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쏜 김재규는 배신자인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86> 유신의 몰락, 열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프레시안 : 김재규는 10·26이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거사 후 김재규가 한 행동을 보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를 체계적으로 취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부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김재규의 거사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눠서 분석해보자. 우선 김재규는 정말 혁명 거사를 하려고 했느냐. 법정에서 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혁명위원회를 군 지휘관으로 구성하는 방안에 대해, 그러니까 자신이 위원장이 되고 육군 참모총장이 부위원장을 맡는 혁명위원회와 혁명 평의회를 구성하려 했다고 법정에서 얘기했다.

그러나 정말 김재규가 거기까지 생각했을까. 그 점은 김재규가 좀 과장해서 얘기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재규는 '내 거사로 전국적인 계엄이 실시되면 군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로 한국이 나아가지 않겠는가. 그러면 나도 살아남을 수 있고 민주주의 의인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다', 이런 정도를 이 거사에서 생각하지 않았을까. 난 그렇게 판단한다.

김재규가 옥중에서 쓴 시의 한 부분을 보면 "자유민주주의 회복되었네/ 나의 사랑하는 3700만 동포에게 자유를 찾아 돌려주었네", 이렇게 돼 있다. 거사를 통해 민주주의 의인으로 남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 당시 군의 최고 지휘관들이 대개 김재규와 가까운 사이였다. 비서실장인 김계원도 가까운 사이로 자신이 천거했고, 정승화를 육군 참모총장에 천거한 것도 김재규였다. 그뿐 아니라 3군 사령관이 중요한데 3군 사령관 이건영도 김재규가 추천했을 뿐만 아니라, 김재규 밑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김재규의 안동농림학교 후배로 아주 가까운 관계였다.

이렇게 김재규는 군 수뇌부와 가까운 관계였고,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도 그렇게 갈등 관계에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적인 계엄이 발동되고 군이 권력을 장악하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정도로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재규를 중심으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의 상황이 그 당시에 있을 수 있었겠나.

▲ 10·26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중앙청 앞에 주둔한 계엄군 탱크. ⓒ연합뉴스


'총애 다툼'에서 밀려 욱해서 쐈다? 성립하기 어려운 이야기

프레시안 : 김재규가 왜 박정희에게 총을 쏘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유신 정권 인사들 또는 박정희 추종 세력들 중에는 이른바 '총애 다툼'에서 차지철에게 밀린 배신자 김재규가 시쳇말로 욱하는 심정으로 주군 박정희를 저격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꽤 있다. 대통령을 주군으로 여기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 어울리는 인식이 아니고 배신자라는 규정 역시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김재규 묘비가 훼손되는 일이 일어난 것도 그런 인식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외무부 장관을 했던 이동원 책에도 그런 얘기가 나온다. 뭐냐 하면 욱하는 성격이 김재규한테 있었는데 차지철에 대해 욱하는 심정이 작용해서, 그건 박정희에 대해 욱하는 심정일 수도 있겠지만, 김재규가 거사를 했다고 주장하는 글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특히 당시 여권에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김재규가 욱해서 거사를 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일 아니었나.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관계자들, 즉 박선호, 박흥주 같은 사람들의 목숨까지 걸려 있는 문제였는데 그럴 수 있었겠나.

일부에서는 중앙정보부장직에서도 밀려나게 되고 하니까 거사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지만,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 대회 후 김재규는 박정희한테 사의를 표명한 바 있다. 김재규 자신이 건강 문제 때문에도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를 한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차지철과 빚은 마찰 때문에 중앙정보부장을 그만둘 처지가 돼 욱하는 심정으로 거사했다?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그것 때문에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나게 됐다고 하면, 오히려 이제는 차지철과 만날 일도 없게 되고 홀가분한 상태가 되는 것 아니었나.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다.

김재규가 차지철이나 박정희에게 강한 불만을 가졌던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건 박정희가 차지철의 월권, 횡포, 권력 남용을 비호했을 뿐만 아니라 차지철이 중앙정보부가 하는 일에 깊이 개입하는 것을 두둔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마항쟁 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박정희가 '유혈 사태도 불사하겠다. 내가 직접 총을 쏘라고 지시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보면서 '한국을 정말 국가적인 위기로 몰아넣는 것 아니냐. 이러다가 대규모 유혈 사태를 포함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이런 것을 김재규가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걱정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한 그걸 욱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또 몰라도, 그냥 개인적인 감정으로 욱해서 나왔다? 그런 말이 과연 성립할 수 있겠는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부터 민주 회복 염원한 의사였다?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이유

프레시안 : 욱해서 쐈다는 주장과 정반대로, 김재규가 투철한 민주주의 의식을 갖고 있었고 10·26 거사를 하기 훨씬 전부터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한 의사(義士)였다는 주장도 있다. 김재규를 단순한 배신자 또는 별다른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건을 일으킨 사람으로 보면 안 된다는 주장인데, 생각해볼 지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김재규의 행적에 비춰볼 때 과한 설정 아닌가 싶다.

서중석 : 김재규 거사와 관련해 제일 논란이 많이 되는 게, 천주교의 일부 신부들이 김재규의 10·26 거사를 위대한 의인의 거사로 평가하고 김재규가 오로지 민주주의를 위해 거사했다고 강조하면서 기념사업을 오랫동안 해온 그 부분이다. 그런데 오로지 민주주의를 위해 거사했다고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점과 관련해 먼저 김재규가 일찍부터, 몇 차례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한 것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김재규는 1972년 3군단장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이 부대를 방문할 때 사령부 안에 연금해 하야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고 얘기했다. 또 건설부 장관으로 발령받은 1974년 9월 14일에 권총을 휴대하고 사령장을 받으러 들어갔다고 법정에서 얘기했다. 1975년 대통령이 연두 순시를 왔을 때 태극기 밑에 권총을 숨겼다는 얘기도 했다. 자신과 대통령이 동시에 없어지는 것으로 하려 했다는 얘기다. 1979년 4월에도 거사를 하려고 대통령이 오기에 앞서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다 궁정동에 불렀지만, 그날 여건이 좋지 않아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과연 그 시기에 김재규가 정말 박정희를 제거하려고 했을까? 그렇게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김재규가 법정에서 얘기한 걸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렵다고 본다.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위해 거사했다는 것에 조소를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얘기할 때 그런 것의 이유로 나오는 것이 '중앙정보부장을 할 때 나쁜 짓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 이런 얘기다. 그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중앙정보부장을 할 때 YH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 강제 해산 사건을 포함해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박정희도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요직 중의 요직에 장기간 앉혀놓은 것 아니겠나. 그전인 1971년 대선 기간에, 이때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이었는데, 서승 형제가 휘말린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같은 걸 만들어낸 것도 그런 비판의 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와 함께 생각해볼 문제도 있다. 김재규한테는 차지철뿐만 아니라 여권의 다른 중요한 인사들, 예컨대 대통령의 측근 또는 한때 제2인자라는 말을 들었던 김종필 같은 사람과는 분명히 차이가 나는 점도 있었다는 것이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다른 측근들과는 달랐던 점

▲ 김재규(1979년 궁정동 현장 검증 당시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달랐다고 보나.

서중석 : 김재규는 대통령에게 충직하긴 했지만 무조건 충성만 바친 건 아니었다. 잘잘못을 따지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부마항쟁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면이 있었다. 그건 김영삼 제명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김재규의 그런 자세를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한 면도 보인다.

1964년 6·3사태 당시 6사단장으로서 계엄군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왔을 때 김재규는 김종필 외유를 건의했다. 그때 김종필은 강직한 군인들의 눈에 불의, 부패 권력의 상징으로 보인 면이 있었다. 그것이 그러한 건의로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이설(異說), 즉 다른 쪽에서 김종필을 몰아세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김재규 스스로 이 부분과 관련해 김종필 외유를 자신이 건의했다고 얘기했다.

또 공화당 총재와 의장을 지낸 공화당 원로 정구영의 회고록이나 정구영 못지않게,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3선 개헌을 반대했던 양순직의 회고록을 읽어봐도 김재규한테는 박정희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는 좀 차이가 나는 점이 있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회고록들을 보면 분명히 김재규가 '3선 개헌 반대에 동의하지만, 국회를 통해 3선 개헌이 이뤄지지 않으면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언할 수 있다. 그러면 국가적 위기로 갈 수 있으니 당신들이 지지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의미로 설득한 것을 알 수 있다. 정구영도, 양순직도 김재규에 대해서는 좋게 얘기했다. 당시 3선 개헌을 지지해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김재규에 대한 인상을 아주 좋게 썼다.

김영삼 제명 직전 김영삼을 만났을 때 얘기한 것들을 보더라도 김재규는 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신민당 전당 대회 전날인 1979년 5월 29일 밤 김대중을 연금하지 않고 외출하게 한 것, 그건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다른 것으로는 해석이 안 된다. 물론 박정희나 차지철이 5·30 전당 대회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크게 봐서는 김재규가 김영삼에게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이나 이른바 '부마 사태'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박정희 대통령한테 얘기한 것, 그리고 10·26 그날 주고받은 대화 같은 걸 보면 김재규는 당시 여권에 있던 다른 사람과는 분명히 달랐다. 물론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싸운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점은 중요하게 봐야 하지 않겠나. 난 그렇게 본다.

김재규 거사에 미국이 관여? 그걸 입증할 자료는 없다

프레시안 : 김재규 배후에 미국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원만하지 않았던 한미 관계 등이 정황 증거로 제시되는 이러한 주장, 근거가 충분한 것인가.

서중석 : 미국이 사주해서 김재규가 거사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그 당시에 많이 돌았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나왔다. 10·26 때 문공부 장관이었던 김성진은 '지미 카터 방한 때 카터가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겠다고 얘기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는데 그걸 김재규가 듣지 못했겠느냐. 정말 미국 정보 기관이 김재규를 시켜 살해해버린 것일까?', 이런 식으로 글을 썼다. 이런 것과 비슷한 얘기, 그러니까 10·26 거사는 어떤 형태로든 미국과 관계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얘기는 꽤 있다.

김재규는 한미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매우 우려했다. 당시 이 점을 우려한 건 김재규만이 아니겠지만, 하여튼 김재규는 법정에서도 이렇게 얘기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독재를 함으로써 건국 이후 가장 한미 간 관계가 나쁩니다. 그래서 내가 볼 때에는 미국이 영원히 한국을 버리지 않겠지만 유신 체제가 없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정책적으로 한국을 버릴 가능성은 다분히 있습니다. 그럴 경우 6·25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건 미국이 사주해서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거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한미 관계라는 얘기는 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김재규를 좋게 봤다고 그런다. 1980년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 정무 참사였던 윌리엄 클락이 인터뷰한 걸 보면, 미국 측은 김재규를 특이한 중앙정보부장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뭐냐 하면, 박정희 정권 보위의 첨병인 중앙정보부장이면서도 미국 측의 말을 잘 알아듣고 민주주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면서 관심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다른 중앙정보부장과는 뭔가 다른, 특이한 부장이라고 봤다는 것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 측이 워싱턴에 보낸 문서에 미국 측의 요구를 잘 이해하는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한테 미국의 요구를 전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얘기가 많이 나오는 건데, 10·26 발발 한 달 전쯤에는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김재규를 만난 자리에서 평화적 정권 이양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평화적 정권 이양이라는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 말을 김재규가 과대 해석한 것 아니냐, 일각에서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프레시안 : 김재규가 그 말을 정말 과대 해석해서 '박정희를 제거하라'고 미국이 암시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서중석 : 그 부분은 현재로서는 해석하기가 어렵다. 분명한 건 김재규가 법정에서 명시적으로 미국 측이 자신의 거사를 지지할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거사는 미국하고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주 강조했다. 김재규 재판관이었던 한 군인이 신문하는 과정에서 김재규가 '글라이스틴이 유신 체제 전복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고 했다는 건데, 그렇지만 글라이스틴은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이것 역시 앞에서 말한 평화적 정권 이양이라는 그 부분을 김재규가 어떻게 받아들였을 것인가 하는 점과 관련된 문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배후엔 미국이 있다'고 김재규가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김재규가 그렇게 얘기했다고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글라이스틴은 이런 얘기를 했다. 미국, 이건 특히 카터 정권을 가리키는 것일 텐데, 미국은 자신들의 행동과 말이 부지불식간에 박 대통령의 몰락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주 애매한 얘기다. 말하자면 미국이, 특히 카터 대통령이 박정희 정권에 대해 아주 강하게 불만을 품고 비판하고 여러 가지 요구를 한 것이 김재규로 하여금 '저건 박정희를 제거하라는 얘기가 아니겠느냐', 이렇게 해석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한 것이다.

김재규는 미국이, 어떤 자료에는 글라이스틴한테 물어봤다고도 나오는데, 한국 경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김재규는 한국 경제가 1978년 말부터 급속히 악화된 것을 크게 우려했다. 그러면서 1978년 12·12선거 후 경제팀을 갈아 치워야 한다고 대통령한테 보고서를 올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글라이스틴도 "1979년 들어 경제 성장은 주춤했고 국민들은 수입 원자재 가격 폭등과 정부 투자 정책의 잘못으로 인한 물가고에 시달렸다. 노동자들은 동요했고 국민들은 악화되는 경제적 현실에 불안해했다", 이렇게 썼다. 이 부분에 대해 김재규한테도 비슷하게 얘기했던 것 아닌가 싶은데, 이걸 과연 미국의 사주라고 볼 수 있는 건가. 앞에서 말한 대로 한미 관계에서 미국 측이 박정희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처럼 이건 한국 경제에 대해 미국 측에서 우려하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볼 때 김재규 거사에 미국이 관여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걸 입증할 자료가 없기도 하다는 점에서 과대한 평가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인다.

김재규는 1979년 4월에 거사를 하려고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궁정동으로 불렀다고 말했는데, 1979년 신형식 공화당 사무총장은 박 대통령에 대한 김재규의 태도가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로 불측하고 불손한 것이 아니냐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10·26사건을 접했을 때 그러한 김재규의 불손했던 태도가 퍼뜩 떠올랐다고 한다. 육사 동기생인 손모 장군도 같은 시기에 김재규를 만났을 때 김재규가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김재규가 분명히 197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이러면 안 된다'는 강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는 보인다.

10·26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프레시안 : 10·26으로 박정희 정권은 몰락하지만, 10·26 후에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는 지속된다.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는 그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정희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 구조적, 제도적 청산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와 관련, 박정희 정권이 10·26이라는 형태로 무너진 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첫 번째, 부마항쟁을 계기로 전국에 저항이 확산되고 그걸 통해 박정희 체제를 정면으로 극복할 계기를 열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10·26으로 그 가능성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아닐까. 실제로 부마항쟁 종료 후 대구로 시위가 북상할 조짐이 나타났지만, 10·26을 계기로 분위기는 바뀌었다.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오랫동안 계속된 것도 이러한 점과 뗄 수 없는 것 아닐까.

두 번째, 이것과 반대 측면에서 보면 시위 확산에는 한계가 분명했으며, 설령 크게 확산됐다고 하더라도 박정희("내가 직접 발포 명령")·차지철("100만~200만 명쯤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의 특성상 엄청난 인명 피해를 피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예상할 근거는 충분치 않은 상황 아니었을까.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면 10·26 거사로 유신 정권을 일단 무너뜨린 점은 충분히 평가할 만한 것 아닐까.

세 번째, 희생 측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박정희 사후인 1980년 5월 광주의 희생을 치러야 했던 점, 그리고 박정희가 죽은 지 8년이나 지난 1987년에야 6월항쟁이라는 거대한 대중 투쟁을 통해 군부 강경파를 비롯해 유신 체제를 떠받친 세력을 몇 걸음 물러서게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닐까. 즉 희생 부분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박정희 체제를 떠받친 세력을 몇 걸음이라도 물러서게 만든 핵심은 대중 투쟁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1979년에 유예된 희생 및 투쟁이 1980년과 1987년에 나뉘어 일어나게 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10·26의 의미를 다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서중석 : 유신 체제에서 여권에 있었던 사람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10·26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일각에 있다. 그중 하나는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 운동 세력에 의해 무너졌어야 민주 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유신 말기나 서울의 봄이라고 하는 1980년 5월의 학생들 시위 같은 걸 보면 상당히 규모가 커지고 그러지 않았나.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더 큰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것이고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 운동 세력에 의해 무너졌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10·26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그런 점에서 김재규의 거사는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이다.

그와 다른 입장에서 김재규 거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이건 박정희 신드롬과 관련돼 있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가면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게 생기고, 특히 1997년 IMF 사태 이후에 극성을 부리면서 얼마 전까지 그런 현상이 있지 않았나. '박정희야말로 위대한 경제 대통령이었다'면서 박정희만 환생하면 마치 한국 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처럼 얘기하는 분위기가 한때 있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것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대통령을 갈망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명박에 대해 그렇게 많은 문제점이 제기됐는데도 지지자들, 성장 제일주의자들은 그걸 문제 삼지 않은 건 그런 것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김재규 거사를 비판하는 다른 견해가 뭐냐 하면 김재규가 10·26 거사를 조기에, 너무 일찍 함으로써 박정희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큰 실책을 저질렀는가를 국민이 똑똑히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1980년 경제까지도 이어지는 그 나쁜 경제, -5.2퍼센트 성장률을 보인 그러한 나쁜 경제까지 국민들이 보고 박정희가 민주화 운동 세력에 의해 무너지는 걸 봤더라면 박정희 신드롬이 과연 생겼겠느냐, 이것이다. 그와 함께 박정희 신드롬과 연관돼 그 이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현상,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를 저해하는 암적 요인 같은 것들이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런 지적이 있다.

유신 체제에서 여권에 속했던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10·26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큰 틀에서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나는 전자의 주장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본다. 후자의 경우 그렇게 볼 수 있는 점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재규의 10·26 거사는 그것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민주화 운동 세력, 유신 정권 무너뜨릴 역량 갖추고 있었나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우선 김재규가 우려한 대로 심각한 유혈 사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에 이승만 몰락을 다룰 때 박정희와 이승만은 어떻게 다른가를 내가 예를 들어서 설명한 바가 있지 않나. 1960년 4월혁명 때보다 더 큰 규모의 항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박정희는 유혈 사태를 두려워하지 않고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 유신 체제를 수호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 식의 군인 정신이 아주 강한 박정희 성격을 고려할 때 정말 심각한 유혈 사태가 날 가능성이 높았다.

경상도 지역인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공수 부대를 바로 보내지 않았나. 그런 일이 만일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을 경우 어땠겠나. 공수 부대 같은 것을 그보다 더 빨리 투입해 더 심하게 진압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 않았겠나. 더군다나 차지철이 있지 않았나. 이승만 때에는 차지철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심각한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건 막아야 했고, 그 점에서 김재규의 거사는 의미가 있다고 파악한다.

또 부마항쟁에서 잘 나타난 것처럼 유신 장기 독재에 대한 반발이 아주 컸을 뿐만 아니라 빈부 격차에 대한 불만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저임금 노동자, 종업원, 실업자 같은 도시의 소외 계층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감정이 악화돼 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부마항쟁처럼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경찰서, 공화당사, 언론 기관 등을 공격해 방화, 파괴하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렇지만 그걸 민주화 운동 세력이 바로 집권할 수 있는 상황과 동일시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런 것하고는 거리가 있다. 부마항쟁은 우리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사건이자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런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역량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78년 '통대'에 의한 체육관 대통령 선출 과정에서 민주화 운동 세력이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역량을 보여준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1979년에 와서는 부마항쟁을 빼면 큰 시위가 없었다. 여러 가지 유인물을 돌리는 것이라든가 조그마한 시위 같은 것이 여러 대학에서 나타난 정도였다. 그리고 해직교수협의회, 민주통일국민연합 같은 재야 단체들이 활발하게 반유신 투쟁을 한 건 맞다. 그렇지만 1979년의 경우 부마항쟁을 제외하면 1978년에 비해 투쟁력이 약화됐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를 놓고 볼 때 민주화 운동 세력이 이 시기에 그렇게 강했는가, 대세를 장악할 만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난 좀 다르게 생각한다. 그리고 1980년 봄에 서울역에서 10만 명의 시위대가 회군한 것에 대해 '아주 큰 잘못이다. 서울역의 10만 학생이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전두환 세력과 싸웠어야 한다', 이렇게 얘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 부분도 찬찬히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80년 봄 학생들의 움직임이 상당히 중요했고 큰 움직임이었던 건 틀림없다. 그렇지만 민주화 주도 세력이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한다고 얘기할 정도의 역량을 그 시기에 보여줬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난 좀 부정적으로 본다. 10·26의 큰 의미는 그것과는 다른 쪽에서 찾아야 한다.

잘잘못을 판단하고 반성하는 세력의 중요성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극우 세력 내에서도, 심지어 파시즘 내에서도 김재규처럼 온건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 또는 세력, 즉 자신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고 그러면서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사람 또는 세력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난 그렇게 본다. 여기서 잘잘못을 판단한다고 한 것은 '이건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긴 한데 할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런 판단을 포함하는 것이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그렇게 강력하지 못할 때에는 이런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같이 움직여야만 민주화 운동 세력도 클 수 있고 사회 전체도 합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의 평화적 이행이라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되도록 유혈 사태는 피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도 이런 합리적이고 온건한 사람들이 극우 권력의 내부에서 자유화, 민주화로 나아가는 물꼬를 터주는 게 중요하다.

단 김재규의 거사는 일단은 실패로 끝났다. 그건 박정희가 키워줬던 그리고 1961년 5·16쿠데타가 날 때부터 정치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던 육사 11기생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가 정국을 반전시키고 유신 체제를 변형해 계승하는 식으로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서 김재규 거사가 빛을 보기는 어려운 점은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재규 같은 사람, 그런 세력은 중요하고 자유화, 민주화로 나아가는 물꼬를 극우 세력 내부에서 터주려 한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는 건 평가해줘야 한다.

그리고 김재규가 그처럼 거사를 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부마항쟁이라는 점도 잘 기억해야 한다. YH사건, 부마항쟁, 10·26은 서울의 봄을 갖게 했다. 그 점도 인정해야 한다. 어쨌든 서울의 봄이 왔을 때 극우들조차 민주화 흐름을 부정하지 못했다. 당시 나도 보고 겪었는데 그 사람들조차 '이제 민주화는 대세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일반 대중들도 당연히 그렇게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이 유신 잔당에 의해 반전되긴 했지만, 1980년 광주항쟁에 의해 민주화 운동이 새로운, 커다란 이정표를 갖게 되지 않나. 그러면서 1980년대에 민주화, 자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또 민주화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기대가 1985년 2·12총선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 두 가지가 결합돼서 1987년 6월항쟁이라는,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흐름이 나타나는 것 아니냐고 난 본다.

10·26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 덧붙이면, 한국 근현대사에 큰 사건으로 기록된 10·26은 1979년의 그것 하나만이 아니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지 않았나. 그날도 10월 2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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