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이들은 왜 "찢어 죽이는 악몽"에 시달렸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61> 유신 체제, 열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분단 이후 북한의 남침 위협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때가 별로 없긴 하지만, 유신 체제에서는 다른 시기에 비해 특히 심했던 것 같다. 실제로 어떠했나.

서중석 :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이 얼마나 위험한 사건인가를, 한국을 전쟁 위기로 몰고 갔던 위험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살펴봤는데, 그것에 이어서 1970년대 중후반에 많이 나온 남침, 안보, 간첩 얘기를 해보자. 그 시기에는 그러한 얘기를 정말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다.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한 가지를 짚고 가자. 일부에서는 경제 발전을 위해 능률을 극대화하려 한 게 유신 체제 아니냐, 정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도 유린하고 사실상 부정하면서 경제 발전을 위해 박정희가 유신 체제로 간 것 아니냐고 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 경제 문제를 얘기할 때 '그게 아니다. 유신 체제는 그것 때문에 생긴 게 아니다. 경제하고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얘기를 했지만 반공 운동과 관련해 그 문제를 다시 한 번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연구자가 제1공화국부터 전두환의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연두 회견과 시정연설을 분석해 어떤 것을 가장 중시했는가를 살펴봤다. 제4공화국, 그러니까 유신 체제의 경우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경제 발전을 가장 우선시한 것이 아니다. 이걸 제일 우선시한 것은 장면 정부하고 1964~1967년 시기의 박정희 정부다. 장면 정부 때 다른 어느 것보다도 경제 발전을 가장 중시했고, 박정희 정부도 1964년에서 1967년까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제 발전을 연두 회견이나 시정연설에서 강조했다. 1972~1979년 유신 체제에서는 국가 안보가 가장 강조됐고 그다음이 경제 발전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승만 집권기 중 1955~1959년을 가지고 분석한 것만 봐도 경제 발전이 제일 위이고 국가 안보는 두 번째인데, 유신 체제 때에는 국가 안보가 제일 위에 있고 그다음이 경제 발전이었다. 이러한 연두 회견 및 시정연설 내용 분석도 내가 전에 얘기한 '경제와 유신 체제가 직결되는 게 아니고 유신 체제를 만든 이유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는 것과도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유신 체제에서 국가 안보에 대한 강조라는 건 크게 보면 총화 단결과 반공 운동, 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물론 총화 단결도 반공 운동의 일환인 셈이니 둘 다 사실상 똑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드러나는 방식이나 방점을 찍는 부분 같은 것이 시기마다 차이가 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유신 체제 수호를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 반공 운동과 총력 안보

프레시안 : 시기에 따라 어떤 차이가 나타났나.

서중석 : 1971년 12월 박정희가 국가 비상사태 선언을 할 때에는 남침 가능성이 높다는 걸 제일 큰 이유로 내세웠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남침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신민당 의원들이 북한의 휴전선 침범 사례가 현저히 감소한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하며 '국가 비상사태 선언 철회 단행에 관한 질문서'를 제출하고, 주한 미국 대사가 북한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박 대통령에게 직접 강조한 데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그렇게 주장하면서 국가 비상사태 선언을 했다.

그로부터 1년도 안 지나 유신 쿠데타를 일으킬 때에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10월 17일 계엄을 선포하면서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고, '통대'라고 불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체육관 대통령으로 선출돼 대통령에 취임할 때까지는 평화 통일 부분을 압도적으로 중요시했다. '평화 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유신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그 부분을 강조했다.

그런데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자 북쪽에서 바로 '대화를 중단하겠다'고 나왔다. 일절 응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평화 통일을 내세워 유신 체제를 유지, 수호하는 데 난점이 생겼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해방 후부터, 그중에서도 특히 이승만 정부 때부터 반공만큼 체제를 지키는 데 유리한 게 없지 않았나. 바로 그 부분으로 회귀하게 된다. 1971년 국가 비상사태 선언 때로 회귀했다고 해도 좋은데 어쨌건 유신 정권은 그렇게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한때 북한이라고 불렀던 것을 다시 북괴로 바꿔 학교를 비롯한 여러 군데에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정부에서는 두 가지를 병행해서 쓰고 그랬다. 하여튼 이런 반공 운동, 총력 안보가 유신을 수호하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로 쓰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신 정권이 '남북 대화를 하지 말자', 이렇게 얘기한 건 아니었다. 남북 대화는 한다고 얘기하면서도 실제로는 반공 운동, 총력 안보가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을 전체적인 틀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 반공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다. 총력 안보를 다지자고 하면서 반공 운동, 반공 캠페인을 그야말로 국가적으로 전개하는데, 그렇게 하는 제일 큰 이유로 제시된 건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 1970년대 중후반에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정부의 여러 홍보 매체, 청와대 대변인 등을 통해 계속 나왔다.

그 당시를 산 사람들 가운데 40~50대 이상은 '우리는 참 불행한 세대다', 이런 얘기를 글에 많이 쓰고 그랬다. 이 시기에 나온 남침 주장이라는 건 '따라서 한국은 철저히 전시 체제 아래 있어야 한다. 언제든 북한이 쳐들어오면 그것에 대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총력 안보도 '다름 아닌 전시 체제를 우리가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걸 우리는 병영 체제라고 얘기했지만, 바로 그것을 얘기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를 산 40~50대 이상 사람들은 전시 체제에 관한 얘기를 정말 귀가 아프도록 계속 들어야 했는데, 사는 동안 그런 얘기를 그렇게 많이 듣게 된 건 세 번째라고도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이전의 두 번은 언제였나.

서중석 : 우선 일제 말에 전시 체제가 얼마나 강하게 한국인들을 괴롭히고 많은 것을 강요했나. 이승만 정부 때에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집권기에는 실제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정전협정 체결 직전부터 북진 통일 운동을 본격적으로, 끊임없이 폈다. 북진 통일 운동을 정권이 붕괴하는 그날까지 펴면서 전시 체제 분위기를 만들어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북진 통일 운동 자체가 전시 체제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1955~1956년 이후에는 전시 체제적인 분위기가 점점 탈색돼가긴 한다. 그런데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 이전에도 남침 이야기를 많이 하긴 했지만, 인도차이나 사태가 나고 1976년에는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남침 주장이라는 것을 아주 크게 강조하게 된다.

예컨대 박 대통령이 1976년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한 유시라고 돼 있는 것을 보자. 그런데 왜 유시라고 한 것인지 참…. 다른 데에서도, 예컨대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도 유시라고 했는데 이 유시라는 말은 이승만 정권 때 쓰던 말로 백성들을 타일러서 백성들에게 알려준다는 뜻이다. 황제 시대에 할 만한 말인데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에도 이 말이 많이 나온다. 하여튼 여기서 이런 얘기를 했다. "북한 공산 집단은 지금도 계속 무력 증강에 광분하면서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1970년대, 그중에서도 특히 중후반을 살아간 많은 사람이 기억할 것이다. "북한 공산 집단, 무력 증강에 광분",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 이런 말들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긋지긋하다. 한두 번 하면 됐지 왜 그렇게 쉬지 않고 라디오, TV 등 모든 매체에서 그걸 고취하느냐", 이런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 하여튼 박 대통령은 육사에서는 이런 얘기도 했다. "인도차이나 사태에 고무된 북한 공산 집단은 호기를 놓칠세라 노골적으로 침략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그러니까 여기에 맞서 총력 안보 태세로 저들의 전쟁 도발 책동을 봉쇄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당시에 이것과 비슷비슷한 말이 참 많이 나왔다.

국민에게 남침 위협 강조한 박정희, 외국 언론엔 "北, 쉽사리 전쟁 도발 안 할 것"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대통령이 그렇게 계속 강조해야 할 정도로 당시 남북 관계가 긴박한 상황이었나.

서중석 : 그건 그렇게 보기가 어려운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박 대통령 스스로 꼭 그렇게 보지는 않았다는 면을 보여줬다.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이분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무력 증강에 광분",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 "침략의 본성" 같은 얘기를 끊임없이 했다. 수많은 매체도 여러 통로를 통해 같은 얘기를 했고, 학교 교육에서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외국인과 한 인터뷰에서는 다른 얘기를 했다. 그런 인터뷰 내용은 당시 국내에는 거의 보도가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박 대통령 연설문집에 실린 그런 인터뷰를 읽어보면 '이분이 상당히 다른 소리를 하고 있구나. 어떻게 이렇게 다른 소리를 할 수 있지?', 이런 생각이 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박 대통령은 1974년에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금년에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과거 1968년도에 일으켰던 것과 같은 무모한 도발 행위를 많이 자행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무모한 도발이 많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과 달리, 1974년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런 일이 올해 또 많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얼마나 겁이 났겠나. 1970년대 후반에 가면,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이나 화교들이 외국으로 상당히 나간다. 이민 가고 그러는데, 주된 이유로 거론된 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전쟁 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화교들의 경우 그때 다른 이유도 있긴 했지만, 어쨌건 그런 소리를 자주 들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북한에 대해 굉장히 큰 두려움을 갖고 있던 월남민 등이 적지 않게 이민을 갔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같은 해 4월에 한 연설에서 이런 얘기도 했다. "지금 북한 공산 집단이 휴전선 일대에 병력과 장비를 집결하고 후방에 있는 군사 기지를 전방으로 추진한다"고 하면서 곧 뭔가 일어날 것처럼 얘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무렵 외국 기자들을 만났을 때는 놀랍게도 그런 것들과는 많이 다른 얘기를 했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했나.

서중석 : 예컨대 1975년 6월 29일 일본 언론에 밝힌 내용을 보자. 이때는 그야말로 총력 안보 태세 구축의 한가운데에 있던 시기였다. 그게 제일 셌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안보 궐기 대회가 그 전달인 5월에 얼마나 많이 열렸나. 그게 6월까지 계속되고 있었는데, 일본의 저팬타임스 기자가 '남북 상황을 지금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했다. "한마디로 얘기한다면 군사적으로는 우리가 다소 뒤지고 있는 분야도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우리가 훨씬 앞서고 있습니다. 1974년도에 우리의 1인당 GNP 513달러는 북한 공산 집단의 1인당 GNP 313달러를 훨씬 능가하고", 이렇게 말했다. 북한의 위협이 별것 아니라는 의미로 그렇게 얘기한 것이었다.

그해 8월 18일 뉴욕타임스 기자에게는 그보다 더 나아가는 소리를 했다. "현재로서도 만약 북한 공산 집단이 외부의 지원 없이 우리에게 공격을 해올 경우 우리는 미국의 해공군 지원과 적절한 병참 지원을 받는다면 성공적으로 이를 격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경우 주한 미군 지상군의 개입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북한이 외부 지원 없이 전쟁을 일으키기 어렵게 돼 있었다고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지만, 만일 기습전 같은 걸 벌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격퇴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해공군 및 병참 지원만 있으면 주한 미군 지상군까지 개입할 것은 없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다. 다시 말해 북한이 남침을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물리칠 만한 전력을 갖췄고, 유사시에 해공군과 병참 지원을 받으면 미군 지상군이 필요치 않다고까지 자신 있게 얘기한 것이다.

그해 11월 22일에도 박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한 얘기가 있다. 1975년이 하도 남침 얘기가 많이 나올 때라 외국 기자들이 그 얘기를 많이 물어봤는데, 박 대통령은 프랑스의 AFP 기자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의 상식적인 판단에 의한다면 북한 공산 집단이 전쟁을 도발해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아주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이었다. 그 당시 남북 관계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한테 '맞다', 이런 얘기를 들을 만한 것이었다. 뭐냐 하면 "그 이유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전쟁에 이길 승산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전쟁 준비에 대처하여 우리도 충분히 전쟁 저지력을 길러왔고 우리 국군과 주한 미군이 힘을 합쳐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에 단호히 대처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혀 승산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뭐라고까지 얘기하느냐. "더욱이 국제 정치의 흐름을 보더라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을 지지할 세력도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말했다. 이 이야기를 한 이듬해인 1976년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때문에 북한이 여러 가지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나. 미군 장교 두 명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비동맹 외교에도 아주 불리하게 작용하는 등 국제적으로도 북한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국제 정치 흐름 자체가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박 대통령이 봤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북한이 전쟁 같은 것을 다시 일으킬 경우 말할 것도 없이 중국과 소련은 지원을 할 턱이 없었다. 박 대통령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쉽사리 전쟁을 도발해오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이 말까지 했다. 이게 상식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왜 국민들한테 얘기할 때는 그렇게 무섭게, 곧 전쟁이 날 것처럼 해서 사람들이 이민까지 가는 일이 일어나게 한 것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뿐 아니라 국민들이 '북한이 정말 곧 쳐들어와?' 하고 의문과 반론을 제기하려고 하면, 그건 또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전쟁 발발 가능성 문제를 공론화해 차분히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청와대에서 강조하는 남침 위협 문제를 양쪽 군사력도 비교하고 국제 정세도 살피면서 냉철하게 분석하자는 얘기를 꺼낼 수 없게끔 돼 있었다. 긴급 조치에 걸린 사람의 예를 하나 보면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니 안심해라. 북괴의 남침 위협은 없다. 박정희가 똑똑한 학생들을 데려다 죽을 고생을 시키고 정치를 혼란하게 만드니 나쁘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잡혀 들어가서 긴급 조치 9호 적용을 받고 그랬다. 아니, 외국 기자들한테 상식에 맞춰 합리적으로 얘기를 했으면 국민한테도 그렇게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조금 전에 사례로 제시한 사람을 구태여 긴급 조치 위반으로 집어넣을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이 말이다. 하여튼 남침 위협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외국 기자들한테 한 이야기와 국민들한테 한 이야기가 상당히 달랐다는 것, 이 부분을 많은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하게 일어난 한국전쟁 전후 학살 중 북측에만 초점 맞춰 일방적으로 강조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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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다룰 때, 좌익이 행한 학살에 대해 이승만 정권 때보다 유신 체제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1975년 이후 대대적으로 교육하고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도발과 함께 북괴의 학살 만행이라는 것이 이 시기 반공 운동에서 굉장히 강조됐다.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죽이자"는 식으로 아주 강한 반공 구호가 나온 것도 도발 및 학살 만행 강조하고 관련이 있는데, 이 부분도 국민들한테 얼마만큼 정확하게 얘기했느냐 하는 것에서 논란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1975년 6월 25일, 총력 안보 분위기가 아주 뜨거웠던 그때 박 대통령은 6·25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그 가운데 이런 얘기도 들어 있다. "북한 공산 침략의 야만성"을 강조하면서 "북한 침략주의자들이 우리를 다 같은 동포로 생각했다면 어찌 감히 조국 강토를 하루아침에 태워 폐허로 만들고 수백만의 무고한 동포를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겠는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전에 자세히 얘기한 바가 있지 않나. 이 문제에 관해 지금까지 나온 객관적인 조사 자료, 연구 등에 비춰 볼 때 박 대통령의 이러한 얘기는 상당히 표현이 강하지 않느냐, 그리고 당시 중요한 학살은 집단 학살 형식으로 일어났는데 그게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반성하는 것도 따라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일반적인 교육으로 이뤄졌다는 데 또 문제가 있다. 예컨대 당시 문교부에서 나온 것을 보자. 1975년 문교부에서 초·중·고 교사용으로 만든 <사상 교육, 반공 교육 지도 자료집>을 보면 이렇게 가르치라고 돼 있다. "괴뢰군의 만행", 아까 이야기한 그런 만행에 대해서 "점령지에서 학살 계략, 한국군 포로의 무차별 사살, 민간인과 지주 및 자본가에 대한 학살, 40세 미만을 전멸시킨다는 남침 초기의 기본 계획", 이걸 가르치라고 돼 있다. 표현도 아주 이상하게 돼 있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예컨대 40세 미만을 전멸시킨다는 남침 초기의 기본 계획이라는 부분을 보자. 자료집의 문장으로 봐서는 그걸 실행하지는 않았다는 쪽으로 돼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런 기본 계획에 대해 난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이런 걸 가르치게 하느냐. 그리고 "반공 애국자와 양민에 대한 만행", 여기에는 "김일성의 비밀 지령에 의하여 비전투 양민에 대한 대량 학살 만행", 이렇게 써놓았다. 그런데 이것도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볼 수는 있지만, 김일성의 비밀 지령으로 비전투 양민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고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느냐 하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여튼 1970년대 중후반에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거나 학교에 가봤던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북괴의 학살 만행이라는 것이 굉장히 강조됐다. 물론 한국전쟁 때 북한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당연히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교육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1970년대의 경우 다른 때보다도 더 심하게 학살 만행을 주로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이승복의 비극 내세워 아이들에게 강렬한 증오심 불어넣은 유신 정권


프레시안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다룬 이야기 마당에서도 분명히 했듯이, 학살은 인류사에서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크나큰 범죄다. 아울러 학살 주체가 좌익이건 북한군이건 우익이건 남측 군경이건 미군이건, 즉 어느 쪽이 저질렀든 철저히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사안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그중 한쪽으로만 편향되게, 더욱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까지 무리하게 주입하려 한 유신 체제의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4월혁명을 계기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려 한 이들을 강도 높게 탄압하고, 더 나아가 피학살자들의 묘를 파헤치고 위령비를 쪼아서 파묻거나 훼손하기까지 한 이들이 다름 아닌 5·16쿠데타 세력이라는 점도 이 문제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대목이다. 다시 돌아오면, 1970년대 반공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1968년 12월 강원도 평창에서 어린 나이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승복 아닌가.

서중석 : 반공 운동, 이걸 어떤 사람들은 반북 운동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것하고 관련 있는 1970년대 반공 운동, 물론 1960년대에도 조금 있긴 했지만 특히 1970년대 반공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이승복이고 각 초등학교를 비롯해 여러 군데에 서 있는 이승복 동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1월 신년사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다가 무참하게 죽어간 평창 지방의 10세 소년의 그 애절하고도 측은한 모습이 우리 삼천만 국민들 가슴속에 철천지 원한의 못을 박았다"고 이야기했다. 아주 강한 어투로 이렇게 신년사에서 이야기했는데, 이런 게 계속해서 강조됐다. 그러면서 이승복 관련 활동이 여러 가지 나타나게 된다. 1969년 6월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실기(實記)가 발행됐는데, 전국 학교에 무료 배포됐다. 또 만화가 고우영이 그린 컬러 만화책 <공산당이 싫어요>도 국가 주도 아래 80만 부를 인쇄해 무료로 배포했다.

1970년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바른 생활> 교과서에는 이렇게 실려 있었다. "승복아, 우리가 커서 기어이 너의 원수를 갚아주마." 이렇게 원수를 갚아준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초등학교 아이들한테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그걸 문제 삼으려고 이 대목을 얘기한 것이다. 이런 강한 증오심, 복수심을 품게 하고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가르친다는 건 초등학교의 경우 좀 심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이 교과서에서 이 단원의 맨 마지막에 가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게 들어 있다. '우리의 할 일'에는 뭐라고 해놨느냐 하면 "공비들은 왜 어린이들까지 마구 죽일까?"라고 질문하면서 "아이들에게 이승복을 반공 영웅으로, 공비들을 전쟁을 해서라도 원수를 갚아야 할 복수의 대상으로" 가르치기로 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1975년에는 평창에 이승복 반공관, 그리고 이승복 동상이 건립돼 반공 교육의 장으로 이용됐다. 1970년 서울 강남국민학교에서도 이승복 동상을 세웠다. 1975년 이전부터 곳곳의 학교에서 이승복 동상을 세웠는데, 그때 이승복 상(像)을 건립하는 것이 의무 사항은 아니었지만 안 세울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만든 것인지, 강제로 만든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업자들이 개입해서 시멘트로 이승복 상을 만들어 학교에 공급했다. 그러면서 이승복 추모제, 장학 사업, 영화 제작, 이승복 기념 웅변대회, 이승복을 생각하는 글짓기 대회, 달리기 대회 같은 것을 하고 그랬다.

그때 시골이나 해안에 가보면 이런 이승복 상, 동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만든 것이긴 하지만 보통은 동상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무척 많았다. 그런데 이게 1980~1990년대에 가면 아주 보기 싫은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시멘트로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된 건데, 그러면서 1990년대 이후 대부분 철거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여튼 이승복을 통한 반공 교육 운동이 이처럼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 이승복 사건을 다룬 기록 영화의 한 장면. ⓒ이승복 기념관 홈페이지 갈무리


프레시안 :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 전두환 정권 때인 1980년대 초에 지방 중소 도시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지금까지 설명한 유신 체제의 반공 교육 내용이 조금도 낯설지 않다. 이승복 부분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때에는 수업 시간에 이승복 이야기를 배웠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문공부에서 지정한 아동 추천 도서였다. 그리고 중학교 수학여행 일정 중 하나가 이승복 기념관 방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강렬했던 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한 이승복 관련 영화였다. 2015년에 몇몇 영화를 일부 학교에서 학생들을 극장에 데려가 단체 관람한 것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일이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 때 제가 경험한 이승복 영화 단체 관람은 그것과 방식이 달랐다.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강당 창문에 검은 커튼을 치고, 뒤쪽에서 영사기를 돌려 앞쪽에 내건 흰 천에 화면을 내보냈다. 그 강당 마룻바닥에 몇 개 반 아이들이 열을 맞춰 쪼그리고 앉아 영화를 같이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적잖은 시간이 흘렀기에 영화 장면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겨 있진 않지만, 몇몇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특히 군용 대검(帶劍)으로 아이 입을 찢는 장면, 크기가 요즘 나오는 1인용 밥솥 정도 되는 돌로 사람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 등은 정말 끔찍했다. 단체 관람이 끝난 후,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내가 사는 곳이 강원도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승복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그 장면들부터 떠오를 정도로 강렬하고 무시무시했다. 당시 그 영화를 강당에서 같이 봐야 했던 아이들 중에는 울었던 친구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화 내용이 슬퍼서 운 친구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중 대다수는 너무나 끔찍해서 울지 않았나 싶다. 그런 끔찍한 장면들은 심의 과정에서 적절히 걸러내는 게 상식일 터인데, 반공 교육 영화라는 이유로 그대로 둔 채 열 살 전후의 아이들에게 단체로 보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인이 된 후, 제 나이 또래의 어떤 누리꾼이 제가 기억하는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을 써놓은 걸 보면서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다닌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낀 적도 있다.

서중석 : 이승복을 내세워 대대적으로 벌인 반공 교육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들이 당시 적지 않았는데, 교사였던 윤재철은 이렇게 썼다. "이승복 군은 국민학교 아이들에게는 위력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가위에 눌리게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공산당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공산당이 아이들을 찢어 죽이는 악몽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반공 의식보다 공포증이라고 할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오히려 더 심어주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어린 시절 이승복 영화를 본 경험을 얘기했는데, 내 의견을 덧붙이면 1970~1980년대 병영 체제식 일상을 구체적으로 복원해 다시 돌아보고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인들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규명하는 작업은 오늘날 한반도 평화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밑바탕을 탄탄히 다지는 데에도 중요하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두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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