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집권기엔 애인한테 보낸 편지까지 털렸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6> 유신 체제, 열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인도차이나 사태를 계기로 안보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1975년 5월 긴급 조치 9호가 선포되고, 그런 속에서 4대 전시 입법이 이뤄진다고 얘기했다. 4대 전시 입법, 어떤 것들이었나.

서중석 : 4대 전시 입법은 민방위법, 사회안전법, 방위세법, 그리고 교육 관계법 개정 법안이다. 민방위법은 민방위대를 구성하게 하는 법으로 17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성 중에서 군, 경찰, 향토 예비군, 학도호국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심신에 결함이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지역, 직장 단위로 민방위대를 창설했다. 민방위법이 생겨남으로써 1968년 향토 예비군 창설, 1975년 학도호국단 부활과 더불어 온 나라의 병영화가 이뤄진 것 아니냐고 얘기하기도 한다.

민방위 훈련은 월 1회 실시됐는데 유신 정권 시기에는 겁을 아주 많이 먹게끔, 실전을 방불케 하는 식으로 훈련을 이끌어가려 했다. 1980~1990년대, 특히 1990년대에 오면, 이 민방위 모임이 계속 있으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민방위 소집을 하긴 했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걸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출석만 확인하고 나서 가라고 하기도 하고 또 다른 때에는 얘기 한마디 하고서 가라는 식이었다. 하여튼 민방위 창설과 훈련 같은 것들을 통해 국가가 주민들을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됐다고 얘기할 수 있다.

'떡봉이' 앞세워 사람 잡은 유신 정권의 전향 공작

ⓒ오월의봄
프레시안 : 4대 전시 입법 가운데 특히 사회안전법은 심각한 인권 침해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았나.

서중석 : 사회안전법이라는 건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이 출옥 후 보안 처분을 받도록 한 것이다. 2년 단위로 계속 보안 처분을 할 수 있게 돼 있었는데, 그중 문제가 심각하다고 공안 당국이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보안 감호 처분을 할 수 있었다. 보안 감호 처분이라는 건 청주에 있는 보안 감호소에 가둬버리는 것이었다. 형기를 마친 사람한테 사회안전법의 이름으로 다시 수감 생활을 하게 한 것이었다. (형기를 채운 사람을 재판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다시 처벌한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보안 감호 처분을 통해 정권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를 영구적으로 가둘 수 있었다. 보안 처분은 2년 단위로 했지만, 횟수 제한도 없고 이른바 재범 위험성을 공정하게 심사하는 절차도 없었기 때문에 정권에서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보안 처분을 거듭 내릴 수 있었다. 검사가 2년마다 보안 감호 처분 갱신을 청구해 계속 가둬둘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한편 보안 처분에는 보안 감호 처분 이외에 주거 제한 처분, 보호 관찰 처분이 있었다. 주거 제한 처분은 말 그대로 거주지를 제한한 것이다. 보호 관찰 처분의 경우 거주지를 제한하지는 않았으나 주거지 관할 경찰서장에게 일정한 사항을 신고하고 그 지시를 받게 했다. '편집자')

사회안전법은 일제 말의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하고 비슷하다, 그리고 보호감호소는 일제 말의 보호관찰소, 또 그것과 약간 다르긴 하지만 대화숙 같은 것들을 상기하게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한다. 사회안전법 실시로 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은 사람들이 다시 공안 당국의 사찰 아래 놓이게 됐다.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형을 받은 수많은 사람이 이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전향이라는 제도가 이 시기에 아주 강화됐다는 점이다. 전향 제도라는 것은 일제에 의해 1930년대부터 강도 높게 적용됐다. 그 시기에 일제가 전향을 아주 심하게 강요했다. 그리고 중국과 한국에서 이런 제도가 나타나는데, 전향을 강제한 제도가 서양에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특히 동아시아 세 나라가 강제 전향이라는 아주 지독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사고라든가 정신 또는 철학을, 고문하고 사회에서 격리하고 회유하는 걸 통해 바꿀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이런 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보면 사회주의자, 사상 활동가 중에는 어떤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경우도 있는데 그런 점을 고려해 고문, 격리, 회유를 통해 한 사람을 변동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또 실제로 변동되는 경우가 일부 생긴 면을 활용해 그렇게 한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에도 이런 전향 공작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제일 고약한 형태로 이뤄지는 건 1973년 이후다. 한홍구 교수 책을 보면 1973년 8월 좌익 수형수 전향 공작 전담반 운영 지침이라는 것이 나오게 된다. 좌익 수형수라는 건 사상범을 말하는데, 그러면서 전향 공작 전담반에 교회관, 여기서 회(悔)라는 건 회개하게 한다는 그 회인데, 그런 교회관 같은 것을 둔다. 그러나 이건 형식적인 것이었고, 전향 공작을 실제로 맡아서 좌익수 또는 사상범을 고문한 건 '떡봉이'라고 불린 깡패들이었다.

프레시안 : 강제 전향 공작은 어떤 식으로 이뤄졌나.

서중석 : 당국은 '떡봉이'들한테 교도소에서 특권을 누리게 하고, 전향을 많이 시키면 가석방 같은 것도 시켜줄 수 있다고 회유했다. 그러면서 '떡봉이'들을 좌익수들이 수감된 특별사에 배치했다. 그때부터 좌익수들은 정말 무시무시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이자들은 '떡봉이'라는 이름 그대로 좌익수들을 시쳇말로 떡을 만드는 심한 고문을 했다. 그뿐 아니라 0.7평형에 비전향 사상범 18~19명을 넣어 고생시키기도 했다. 그래도 전향하지 않으면 흉악범 2명이 들어 있는 방에다 집어넣었다. 종일 흉악범들한테 두들겨 맞게 하고, 한겨울에는 마룻바닥을 얼게 한 다음 발가벗겨 거기에 앉히고 얼음물을 정수리에 뚝뚝 떨어뜨리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고문을 동반한 공작이 계속되면서, 한홍구 교수 글에 의하면 대전교도소의 경우 1973년 8월부터 1년간 197명의 좌익수가 전향했다. 그 사이에 사상범 최석기는 '떡봉이'들한테 맞아 죽었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 그날 하루에만 10명의 수형자가 전향을 당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람의 죽음을 의문사로 인정하게 된다. 하여튼 이런 일이 대전교도소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사람이 맞아 죽을 정도로 때리는 식으로 전향 공작이 지속되면서 광주의 경우 64명이던 비전향수가 1년이 지나자 10명 정도로 줄었다. 청주 보안 감호소에 있던 변형만이라는 좌익수는 단식 투쟁 중 숨을 거뒀는데, 교도소 쪽에서 왕소금을 잔뜩 부은 소금물을 고무호스에 집어넣어 강제 급식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됐다. 무지막지한 고문과 폭력,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모욕 주기를 견디다 못해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박융서가 그런 경우인데, 이 사람은 '떡봉이'한테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당했다. 결국 1974년 7월 20일 자기 동맥을 찢고 흐르는 피를 찍어 벽에다가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쓰고 세상을 등졌다.

전향 문제로 세상에 많이 알려진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서준식이다. 나랑 나이가 같은데, 1971년 대선 기간에 재일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것에 휘말려 형인 서승과 함께 보안사에 의해 갇혔다. 이 사람은 7년이라는 형기를 다 마친 후 보안 감호 처분을 계속 당해 10년이나 더 갇혀 있어야 했다. 1987년 3월에는 50일에 걸친, 그야말로 죽음을 무릅쓴 단식 투쟁을 하기도 했다. 이 사람은 1988년 5월 비전향 장기수로는 처음으로 풀려나 바깥세상에 나왔는데, 1971년 보안사에 끌려간 지 17년 만이었다. 23세이던 학생이 40대가 돼서야 감옥에서 나온 건데, 수감 생활의 대부분은 보안 감호 처분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때에만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안 감호 처분을 받은 게 아니라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 정권 때에도 계속 그런 처분을 받은 것이다. 사회안전법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향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국에서 계속 그런 처분을 내린 것이다. (서준식은 '사람의 생각은 누구도 규제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전향을 끝까지 거부했다. 강제 전향 공작 때문에 유리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혈관을 끊으며 자살을 시도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기도 하지만, 신념을 꺾지 않았다. 서준식은 감옥에서 나온 후 인권 운동가로 살아가며 "사상의 자유에 대한 부정은 인간에 대한 부정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임을 거듭 설파했다. '편집자')

2014년, 박정희 정권 당시 사상 전향 강요 때문에 옥중에서 사망한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정부가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사상 전향 제도는 수형자들의 사상적 판단에 대한 표현을 강제하는 것으로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 행위"였다면서 "정부는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상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학원은 병영으로, 사회는 물샐틈없는 감시 체제로

프레시안 : 다른 전시 입법들은 어떠했나.

서중석 : 방위세법은 문자 그대로 방위세법이다. 교육 관계법 개정 법안은 나중에 또 이야기를 하게 될 텐데, 여기서 제일 문제는 대학 교수 재임용제가 개정 법안에 들어 있었고 유신 권력이 그걸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4대 전시 입법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것과 비슷한 것으로 대학 내에 드디어 학도호국단이 설치됐다.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권 때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에서 병영 체제, 전시 체제 분위기를 학도호국단을 통해 많이 만들어가면서 권력이 악용했다. 그래서 1960년 4월혁명이 나자마자 바로 폐지됐던 것인데, 이때 부활했다. 긴급 조치 9호가 1975년 5월 13일 선포된 직후 박정희 정권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학생회를 해산시키고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분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사단으로 편성했다. 중대장까지는 학도호국단장인 학교장이 임명하도록 했다. 1975년 9월 2일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을 하는데, 그러면서 2학기에 전반적으로 실시된다. 학생뿐만 아니라 교직원도 여기에 들어가게 된다. 학생 대표는 연대장이 되고 각 대학 총·학장은 군대로 치면 사단장에 해당하는 학도호국단장이 됐다. 학도호국단 학생 간부들은 1주일씩 입영해 교육을 받아야 했다. 여대생들도 여군에 입소해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학원의 병영 체제가 완벽하게 된 것인데, 대학 시위를 근절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병영화를 강화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반상회 제도도 만들어서 활용했다. 반상회와 유사한 것으로 일제 말에는 애국반이 있었고 이게 1950년대에는 국민반이 되는데, 사실 1950년대 국민반은 있으나 마나 했다는 평도 들었다. 강화하겠다는 이야기를 이승만 정권에서 몇 번이나 했지만, 제대로 안됐다. 그런데 유신 체제에 와서 1975년에 생긴 반상회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이건 또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의해 계속 이용됐다.

프레시안 : 이웃끼리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게 뭐가 문제냐,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유신 정권이 강제한 반상회는 그런 게 아니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은 매월 25일을 반상회의 날로 정했는데, 이때 국정을 홍보하고 지역 주민들을 감시하게 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반상회는 크게 변하는데 그 이전의 반상회라는 건 반공 교육, 국정 홍보, 그리고 특히 비상시 행동 요령 및 간첩과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는 요령, 이른바 유언비어 신고 의무화, 불순한 언동 금지 같은 것을 다루고 교육하고 홍보하는 장이었다. 그러면서 주민들이 서로 감시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이런 제도에 더 힘을 실어준 게 주민등록법 강화를 통해 감시 체제를 강화한 것이었다. 1975년 7월 주민등록법을 개정해 주민등록증 발급 대상자 연령을 17세로 낮추고 사법 경찰 관리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총력 체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인도차이나 사태라는 뜻밖의 상황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강화시켰고, 그건 바로 유신 체제 강화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인도차이나 사태라는 것이 일어나면서 세상이 무지무지하게 바뀌었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총력 안보 태세가 여기저기서 계속 열린 궐기 대회, 사회안전법 같은 각종 법령, 그리고 학도호국단이라든가 반상회, 민방위대 같은 것을 통해 강화됐다. 그렇게 되면서, 이제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인다는 건 정말 힘든 것 아니냐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김상진 의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도 없지 않느냐. 우리가 몸을 불살라서라도 뭔가를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 적지 않은 학생들한테 간절했다. 그러면서 일어난 시위가 5·22 시위인데 그전에 긴급 조치 9호를 간단히 살펴보자.

▲ 1975년 9월 2일 중앙학도호국단 발단식 후 시가행진하는 학도호국단. ⓒ연합뉴스


민초들도 긴급 조치 칼춤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프레시안 : 긴급 조치 9호는 '긴급 조치의 종합판'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시기적으로 맨 마지막에 나왔다는 점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을 만한 특색이 있었나.

서중석 : 긴급 조치 9호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행위, 다양한 수단을 통해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행위, 헌법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 청원, 선전 또는 선동하거나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일절 금했다. 다른 긴급 조치와 마찬가지로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고 돼 있었다. 긴급 조치 중에서 9호는 제일 오랫동안, 유신 체제가 망할 때까지 갔을 뿐만 아니라 적용 범위의 폭이 굉장히 넓었다.

특히 유언비어 날조라고 돼 있는 그 부분을 보면 모든 사람의 대화가 다 해당될 수 있었다. 어떤 게 유언비어인지 아닌지는 당국만이 재단할 수 있었다. 얘기하는 사람은 그걸 알 수 없었다. '너 유언비어 퍼뜨렸지?', 이러면 잡혀 들어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돼 있었기 때문에 온 국민이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량도 긴급 조치 1호라든가 4호처럼 무지하게 높거나 하지 않았다. 긴급 조치 9호의 경우 징역 3년 내지 5년을 많이 때렸다. 집행 유예도 때릴 수 있었다. 그래서 '긴급 조치 9호는 긴급 조치 시리즈를 집대성한 것이다. 그때까지 나온 긴급 조치들이 부정적인 효과를 많이 낸 것과 달리, 나름대로 융통성을 발휘해 아주 간특하다고 할까, 요령 있게 만들어낸 게 바로 9호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서 긴급 조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한 번 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프레시안 : 긴급 조치에 걸려든 건 대부분 사회적으로 소수인 이른바 운동권이고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간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느냐고 여기는 이들이 일각에 있어 보인다. 실제로 어떠했나.

서중석 : 그게 그렇지가 않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있었던 긴급 조치 관련 판결, 그러니까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까지 위반 사건 판결문 1412건을 분석해 2007년 발표했다. 이 1412건을 판결한 판사는 492명인데 그중 100명 정도가 지방법원장 이상의 고위직을 지낸 것으로 조사됐다. 거기에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라든가 대법원 판사 같은 사람도 들어 있었다.

위반 사건 판결문 1412건을 보면 48퍼센트가 국민들의 일상적 발언을 유언비어 유포라는 명목으로 처벌한 것으로 나와 있다. 긴급 조치, 유신 체제를 정면으로 반대한 학생들의 반유신 활동은 32퍼센트를 차지했다. 재야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지식인 등의 반유신 활동은 14.5퍼센트였다. 그러니까 전체의 거의 반절이 꼭 막걸리 반공법처럼 어디서 발언 한 번 한 것이 문제가 돼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명목으로 처벌된 것이다.

이 점은 긴급 조치 위반자 직업에서도 드러난다. 긴급 조치 위반 사건 판결문에 피의자로 등장하는 사람이 1140명으로 돼 있는데 그중 대학생이 464명으로 제일 많은 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 가운데 무직이 116명이나 되고 자영업자가 81명이나 되고 농업이 43명이나 되고 막노동이 40명이나 된다. 이건 그야말로 민초들이다, 이 말이다. 어디서 말 한마디 한 것을 가지고 긴급 조치 위반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판결 가운데 긴급 조치 9호 위반과 관련된 게 1289건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이 긴급 조치 9호 위반으로 걸렸다. 긴급 조치 1호와 4호 위반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긴급 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은 1387명으로 나와 있다.

애인한테 보낸 편지까지 훔쳐본 박정희 정권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렇게 잡혀가 재판까지 받은 건가.

서중석 : 긴급 조치 위반 사례를 보면 당시 어떤 식으로 국민이 통제받고 감시를 당했는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여기서는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보도된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1974년 1월이니까 이건 긴급 조치 1호 위반일 텐데, 이웃 주민과 이야기하던 중 3선 개헌과 긴급 조치에 대해 "현 정권이 무너지는 징조로 보인다"고 말하고 주민들에게 "현 정부가 부패해서 공화당과 박 정권이 망한다"고 얘기한 사례다. "군대 가면 중동전쟁에 나가서 죽는다", 이런 얘기도 했는데 이것도 문제가 됐다. 이 사람은 1심, 그러니까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형을 12년이나 받았다. 1974년 5월에 발생한 다른 한 건을 보면 이건 이웃 사람한테 "박정희가 여순 반란에 가담했는데 운이 좋아 대통령이 됐다"고 말했다가 긴급 조치 위반으로 걸려든 사례다. 이 사람도 1심에서 징역형을 12년이나 받았다. 또 한 건은 술집에서 "유신 헌법은 독재를 위한 것이며 긴급 조치는 정부를 비판하는 학생들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언한 사례인데, 이 사람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설교 때문에 신고당한 목사도 있다. 설교 중 "박 정권이 인권 탄압을 지속하고 있으며 농민, 근로자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얘기했다가 징역형을 6년이나 받았다. 수업 중에 유신 체제에서 단독 입후보한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차라리 북한의 김일성이 똑똑하다"고 발언했다가 잡혀 들어간 사례도 있다. 그런데 목사가 잡혀 들어간 사례는 보도됐지만 신부가 그렇게 된 사례는 안 나온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중심으로 해서 유신 체제를 그렇게 강하게 비판했는데, 천주교 신자들이 그걸 신고하지는 않은 것 같다.

또 이렇게 걸린 사람도 있다. 한 충남대 학생은 애인한테 보낸 편지 때문에 걸려들었다. 서울, 대전 등 대학가에서는 데모가 일어나고 있고 학생에 대한 감시가 시작됐고 긴급 조치 때문에 말도 못하고 산다고 편지에 썼는데, 당국에서 이걸 검열해 처벌한 것이다. 그러면 전 국민이 검열을 받은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도대체가 신고를 당해서 잡혀 들어가는 건 백번 양보해서 '그런 일이 있는가 보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편지가 검열에 걸려 이렇게 잡혀 들어가는 건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

하여튼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실세 김종필 등이 김아무개, 윤아무개, 정아무개 등 유명한 영화배우나 탤런트와 성적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그 시기에 돌았는데 그런 소문을 퍼뜨린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거나 집행 유예를 선고받고 전과자가 됐다. 고등학교의 한 윤리 교사가 수업 중에 "박 대통령과 각 부 장관들이 연예인들과 스캔들이 많다"고 얘기했다가 기소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프레시안 : 국정원을 비롯한 여러 정보·수사 기관이 기자, 야당 정치인, 노동 운동가, 시민 단체 활동가, 대학생, 그에 더해 세월호 유가족에 이르기까지 통신 자료를 무더기로 조회한 사실이 근래 드러났다. 이 사실이 드러나기 전에도, 민감한 개인 정보인 이용자들의 통신 자료가 이동 통신사를 통해 정보·수사 기관들로 어마어마한 양이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 기관들이 자초한 이러한 광범위한 사찰 의혹은 애인한테 보낸 편지를 훔쳐보고 그 내용을 문제 삼아 처벌한 유신 체제의 기괴한 풍경을 그저 흘러간 옛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어쨌건 말 한마디를 문제 삼아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유신 체제에서는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면 언제든, 어디서든 걸려들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서중석 : 그래서 이 시대에는 다방에 가서도 말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다방에 별의별 사람이 다 왔고 거기에는 프락치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든 얘기를 하기가 참 힘들었다. 그런 것 때문에 조심하는 차원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면 '저 사람들은 은밀히 무슨 얘기를 하나', 이런 식으로 달라붙고 그랬다.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칸막이 문화의 확산이다. 채백 부산대 교수의 글에 따르면, 긴급 조치 시대에 접어든 후 접객업소에서 칸막이 문화가 널리 퍼졌다. 그 이전에도 일부 접객업소에 칸막이가 있긴 했지만, 긴급 조치 남발로 대화할 때마다 우선 주변부터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칸막이 문화가 술집뿐만 아니라 다방, 레스토랑, 음식점 등으로 퍼진 것이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적잖은 공중 화장실이 낙서로 도배가 될 정도로 화장실 낙서도 증가했고, 권력 쪽의 발표를 믿기 어려웠기 때문에 유언비어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언론 보도를 강하게 통제한 것에 더해 마음 편히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옥죈 유신 정권이 만들어낸 풍속도다. '편집자')

이런 긴급 조치들은 2000년대에 와서 다 위헌 판결이 났다. 긴급 조치 1호에 대해 2010년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서 "긴급 조치 1호는 유신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전면 금지함으로써 이른바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현행 헌법은 물론이고 당시 유신 헌법상의 긴급 조치 발동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채 한계를 벗어나 국민을 침해했기 때문에 위헌이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긴급 조치 9호도 비슷한 이유로 2013년 4월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이 났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대법원은 긴급 조치 4호에 대해 같은 이유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2010년부터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상반기까지 긴급 조치가 위헌이라고 연이어 판결했던 대법원은 그 후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근거로 긴급 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은 2015년 3월 뜻밖에도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긴급 조치 발령 행위는 고도의 정치 행위이므로 (…) 국가 배상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긴급 조치는 위헌이지만, 헌법을 짓밟고 긴급 조치를 발동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위로 인해 피해를 본 국민들에게 국가가 배상할 필요는 없다는 기묘한 논리였다.

대법원의 이러한 판결은 국가의 불법 행위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 시효를 '형사 보상 결정일로부터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대폭 줄인 판결(2013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고문당했더라도 생활 지원금 등 보상금을 받았다면 국가의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없다는 판결(2015년), 1975년 동아일보 언론인 대량 해직 사태와 관련해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동아일보사의 손을 들어준 판결(2015년)과 함께 박근혜 정부 들어서 이뤄진 과거사 사건에 대한 퇴행적인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법원에서 긴급 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부정한 후 여러 하급심에서도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를 기각해 "정찰제 기각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와 달리 일부 하급심(광주지법 민사 합의 13부, 서울중앙지법 민사 11부, 광주지법 목포지원 민사 1부)에서는 "(국가 배상 책임 부정은) 대법원이 전원 합의체로 내린 긴급 조치 위헌 결정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일", "긴급 조치 발령은 대통령의 헌법 수호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고의 내지 과실에 의한 위법 행위"라며 대법원과 달리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해 눈길을 끌었다. '편집자')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쉰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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