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만난 카터, '당장 짐 싸라' 펄펄 뛴 사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73> 유신의 몰락,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유신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박정희에게 도전한 김영삼

프레시안 : 1979년 5·30 전당 대회에서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은 유신 체제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박정희와 김영삼의 대결,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다시 당수가 된 김영삼과 박정희의 첫 번째 대결이라고 할까, 싸움의 제1라운드는 6월 11일 김영삼의 외신 기자 클럽 연설에서 시작됐다. 이 연설은 제목부터 과거에 야당 지도자들이 쓰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뭐냐 하면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새 시대를 연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민중 문제가 굉장히 많이 논의되는데, 그러면서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시대가 와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게 된다. 1970년대 중후반에 노동자가 점점 많아지면서 그런 주장들이 나오는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닌 보수적인 야당 총재가, 다른 데도 아니고 외신 기자 클럽에서 하는 연설 제목을 그렇게 강하게 잡은 것이다. 이 제목은 민주, 민족, 민중,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민족은 통일을 가리킨다.

프레시안 : 김영삼은 이 연설에서 어떤 얘기를 했나.

서중석 : 이 연설에서 김영삼은 언론 탄압, 인권 탄압 등의 고질적인 정보 정치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면서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이 한꺼번에 열릴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이란의 혼란과 보복이 이 땅에(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이란에서는 1979년 2월 반미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붕괴 전 팔레비 왕조는 '미국 헌병'이라 불릴 정도로 노골적인 친미 노선을 걸었고 많은 석유 이권을 서방에 넘겼다. 그에 더해 사바크(SAVAK)를 앞세워 불법 체포, 고문, 학살을 자행해 민심을 잃었다. 사바크는 미국 CIA의 도움을 받아 팔레비 왕조에서 창설한 정보 조직으로 국제 사회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편집자') 그러면서 이 연설에서, 외신 기자 클럽 연설인 만큼 당연히 해야 할 이야기였던 것인데, "카터 대통령의 방한이 특정 정권을 도와주는 데 그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우리 국민은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라면서 "카터 대통령이 나와 단독으로 만나 국민이 주장하는 바를 듣는 기회를 갖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아주 싫어했을 말이다.

통일 얘기, 남북 관계 얘기도 했는데 이것도 박정희가 싫어할 얘기였다. "나는 북의 위협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그 위협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민주적 현 체제의 존속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박정희 최대의 약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지점, 즉 북한의 위협을 핑계 삼아 유신 체제를 수호하고 강화하는 박정희의 태도를 팍 찔러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야당 세력과 성실한 대화를 할 의지가 없는 정권이 북한과 대화를 통해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라고 했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북한의 위협을 쉬지 않고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과 대화를 통해 통일하겠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김영삼이 바로 그 부분도 팍 찔러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문제가 되는 발언을 했다. "나는 야당 총재로서 통일을 위해서는 장소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책임 있는 사람과 만날 용의가 있습니다." 앞에서 내가 민중, 통일 같은 게 이 시기에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었다고 했는데, 특이한 제목이 붙은 바로 이 연설에서 통일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박정희만이 누구를 만나도 만난다고 해야 하는 때였는데, 김영삼이 '내가 만나겠다'고 나선 것이다.

상당히 긴 연설이었는데, 연설 후 외신 기자들한테 질문을 받았다. 기자가 "책임 있는 사람에 김일성도 포함되는가"라고 물었다. 김영삼은 대뜸 "그렇다"고 답했다. 오직 박정희만이 말할 수 있었던 성역을 건드린 것이다.

물론 공화당과 유정회는 가만있지 않았다. 혹세무민의 무책임한 선동을 하고 있다고 김영삼을 공격했다. 문제는 이러한 발언과 관련해 박정희 정권 쪽이 김영삼을 공격할 빌미를 북쪽에서 준 것이다. 김영삼 발언이 있은 지 1주일 후인 6월 18일 북한 부주석 김일은 "환영한다"는 담화를 내고 신민당과 조선노동당 대표 간 예비 접촉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대한상이군경회 및 반공청년회원으로 자처하는 120여 명이 21일 마포 신민당사를 1시간 동안 점거하고, 당원들을 폭행하고 당기를 찢었다. 그에 더해 상도동 김영삼 집으로 몰려가 협박하고 난동을 부렸다.

이래저래 불편한 관계였던 박정희와 카터

ⓒ오월의봄
프레시안 : 김영삼이 이러한 연설을 한 바로 그달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지 않나.

서중석 : 6월 29일 카터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돼 있었다. 이 무렵 한미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코리아게이트가 미국 언론에서 한동안 주요 이슈였을 뿐만 아니라, 1977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가 인권 정책과 주한 미군 철수 정책을 내세우면서 박정희 정권을 아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나. 그만큼 한미 관계는 악화돼 있었다.

박정희는 카터가 당선될 때부터 불안하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할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에 쓴 일기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박정희 일기 1977년 1월 12일 부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밤늦은 시간에 어제 취임한 미국의 새 대통령의 의기양양하고 즐거워하는 표정을 봤다." 의기양양하다는 말이 들어 있다. "나의 눈에는 포드 전 대통령이 훨씬 행복하게 보인다."

카터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의 인권 문제를 비판했다. 박정희는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1977년 3월 4일 대통령의 비공개 어록이라고 김충식 책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이렇게 돼 있다. "남의 나라 일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인권 문제만 해도 왜 북한에 대해서는, 또 크메르와 월남의 인권은 말하지 않는 건가." 이렇게 두 사람은 그야말로 앙숙이라고 할 만한 사이였다. 그러나 둘 다 대통령이기 때문에 '한미 관계를 이대로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프레시안 : 살아온 과정을 봐도 그렇고 갖고 있던 생각이라는 면에서도 영 맞지 않는 박정희와 카터의 정상 회담, 어떻게 성사됐나.

서중석 : 1978년 7월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신임 주한 미국 대사로 오게 된다. 글라이스틴이 쓴 책에는 자신이 대사로 올 때쯤인 "1978년 중반에 이르러 한국과의 마찰은 거의 해소돼 있었다. 코리아게이트 조사도 거의 종결 단계에 이르러 11월의 의회 중간 선거가 끝나면 신문 지면에서도", 다시 말해 그렇게 한국을 비판했던 신문들의 지면에서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됐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1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꿨던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뭐냐 하면 1979년에 정상 회담을 해서 불편했던 관계를 일소하고 새로운 한미 관계를 열자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서울에 부임하면서 이런 의견을 사이러스 밴스 국무부 장관한테 얘기했다고 한다. 한국 쪽에 의사를 타진하자, 박정희도 이 정상 회담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정상 회담이 자신한테도, 한국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미국 쪽에서는 1978년 10월 박정희에게 미국 측 의사를 전달했고, 말할 것도 없이 박정희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1979년 4월 10일 '카터 대통령이 일본을 6월말에 방문한 후 서울을 방문한다는 데 동의하라'는 훈령이 주한 미국 대사관에 오게 된다.

정상 회담을 앞두고 미국 측은 오랫동안 요구해온 긴급 조치 9호 해제, 구금자 석방 외에도 김지하 같은 구속 정치범 석방을 요구했다. 어느 하나도 들어주지는 않았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의 경우 1978년 12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해줬지만, 김지하는 풀어주지 않았다. 어쨌건 미국은 그런 걸 요구했고 그런 속에서 정상 회담을 열게 된다.

박정희 얘기에 속 뒤집힌 카터, '당장 짐 싸라' 노발대발

프레시안 : 정상 회담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79년 6월 29일 카터는 도쿄에서 열린 서방 7개국 정상 회담에 참석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에 들르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카터는 대단히 특이한 모습을 보였다. 그 이전에 미국 대통령들이 들어온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카터는 굳은 표정으로 특별기 트랩을 내려왔다. 많은 사람이 카터 하면 함박웃음을 떠올렸는데, 그날 카터는 함박웃음은 고사하고 미소도 짓지 않았다. 공식 방문인데도 도착 성명조차 내지 않았다. 마중 나간 박 대통령하고는 악수 하나로 끝마쳐버렸다. 그리고 김포공항에서 열린 환영 행사가 끝나자마자 카터는 헬기로 동두천에 위치한 주한 미군 2사단 캠프 케이시로 날아가 첫날을 거기서 보냈다. 다음 날에는 한국군 기지 시찰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카터는 날씨가 나쁘다면서 예고도 없이 시찰을 취소해버렸다. 그날 아침 미군 병사들과 함께 조깅까지 했는데도 그렇게 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6월 30일 박정희-카터 회담이 열리게 된다. 이 회담에 대해 써놓은 책이 여러 권 있는데 여기서는 김충식의 책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내용은 김충식 책이나 글라이스틴이 쓴 책이나 다른 사람들의 책이나 다 비슷비슷하다.

두 사람 간 1차 회담이 열리고 나서 휴식 시간을 마련했는데, 글라이스틴 대사가 최광수 청와대 의전수석한테 연락을 해왔다. '큰일 났다. 카터 대통령이 크게 화를 내면서 오늘 당장 미국으로 가겠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왜 그런 거냐고 최광수가 물었더니만 주한 미군 문제, 인권 문제에 관한 박정희 얘기에 속이 뒤집힌 카터가 짐 보따리를 싸라면서 펄펄 뛰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최광수가 이날 회담에서 쭉 통역을 한 모양인데, 최광수 얘기를 들어보자. "박 대통령은 정상 회담에서 먼저 발언하게 돼 있었다. (…) 박 대통령은 '굳이 가겠다면 빼내가라'", 이건 주한 미군을 가리키는 건데, "'그러나 미군의 무기와 장비는 남기고 가면 좋겠다. 그냥 주면 좋지만 돈을 달라고 하면 주겠다'", 이런 식으로 30여 분간 강하게 얘기했다고 한다. 최광수가 톤을 낮춰 통역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부드럽게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박정희는 '인권 문제는 내가 먹여 살리는 내 국민인데 내가 더 잘 안다. 간섭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정상 회담에서 험악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이다. 글라이스틴이 "정상 회담에 여러 번 배석해봤지만 이런 정상 회담은 본 적이 없다"고 쓸 정도였다.

프레시안 :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바로 돌아간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고, 실제로 일정을 앞당겨 돌아가지도 않았다. 정상 회담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그다음에는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어쨌건 대통령이라는 건 성질만 내면 안 되는 자리이고, 두 정상 모두 서로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는 것 아닌가. 설전은 하면서도 이제는 상당히 신사적으로 얘기하게 된다.

카터는 인권이 미국의 대한 정책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하면서 긴급 조치 9호를 해제하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긴급 조치 9호를 해제하는 건 어렵겠지만 지금 한 말씀에는 유의하겠다', 이렇게 답변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좀 누그러지면서 밴스 국무부 장관하고 글라이스틴 대사가 박정희를 바로 방문하니까 박정희는 '방위비 지출을 GDP의 6퍼센트 이상으로 올리겠다. 그리고 인권에 대한 카터 대통령의 생각을 이해한다. 가능한 한 조속히 민주화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도 만족을 표하고, 한국 측의 주한 미군 2사단과 연합사령부 계속 주둔 요구를 염두에 두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결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것에 대한 확답은 7월 20일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 담당 보좌관의 입을 통해 나왔다. 주한 미군 전투 부대의 추가 철수를 1981년까지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서로 신경전을 벌인 것에서 가장 큰 건 인권 문제였는데, 카터는 한국의 인권 문제를 결코 잊지 않았다. 사실 유신 반대 세력은 카터 방한을 반대했다. 이미 5월 1일에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이 공동 의장으로 있는 민주통일국민연합이 "과거에 미국 대통령의 내한이 독재 정치의 전면적인 지원이라는 결과만을 초래했다"고 하면서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6월 11일에는 구속자 가족들과 청년들이 '미국 대통령이 독재자와 대화를 나눠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광화문에 있는 주한 미국 대사관 앞뜰에서 카터 방한 반대 시위를 했다. 6월 23일 정오에는 윤보선을 비롯해 목사, 해직 교수, 문인, 정치인 등 12명이, 25일에는 고려대생 1000여 명이 카터 방한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박정희 정권은 6월 13일, 카터 방한 선발대가 서울에 온 그날부터 민주화 운동 및 인권 운동 세력, 그러니까 정치인이건 목사건 신부건 전직 교수건 여러 활동가들이건 그런 사람들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거나 연금 조치를 취했다.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열린 금요 기도회, 이때는 6월 15일에 열렸는데 여기에도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6월 18일에 열릴 예정이던 민권 운동 관련 강연 같은 것도 금지했다. 카터 방한이 끝날 때까지 미행, 감시, 연금을 통해 재야인사, 활동가 등의 발을 꼼짝 못하게 묶었다. 그런 속에서 카터는 박정희와 싸우면서 박정희가 싫어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게 된다.

▲ 박정희와 카터. ⓒ연합뉴스


한국 인권 문제에 관심 보인 카터

프레시안 : 누구누구를 만났나.

서중석 : 6월 11일 외신 기자 클럽 연설에서 김영삼이 '카터와 단독 대좌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나. 카터가 국회를 방문하는 형식으로 만나는 것에 박정희 쪽에서 동의해줬다. 그래서 카터는 여야 의원을 만나는 형식으로 국회에 가서 실질적으로는 김영삼을 만나게 된다.

김영삼은 "귀하가 유엔 연설에서 '인권 간섭은 내정 간섭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동감이며 충분한 영향력을", 이건 한국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말하는데, "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23분이나 얘기할 정도로 두 사람의 만남이 길어져서 글라이스틴 대사가 그걸 끊으려고 했다고 한다. 어쨌건 김영삼이 짧은 시간에 하고 싶은 말을 많이 했다고 볼 수 있다.

카터는 재야 종교계 지도자도 만났는데, 이것은 각계 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 12명을 접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강원용, 한경직, 김수환 등 여러 사람을 만나는 형식을 갖췄다. 나중에 김수환 추기경과 단독으로 얘기하고 싶다고 나오는데, 이건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하는 것으로 박정희와 타협한다. 그래서 자리를 옮겨 김 추기경하고만 10분간 또 요담을 했다.

다만 카터는 한 가지는 못했다. 카터는 김대중을 만나고 싶어 했다. 밴스 국무부 장관한테 성난 어조로 "박 대통령과의 일정을 취소하는 한이 있어도 김대중을 만나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나왔는데 끝내 김대중을 만나지는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쨌건 카터는 나름대로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강한 관심을 보여줬다. (이로부터 15년 후 카터는 한반도 평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1차 북핵 위기로 전쟁 분위기가 고조됐던 1994년 6월 카터는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만나 핵 위기를 중재했다. 카터의 방북은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북핵 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한편 카터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저소득층을 위한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하며 '퇴임 카터가 재임 카터보다 낫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편집자') 그렇기 때문에, 카터 방한이 유신 정권과 반유신 세력 중 어느 쪽에 유리했느냐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게 평가할 수가 없게 돼버렸다. 그런 속에서 유명한 YH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일흔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관련 기사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