초·중·고 교사용으로 만든 <사상 교육, 반공 교육 지도 자료집>)를 가지고 보자. 그 자료에서 '우리의 정통성과 국가관'이라는 게 단원 5로 제시돼 있다. 그걸 보면 첫 번째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고 그것의 첫 번째가 문화적 정통성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어째서 문화적 정통성을 갖느냐고 하면서 "북괴의 문화적 이단성"을 얘기했다. 민속의 파괴, 미풍양속의 파괴, 개인의 신격화와 우상화를 통한 조상 숭배 전통의 부정, 인간성과 정신문화보다 우위에 서는 당의 이념, 가족 제도와 가정생활의 파괴 같은 것들을 쭉 예로 들었다.

이것들 중 일부는 진중권이 이야기한 것하고 다르다. 진중권은 북한이 충성과 효성, 충신과 효자, 의리와 절개, 인덕 정치 같은 걸 강조한다고 했다. 물론 시기에 조금 차이가 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으나, "북괴의 문화적 이단성"이라고 문교부 자료에서 제시한 게 사실과 부합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도 많다.

그러면서 문교부 자료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문화적 정통성으로 무엇을 들고 있느냐 하면 효의 사상, 가족 제도의 계승, 미풍양속의 계승·발전인데 이건 기존 질서와 도덕규범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과 민속 문화의 전승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예로부터 내려오는 걸 전승하고 있다고 해놨다.

지금 이야기한 것들과 관련해 나는 '진중권 교수의 비판이 오히려 상당히 설득력 있다. 이것들은 다 복고주의와 연결되는 것 아니냐'고 본다. 문교부 자료에 제시된 것 중에서 좋게 볼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좋게 볼 수도 있는 게 몇 가지는 있지만, 상당 부분은 오히려 그걸 너무 일변도적으로 강조하면 분명히 문제가 심각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복고주의 중에서도 아주 문제가 심각한 복고주의, 국가주의를 고창하는 복고주의로 떨어질 수 있다. 여기서 하나하나 다 예를 들 수는 없지만 구체적인 교육 내용 중에는 그런 게 많다. 나는 이러한 복고주의와 관련해 두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프레시안 : 어떤 것들인가.

서중석 : 하나는 이승만 정권 후기에 오륜이라든가 충효 사상을 강조한 것을 상기시키는 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1950년대 전반기에도 이승만 정부가 복고주의적인 유교 강조 작업을 하는 게 있었지만, 1956년에 가면 이 대통령이 어머니날 때 "삼강오륜을 사회 규범으로 삼자"고 하면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오륜을 엄정히 가르치자"고 했다. 그 이후에도 "예로부터 우리가 배워서 행해오던 삼강오륜은 고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이승만 정부에서 오륜을 지키는 운동, 일종의 충효 사상인 셈인데 그걸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1956년 이승만 정부는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했다. 1973년 박정희 정부는 어머니날 명칭을 어버이날로 바꿨다. 어머니날은 구미에서 기원한 것으로, 일제 시대에 조선 기독교계에서는 그 영향을 받아 '어머니 주일' 또는 '부모님 주일'을 지키기도 했다. 편집자)

나는 이 시기를 다룬 연구 논문에서 '이런 것은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 장제스 국민당의 파시즘과 비슷한 면이 있다. 복종을 강조하는 충효 사상으로 동아시아적인 파시즘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승만 정부는 그런 노력을 계속하면서, 박정희 정부가 1968년에 제정한 국민교육헌장과 비슷한 모델도 생각했다. 그래서 1959년에 국민 윤리 강령안을 만들어 1960년 1월에 최종적으로 작성하고 2월에는 도의교육위원회라는 데에서 채택하는데, 그 후 이승만 정권이 붕괴해서 학생들이 이걸 외우지는 않았다. 국민교육헌장처럼 학교에서건 직장에서건 달달 외우게 하는 데까지 가지는 않고 사장돼버렸다.

1970년대에도 반공 교육, 국민윤리 교육 같은 데에서 충효 사상을 굉장히 강조하면서 오륜 같은 걸 중요시한다. 오륜 중에서 군신유의는 이렇게 설명하더라. 군신유의는 봉건 시대의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군(君)을 지금의 국가로 생각하면 된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로 이해하면 오늘날 우리 자신의 도덕적 규범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얘기다.

국민윤리 고등학교용으로 1976년에 문교부에서 편찬한 책을 보면 우리 겨레의 경애 정신의 핵심을 오륜으로 보고 있다. 오륜 사상은 특히 우리에게 사람됨의 길을 가르쳐준 사상이라고 하면서 군신유의, 부부유별, 붕우유신 등 오륜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그러고는 결론으로 '오륜의 정신적 바탕을 꿰뚫어보면 과거에 비하여 오히려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그런데 이것을 봉건적 잔재로만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윤리 질서가 혼란에 빠지게 됐다. 오륜의 근본정신을 살려 지켜야 한다. 무질서하게 서구 사조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오륜에 의한 인간관계를 직시할 때다', 이렇게 주장했다. 이렇게 오륜을 강조한 건 오륜의 기본 사상이 가부장적 상하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많은 학자가 이야기하고 있다. 그걸 유신 시대에 고취한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 상기시키는 것이 일본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이런 충효 사상 같은 것을 얼마나 강조했느냐 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메이지 유신 때부터 1945년 패전할 때까지 충효 사상이 정말 강조되지 않았나. 이준식 박사는 여기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하면서 그중에서도 야쓰오카라는 사람을 주목했다.

천황제 이데올로그 야쓰오카와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야쓰오카는 어떤 사람인가.

서중석 : 야쓰오카는 일본의 대표적인 천황제 이데올로그인데, 히로히토가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읽은 종전칙어('종전 조칙')라는 것을 가필한 사람으로 돼 있다. 종전칙어도 참 기분 나쁜 말이다. 8월 15일 항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전쟁을 끝낸다'는 뜻으로 종전칙어라는 제목을 붙여 발표했다. 히로히토 다음 천황의 연호인 헤이세이, 지금도 쓰는 연호인데 이것도 야쓰오카가 지었다고 한다.

야쓰오카는 1920년대부터 국가주의 운동, 그러니까 일본식 파시즘인데 그런 운동을 펴기 위한 여러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면서 일본 파시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농촌 활동가를 기르는 활동을 벌이고 그랬다. 이 사람은 일본 파시스트들한테 큰 영향을 끼쳤고 패전 이후에도 정계, 재계에 아주 영향력이 컸다고 얘기된다. 한때 조선에도 왔었는데 대표적인 친일파인 최린, 윤치호, 최남선, 박영철, 한상룡 같은 사람들하고 얘기를 했다는 대목도 있다.

박정희는 1961년 5·16쿠데타에 성공한 후 야쓰오카와 연락을 하려고 했다. 어디선가 야쓰오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야쓰오카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지 연락을 취하려고 했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하기 전 일본에 들르는데, 가기 전인 10월에 서울대 정치학 교수이던 이용희를 특사로 일본에 파견해 야쓰오카를 만나게 했다. 야쓰오카가 주선해서 기시 노부스케, 그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또 당시 수상이던 이케다 하야토 같은 사람을 이용희가 만났다. 박정희 방일을 앞둔 사전 정리 작업이었다. 박정희가 기시 노부스케 같은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을 이때 주선해서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추측된다.

그러한 야쓰오카가 1976년 서울에 왔다. 그때 야쓰오카가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위대한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에 의해서만 건설된다", 이렇게 발언했다. "한국인은 유교의 덕목을 알고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하면서 유교의 충효 윤리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할 것을 박정희 정권에 권고한 것 아니겠느냐고 이준식 박사는 해석했다.

식민 사관을 강하게 드러냈던 박정희가 1970년대에 다른 모습 보인 이유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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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 후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년),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 등을 통해 강도 높은 식민 사관을 드러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오면 전통 문화, 민족 문화 등을 강조하고 주체적 민족 사관으로도 표현되는 것을 내세운다. 충돌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두 흐름을 시기에 따라 다르게 강조한 이런 모습, 어떻게 보나.

서중석 : 1961년 쿠데타 이후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같은 데에서 굉장히 짙은, 너무나도 심한 식민 사관을 박정희가 드러낸 것과 1970년대에 와서는 충효 사상, 전통 문화 같은 걸 강조한 것이 좀 안 맞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인데,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건립한 유신 체제는 기본적으로 의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능률 위주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유신 체제 내내 강조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국이 서양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아니라는 게 기본으로 깔려 있고 그것에는 식민 사관이 일정하게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박정희가 쿠데타 후 1960년대 초반에 드러냈던 식민 사관이 들어 있다. 내가 그 점을 강조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그 이후에 한국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국난 극복을 특별히 강조한 면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이 박정희의 기본 사고하고 꼭 모순되는 것이냐, 이런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가 사회 변화에 기민하다고 할까, 기회주의자답게 반응을 보인 것 아니냐,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 1960~1970년대 한국 사회의 문화 변화에 자신을 맞춰나가는 변용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서 유신 체제에서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한국적'이라는 것과 연결해서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고 식민 사관을 비판하는 면도 보여줬다.

그러나 이때 강조된 민족 주체성이라는 게 애매하다. 박정희가 1960년대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특히 1970년대에 가면 아주 강조하는 것인데, 그렇게 얘기한 민족 주체성이라고 하는 게 식민 사관이 배제된 것이냐, 그것을 비판한 것이냐고 할 때 그렇다고만 얘기하기가 쉽지 않게 돼 있다. 그 사람의 언설을 통해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그렇다.

한국에서는 전근대 시대에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자주적인 국가를 갖는 것을 민족 주체성으로 이해하는 면이 있었다. 고려 시대에도 사대파가 있고 국풍파 비슷한 것도 있고 그러지 않았나. 그렇지만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자주성을 갖는 것을 가리켜 민족 주체성이라고 얘기들을 해왔다. 사실 4월혁명 운동기에 진보 세력, 혁신 세력을 중심으로 민족 자주를 강조한 것에도 그런 면이 아주 강했다. 학생들의 경우도 그랬다. 1980년대에도, 이때는 반미 자주화 운동이라고까지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일본과 미국에 대한 강한 비판 속에서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한테서 나타난 민족 주체성에는 일본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 전혀 없고 미국을 비판하는 것도 없었다. 더 나아가 일본 군국주의 비판이 애매하게 돼 있다. 군국주의 파시즘 비판을 포함해서 그렇게 돼 있다. 그런데 민족 주체성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곁들이는 게 많았다. 뭐냐 하면 반공, 반북이 상당히 많이 연결돼 있었다. 그런데 반공, 반북 하는 게 민족 주체성인가? 이승만 정권 때에도 그런 면이 있었지만, 이 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민족 주체성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 것 아니냐, 민족 주체성을 많이 강조한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 민족 주체성이냐, 이런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주체적 민족 사관이라는 것은 그 본뜻대로라면 식민 사관과 양립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서중석 : 식민 사관 극복 문제 같은 것에도 좀 애매한 면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을 하나 보자. 박 대통령은 1973년 2월 26일 서울대 졸업식에서 이렇게 치사를 했다. 서구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같은 걸 부정적으로 보면서 "우리에게는 공업화나 근대화가 결코 서구화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서구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같은 걸 비판하고 그걸 극복해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런데 우리는 8·15 해방 이후 일제 식민지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기도 전에 또 다른 구미 문물의 홍수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이런 것을 박정희가 식민 사관을 청산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난 전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일제 식민지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자는 부분을 식민 사관을 청산하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구미의 근대적 인권 존중 사상, 민주주의 사상, 자유주의, 개인주의 같은 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때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생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다. 민주주의, 휴머니즘 같은 사상은 서구 것이니 무조건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데 힘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이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또 다른 구미 문물의 홍수에 빠지고 말았"다고 하면서 구미 문물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식으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서울대생들한테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바로 이어서 "여러분은 곧 10월유신이며 주체다", 이렇게 얘기했다. 역시 박정희의 기본적인 생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가 이렇게 애매모호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언설을 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유신 체제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식민 사관과 모순되거나 차이가 나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문화적 변화가 1960~1970년대에 일어나게 되지만,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이 문화적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요인이 있었다. 예컨대 국란 극복이라는 걸 특히 1970년대에 강조하는데 그건 박정희야말로 국난을 극복한 대표적인 인물, 공산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한 인물이라고 부각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국난 극복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국난 극복이라는 것이 유신 체제 유지나 통치에 유용한 소재로 등장하게 된다. 국난 극복과 관련해 우리 역사에서는 대외 항쟁을 강조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서 육사 교재라든가 국민윤리 같은 여러 책에서 대외 항쟁을 강조하거나 언급하게 되는 것인데, 대외 항쟁을 강조하는 건 식민 사관의 타율 사관과 좀 다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이 작용해, 모순된 것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던 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 등에서 박정희는 조선 사회를 철저하게 부정하지 않았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 관학자들을 포함한 식민 사관의 주창자들이 부르짖은 것보다도 더 심하게 조선 시대를 부정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다는 걸 전에 살펴보지 않았나. 그렇지만 1970년대 이때쯤 와서는 그렇게 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예컨대 세종대왕을 굉장히 강조하게 되고 곳곳에 그 동상을 세우고 그러는데, 그렇게 하려면 조선 사회가 뛰어난 문화를 가졌다는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식민 사관 논리대로 '조선 사회가 정체됐고 변화, 발전이 없고 당파 싸움만 했다', 이렇게만 얘기할 수 없는 면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국민교육헌장 반포 후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면서 국사 교육 강화 같은 조치를 취하는데, 그런 책을 내는 사람들은 박 대통령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우리 역사의 밝은 면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국적 있는 교육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전통 문화를 강조하면서 한때 외래어도 못 쓰게 하는데, 그러면서 연예계에서 희한한 현상도 일어나고 그랬다. 예컨대 바니걸스는 토끼소녀가 돼버렸고, 어니언스는 양파들이 돼버렸고, 패티김이라는 가수는 원래 이름인 김혜자로 돌아가야 했다. 특히 이상한 건 블루벨스라는 중창단이었다. 블루가 청, 벨은 종이니까 청종(靑鐘)으로 바꿔버리는 기막힌 현상까지 일어났다. 그런데 이런 걸 식민 사관 극복이라고 봐야 하는 것인가?

하여튼 이전과 달리 1970년대에는 우리 역사를 나쁘게 보는 아니라 오히려 좋게 보는, 그걸 과장해서까지 얘기하는 면이 일반화돼가는 분위기였다. 유신 체제에서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하면 그런 것들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한국사 연구의 흐름을 바꾼 새로운 바람


프레시안 : 이 시기 역사학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지 않았나.

서중석 : 소설가 이병주 글에 나오는 것처럼 박 대통령은 이전에는 독립 운동도 그렇게 무시하고 파벌 싸움으로 비하했지만, 이제는 독립 운동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면서 독립 운동에 관한 상당한 연구가 오히려 1970년대부터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연구된 건 아니었고 본격적인 연구는 역시 1987년 6월항쟁 이후 이뤄지는 것이지만, 1970년대에 독립 운동이 강조되기는 했다.

이 시기에 신채호의 민족 사관이 아주 강조됐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그렇게 된다. 한국사학계에서는 1950년대 후반경부터 점차 식민 사관 극복 얘기가 홍이섭 교수를 중심으로 제기되는데, 4월혁명의 민족주의 강풍을 맞으면서 홍이섭, 이기백, 김용섭 이런 분들을 주축으로 해서 민족 사학이 점점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그러면서 식민 사관 철저 극복, 이게 1960년대 후반 한국사학계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됐다. 1970년대에는 최대 과제가 식민 사관 극복이었다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같은 데에서 강조한 것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신채호가 그렇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1970년대 역사학 쪽에서 관학을 대표한 인물이자 유신 체제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그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고 유신 체제 정신문화를 관장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대 원장을 지낸 이선근도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 사람은 원래 대원군 시대라든가 19세기 중후반을 연구할 때에는 식민 사학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1970년대에 와서는 후배 사학자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런 사람이 더 앞장서서 '식민 사관을 극복하자'고 얘기하는 걸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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