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왜 총을 맞아야 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유신의 몰락, 열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유신 체제는 왜 불과 7년 만에 무너졌나

프레시안 : 지난 1년간 유신 쿠데타부터 10·26에 이르기까지 유신 체제의 전 과정을 다각도로 살폈다. 12·12쿠데타와 1980년대로 넘어가기 전에 유신 체제를 종합 정리했으면 한다.

서중석 : 유신 체제는 왜 불과 7년 만에 붕괴했느냐, 그 부분을 살펴보자. 유신 시기에 박정희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민주 세력은 유신 체제가 아주 장기간에 걸쳐 존속할까봐 굉장히 두려워했다. 그랬던 유신 체제가 7년밖에 못 갔다. 그건 유신 체제와 비슷한 정치 체제로 얘기되는 장개석(장제스)의 대만이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스페인과도 굉장히 차이가 난다.

박정희를 장개석, 프랑코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장개석은 대만에서 총통제를 통해 박정희처럼 철권통치를 했다. 그 아들 장경국(장징궈)도 막강한 총통제로 권력을 유지했다. 야당인 민주진보당이 1986년에 창당됐고, 장경국이 계엄령을 해제한 건 계엄 선포 38년 만인 1987년이었다. 그러니까 대만에 총통제가 들어선 후 거의 40년 동안 장개석 부자가 대만식 총통제로 권력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코는 1975년에 죽을 때까지 36년간 집권했다. 나이로 보더라도 장개석은 88세, 프랑코는 8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와 달리 박정희는 장개석이 대만식 총통제를 시작하기 직전의 나이인 62세, 한창이라면 한창 나이라고 볼 수도 있는 나이에 살해되고 말았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하의 총에 맞았다.

왜 이런 큰 차이가 생겼을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다른 결과를 초래한 요인이 여러 가지 있었다. 유신 시대에는 그걸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레시안 : 어떠한 요인이 있었나.

서중석 : 유신 체제를 단명하게 만든 직접적인 요인으로 우선 1인 장기 독재의 폐해가 유신 말기에 너무나 심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경제 악화도 매우 심해서 그것 때문에도 민심 이반이 커졌다. 특히 유신 체제에서는 재벌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켰는데 그러면서 빈부 격차가 너무나 커졌다.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극심한 소외 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은 사회적으로 못사는 서민들이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들 불만과 극심한 소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러한 세 가지 요인이 1978년 12·12선거에서 공화당이 패하게 만들었고 1979년에 YH사건과 부마항쟁이 일어나게 했다. 그러면서 결국 유신 체제는 붕괴한다.

여기에 더해 유신 말기로 갈수록 박정희의 분별력, 판단력에 이상이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의 정신 상태가 그러한 가운데 차지철이 너무 심하게 횡포를 부리면서 권력 내부의 문제도 커졌다. 그러면서 김재규뿐만 아니라 군부, 공화당 같은 권력 내부의 다른 쪽에서도 '이거 이렇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위기감을 느낄 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게 직접적인 요인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여러 요인뿐만 아니라 구조적 요인도 전반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유신 독재는 장제스·프랑코 독재와 성립 과정부터 달랐다

▲ 1979년 11월 3일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 영결식에서 최규하 총리가 영전에 헌화, 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구조적 요인으로 어떤 것을 꼽을 수 있나.

서중석 : 1963년, 1967년, 1971년 선거가 말해주듯이 박정희는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적이 없었다. 1963년과 1971년 선거 때 서울에서 나온 득표 상황 같은 걸 보면 박정희가 상대 후보에 비해 표를 너무나 적게 얻은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유신 쿠데타를 일으킬 무렵 아무런 국가적 위기도 없었다. 정치적으로건 사회적으로건 경제적으로건 남북 관계에서건 국가적 위기가 없었는데, 오로지 자기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박정희 유신 체제를 단명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신 체제는 박정희의 강렬한 권력욕 외에는 정당화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도 대만, 스페인과 달랐다.

예컨대 대만만 보더라도 대륙에서 정권을 뺏기고 대만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다. 적어도 장개석과 군인들, 그리고 대만으로 함께 이주해온 사람들로서는 굉장한 위기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을 바탕으로 대만식 총통제가 성립한 것이다.


프랑코 체제 성립 과정도 박정희가 유신 체제를 만든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930년대에 스페인에서 권력이 프랑코한테 집중된 데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1933년에 결성된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당이 프랑코 반란(1936년) 이전부터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국가사회주의적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한국과 달리 스페인에서는 그러한 파시스트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장교들도 국가 통합과 공공질서 유지 문제에서는 프랑코보다 오히려 더 강경파였다고 할까, 아주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장교들은 인민전선 내각에 대한 자신들의 반란이 국가를 구원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도 모든 권력을 프랑코한테 집중시키는 데 동의했다.

교회도 큰 역할을 했다. 스페인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더라도 그렇고, 프랑코 쪽으로 민심을 수습하는 데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회는 인민전선 내각 출범 후 많은 권한을 뺏긴 것도 작용하고 해서 프랑코 쪽에 힘을 실어줬다. 물론 나중에는 달라지지만, 적어도 처음에 성립할 때에는 프랑코 정권을 지지하도록 교회가 분위기를 몰아갔다. 왕을 지지한 세력들도 마찬가지로 프랑코 정권을 지지했다.

정리하면, 박정희는 평지풍파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뿐 아니라 유신 헌법조차 박정희 한 사람만을 위한 헌법이라는 점이 뚜렷했다. 거듭 말하지만 유신 쿠데타도, 유신 헌법도 사회적, 경제적 또는 남북 관계상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나타난 게 전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도 박정희 1인 체제는 오래 견디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 운동이 진행되는 속에서 프랑코가 전면에 등장하고 총통제가 나타나지만, 한국엔 그에 비견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도, 1972년 이후락이 비밀리에 북한에 다녀온 다음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극소수가 김종필마저 배제한 채 밀실에서 유신 헌법을 만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보편성, 설득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성립 과정을 보더라도 유신 체제는 장개석의 대만이나 프랑코의 스페인과는 크게 달랐다는 점을 먼저 얘기할 필요가 있다.

유신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든 한국인들의 민주주의 경험

프레시안 : 해방 후 유신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27년에 걸친 정치적 경험도 작용하지 않았나. 부정 선거 문제가 심심찮게 불거지긴 했지만 선거도 여러 차례 치렀고, 1960년 4월혁명으로 독재자 이승만을 끌어내린 것도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요소 아니었나.

서중석 : 유신 체제에서 최대의 균열 요소는 민주주의 경험을 한 이후에 이런 극단적인 권력 체제를 갖게 됐다는 점이다. 1948년 헌법이 만들어진 이후 1972년까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민주공화국으로서 기본적 성격을 대체로 갖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유신 체제가 뒤늦게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민주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한국은 파시즘 운동 없는 파시즘 체제를 유신 체제로서 갖게 됐는데, 바로 이 민주주의 경험 때문에 유신 체제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기막힌 이름까지도 박정희 유신 정권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건 언젠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는 움직임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요소였다. 그래서 유신 체제에서도 최소한도의 것은 놔둬야 한다고 봤기 때문에 야당의 존재를 인정했던 것이다. 선거의 경우에도 국회의원 선거는 부분적으로 실시하지 않았나.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하긴 했지만 국회의원 선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아무리 제한적인 선거이고 유신 쿠데타 후 처음 치러진 1973년 선거에서는 야당 출마자도 중앙정보부의 스크린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만, 야당이 항상 '사쿠라당', 유신 체제에 야합하는 당이 될 수는 없었다. 야당 속성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제한적인 선거라 하더라도 민심이 반영된 선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유신 체제는 큰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파시즘 동조자 또는 '한국에선 독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유신 체제는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도전을 받게 돼 있었다.

학생이건 정치인이건 사회 양심 세력이건 유신 체제에 도전하는 세력이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다면, 유신 체제를 확실히 떠받쳐줄 수 있는 강력한 정치 조직 또는 기구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사실은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박정희의 허수아비가 된 '통대'와 공화당·유정회

프레시안 :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어떠했나. 공식적으로는 유신 체제에서 중요한 위상이 부여된 곳 아니었나. 그리고 유정회나 공화당도 있지 않았나.

서중석 : 유신 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권적 수임 기관이라고 규정해 민주공화국의 주권재민 원칙을 크게 손상시켰다. 그러면 이 '통대'는 최소한의 대표성이라도 가졌느냐.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인구 비례에 의해 '통대'를 뽑았느냐 하면 그것조차 아니었다. 당시에도 서울 인구가 제일 많았는데 서울의 경우 67개 선거구에서 303명의 대의원을 뽑았다. 그런데 그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경북은 선거구도 268개나 되고 대의원도 354명으로 서울보다 훨씬 많았다. 전남은 그보다 인구가 더 적은데도 242개 선거구에서 312명을 뽑도록 돼 있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도시일수록 혹시나 그중에 중앙정보부 감시망을 벗어나서 좀 괜찮은 대의원이 나오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되도록 지역 선거구를 쪼개서 감시하기 좋도록 한 다음에 거기서 대의원을 대부분 뽑도록 한 것이다.

그런 것보다 더 결정적인 게 있다. 뭐냐 하면 '통대'에 엄청난 위상을 부여하지 않았나. 대통령도 뽑고 헌법도 고치고 남북 관계, 통일 정책과 같은 중요 정책에 대해서도 국민 총의를 대변하는 기구다, 딱 그렇게 해놓았다. 거기다가 국회의원의 3분의 1도 뽑지 않았나. 물론 대통령이 지명한 사람들을 유정회 의원으로 선출해주는 것이긴 했지만. 하여튼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지만, 그리고 주권적 수임 기관이라고 헌법에 딱 해놓았지만 실제로 '통대'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저 대의원은 그저 명망 때문에 나와서 된 사람이다', 누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했지 '저 대의원이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박정희는 '통대'에 겉으로는 막강한 권한을 줬지만 실제로는 '통대'를 아무런 힘도 없고 그저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신만이 모든 것을 통치해야 능률적이고 좋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은 '통대'가 현실에서는 유신 체제를 떠받칠 힘이 있는 기구로 전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공산당이라든가 대만의 국민당 같은 당하고도 달랐다. 힘이 없었다, 이 말이다.

그러면 공화당, 유정회는 힘이 있었느냐. 공화당은 1971년 10·2 항명 파동을 계기로 박정희 친정 체제로 가게 되는데, 유신 체제에서 그것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 대통령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 되다시피 한다. 유정회 의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공화당, 유정회가 법 같은 걸 통과시키고 한 건 틀림없다. 그렇지만 친정 체제에서 공화당, 유정회는 그 자체로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또는 국민들의 지지를 요구할 수 있는 기구가 되지 못했다. 국민들이 보기에 이건 거수기였다. 날치기 통과나 하는 곳으로 비쳤다, 이 말이다. 그리고 박정희 유신 독재의 폭압적 통치를 찬양하고, 선명 야당을 주장하는 김영삼 같은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역할이나 하는 곳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명령을 집행하는 기구에 지나지 않지 저게 무슨 당이냐, 이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화당이나 유정회는 스스로 국민한테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로서도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1978년 12·12선거 후 '공화당은 스스로 뭘 해보려는 게 없었다. 그래서 표가 그렇게 적었다', 이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나. 아주 당연하게도 그런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와 더불어 2인자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종필은 왜 가택 수색을 3번이나 당해야 했나

프레시안 : 2인자 문제는 유신의 몰락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나.

서중석 : 체제를 떠받치는 데 있어서 2인자가 있는 게 좋은가 나쁜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1960년대 공화당에는 김종필이 있었다. 김종필이 힘을 잃은 3선 개헌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4인 체제라고 해서 김성곤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2인자들이 언제 자기 자리를 노릴지 모른다는 생각도 한 것 같다. 김종필을 심하게 견제한 것도 그 때문 아니겠나. 김종필이 누구인가. 5·16쿠데타를 성사시키고, 5·16쿠데타 정권을 유지하고 공화당을 만들어내는 등 모든 데에서 그야말로 박정희보다 김종필이 더 많은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아닌가. 더욱이 박정희의 조카사위 아니었나.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가택 수색을 3번이나 당할 정도였다. 항상 감시 대상이었다. 그리고 김성곤은 10·2 항명 파동으로 참혹하게 고문을 당했고, 그 후 몇 년 못 살고 죽지 않나.

결국 모든 걸 박정희 혼자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2인자도 없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니까 밑에서 해야 할 일, 밑에서 처리해도 되는 일까지 다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2인자가 처리할 수 있는 일들까지 전부 그렇게 된 것이다. 욕먹는 것에서도 그랬다. 2인자를 둘 경우 그 2인자가 욕을 많이 먹게 하는 식으로 처리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욕먹을 2인자가 없으면 최고 권력자한테 욕이 갈 수밖에 없다.

한국이나 중국 같은 데서는 옛날부터 '황제, 왕은 잘못이 없는데 아첨하는 못된 신하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이런 얘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도 이승만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게 아니라 이기붕 잘못이라고 하는 게 어떤 때에는 더 심했다. 1958년부터는 이기붕이 2인자 역할을 실질적으로 하지 않았나. 어쨌든 이기붕이 다 욕을 얻어먹으니까 이승만은 그만큼 유리한 입지를 가질 수 있었던 건데, 유신 체제에서는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더군다나 말년에 가서는 측근이라는 것도 차지철을 빼놓고는 사실상 남지 않았다. 예컨대 이후락, 김형욱, 신직수, 박종규도 그렇고, 김재규도 사실은 차지철과 함께 측근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다 소외되고 만다. 차지철만이 박정희와 일체가 돼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대법원장, 국회의장, 국무총리처럼 국민들이 항상 쳐다보는 높은 자리에도 기회주의자 또는 아부하는 자 또는 대통령 눈치를 봐가면서 자기 몸만 사리는 사람들을 앉혔다는 인상을 강하게 줬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와 차지철을 빼놓고는 어느 누구도 유신 체제를 꼭 지켜야겠다는 강한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가 어렵다. 최규하가 10·26 직후 보여준 것처럼 전혀 그런 게 있었다고 볼 수가 없다. 상태가 이랬기 때문에 고언, 충언, 직언을 박정희한테 할 수 없었다. 박정희가 그걸 용납하지도 않았다. 그러면 그 체제는 죽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유신 체제는 유지되기가 쉽지 않았다.


▲ 박정희와 김종필(1973년 9월 22일). 박정희는 조카사위 김종필을 심하게 견제했다. 김종필이 3번이나 가택 수색을 당할 정도였다. ⓒ연합뉴스

조작, 세뇌, 공포, 거짓말, 긴급 조치…박정희 정치의 실체

프레시안 : 정당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박정희는 어떤 선택을 했나.

서중석 : 박정희는 유신 체제에서 '통대'건 유정회건 공화당이건 2인자건 측근이건, 사실상 일심동체가 된 차지철을 빼놓고는 어떤 쪽에도 힘을 안 실어주고 자신한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 그 대신 국민 또는 비판 세력에 대해서는 혹독한 탄압, 공포 정치, 병영 국가화를 통해 감시하고, 저항하지 못하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교육헌장, 충효 사상 같은 복고주의적인 국가주의로 세뇌를 시켜 복종하게 했다. 또한 TV 같은 미디어라든가 교육 등 여러 수단을 활용한 상징 조작 또는 대형 정치적 사건 조작 등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면서 중요 사건을 조작하는 데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걸 볼 수 있다.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사건만 보더라도 긴급 조치 4호를 발동한 바로 그날(1974년 4월 3일) 발표한 특별 담화에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전개하는, 적화 통일을 위한 이른바 통일 전선의 초기 단계의 불법 활동 양상이 대두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상과 전혀 다른 발표였을 뿐만 아니라 이때는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기 전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수사가 완료된 후에야 공표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발표를 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조작해내겠다, 국민한테 어떤 식으로 선전하겠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박정희는 병영 국가화를 굉장한 규모로 밀어붙였다. 전체주의적인 병영 국가화가 아니냐는 얘기까지 듣지 않았나. 대학에서도 그걸 철저하게 했지만 반상회, 예비군, 민방위 같은 걸 통해서도 병영 국가화를 아주 강화했다. 간첩 찾아내기 같은 걸 통해 항상 공포심을 갖게 하고, 마을 단위 반상회 같은 걸 활용해 우리 중에 간첩이 있지 않은지 찾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서 일가친척도, 애인도 간첩이 아닌지 주시해야 한다는 식으로 전 국민이 서로 감시하게 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그에 더해 이순신 장군, 율곡 이이 선생 같은 사람까지 동원해서 총력 안보 체제, 남침 위기를 끊임없이 강조했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남침 위기 얘기를 정말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다. '남침에 대비해야 한다.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 곧 쳐들어올 수 있다', 이런 얘기를 계속 주입하면서 위기의식을 갖게끔 했다.

프레시안 : 박정희는 그 시기에 외신 기자들에게는 뉘앙스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서중석 : 예컨대 1975년 프랑스 AFP 기자에게 한 얘기를 보자. 이때는 인도차이나 사태로 이른바 안보 광풍이 불었던 시기, 북한 공산 집단이 언제 전쟁을 도발해올지 알 수 없다고 정부에서 강조한 시기다.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에 의한다면 북한 공산 집단이 전쟁을 도발해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에 대해서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전쟁에 이길 승산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했다. 그와 함께 "국제 정치의 흐름을 보더라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을 지지할 세력도 없다고 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외신에 그렇게 얘기했다면, 국민들을 상대로 그렇게 심하게 남침 위기를 조장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곧 뭔가 일어날 것처럼 전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남침 위기에 대해 외신 기자들한테는 국민들한테 했던 것과는 느낌이 크게 다른 설명을 했는데, 그런가 하면 1976년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정희는 서종철 국방부 장관, 노재현 합참의장에게 특전사 정예 부대와 육군 부대를 작전에 임하게 하도록 명령했다. 그러고는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육군 참모총장을 다시 청와대로 불러서 작전 준비 상황을 검토하고 이북으로 진격할 때에 대비한 대책을 숙의했다. 이것도 남침을 강조한 것하고 좀 차이가 나는 정책, 대책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면서 극단적인 반공, 반북 교육을 했다. 어린 이승복의 동상이 곳곳에 서고 그러지 않았나. 그런데 초·중·고, 그중에서도 특히 초등학교 복도라든가 교실에 붙은 포스터 같은 걸 보면 이게 과연 인간적인 교육, 인도적인 교육에 적합한가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상징 조작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자 유신 체제에서 반공, 남침 위기, 간첩 잡기와 함께 제일 많이 써먹은 것이 통일이다. 그래서 1972년 유신 체제를 만들기 위한 작업과 연결돼 있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또 유신 쿠데타를 그해 10월 17일에 일으키고 새 헌법을 만들고 '통대' 선거를 해서 체육관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 '평화 통일을 위해 유신 체제로 가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런데 유신 체제에서 박정희 정권이 한 정책을 보면 어느 정권보다도 통일과 거리가 멀게끔 하는 정책이 아니었느냐고 볼 수 있다. 이건 정말 상징 조작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프레시안 : 유신 체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긴급 조치 아닌가.

서중석 : 상징 조작이나 탄압, 공포 정치, 병영 국가화를 통한 전 국민 감시 같은 것으로도 부족해서 박정희는 '유신 시대는 긴급 조치 시대다', 그런 얘기를 들을 만큼 긴급 조치에 의한 통치를 했다. 긴급 조치를 발동한 것도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것과 맥락이 똑같다. 2000년대 들어 대법원이 '유신 헌법상의 발동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채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위헌이다'라고 판결하지 않았나. 그런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긴급 조치 1호건 4호건 7호건 9호건 유신 체제 수호라는 걸 빼놓고는 어떤 필요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긴급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어떠한 사회적 위기도, 정치적 위기도, 경제적 위기도, 남북 관계의 이상 현상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속적인 탄압, 공포로도 안되고, 상징 조작으로도 잘 안되고, 총력 안보 체제라는 병영 국가화로도 잘 안되니까 직접적인 물리적 수단으로 긴급 조치를 통한 통치를 했다, 이 말이다. 그렇지만 유신 말기 긴급 조치 9호에 대해 국내외에서 '길어도 너무 길다. 이걸로 체제를 더 유지해서야 되겠느냐'는 얘기를 계속 듣게 되듯이 긴급 조치에 의한 통치라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유신 체제가 굉장히 이상한, 잘못된 체제라는 건 김대중 납치 사건, 김형욱 납치·살해 사건 같은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인가. 민주공화국, 인권 같은 것을 떠나서 도대체 일반적인 정치 사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 같은 게 있을 수 있는 건가.

거기다 대통령은 정말 그렇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 싶은 거짓말도 했다. 전에도 설명한 것처럼 1976년 포항 석유 사건, 포항에서 석유가 나온다는 그 발표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유신 체제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걸 유지하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이든 다 쓴다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국민들을 속일 수 있는 건가. 몇 달 동안 국민들이 그 발표를 믿고 정말 들뜨지 않았나. 통치를 그런 식으로까지 할 수 있는 건가. 1977년에 발표한 수도 이전설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것도 어쨌든 국민들을 여기에 쏠리게 했고 전국적인 투기 현상, 그중에서도 특히 충청도 일대에 투기 현상을 부추긴 점이 있다.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처럼 여러 가지 정책을 썼다. 유신 체제에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그것이 유신 체제를 지탱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그걸 지탱하기 위해 이런 여러 방법을 쓴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으로도 유지가 잘 안되게 돼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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