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게 찍힌 그들, 시신 돼서도 가족 못 만났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5> 유신 체제,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1974년 8월 긴급 조치 1호, 4호가 해제된 후 대학가는 다시 민주화 운동 추진 기지 역할을 했다. 1975년 초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됐던 이들이 풀려나고 고문 실상이 연이어 폭로되는 속에서 대학생들은 새 학기를 맞이하게 된다. 1975년 봄 대학가 분위기는 어떠했나.

서중석 : 개학하자 대학가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교수, 학생들을 복직, 복교시키는 문제를 연세대, 한신대, 서강대 같은 데에서 제기하면서 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연세대에서는 이미 2월 24일, 당시 박대선 총장이었는데, 석방 학생들의 복학 원서를 받아들이고 김동길, 김찬국 두 교수의 복직도 승인했다. 그러자 문교부가 발끈했다. 석방된 학생들의 복학을 불허한다는 방침을 하달하고, 이를 어기면 폐교 조치도 불사하겠다고 나왔다. 이때 박대선 총장이 대단하더라. 전에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있긴 한데, 이때 박 총장은 "복교 조치는 진실과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대학과 사회의 엄숙한 요청이다", 이렇게 나왔다. 문교부는 즉각 연세대에 계고장을 보내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총장과 이사장 승인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3월 14일 연세대에서 총학생회가 중심이 돼서 긴급 학생 총회를 열었다. 여기에 학생 4000여 명이 모였는데 석방된 교수와 학생들의 복직, 복교 조치를 확고하게 지지했다. 문교부는 바로 '박대선 총장을 해임하라. 그리고 김동길, 김찬국 교수를 해직시켜라'라고 연세대에 요구했다. 문교부에서 그렇게 나오니까, 연세대 총학생회는 '계속 그렇게 요구하면 유기춘 문교부 장관 사임 운동을 전개하겠다'며 경고문을 보냈다. 3월 27일 연세대 학생 5000여 명은 다시 긴급 학생 총회를 열고 '석방 교수와 학생의 복직, 복학 문제는 대학 자율에 맡겨라. 그렇지 않으면 극한투쟁도 불사하겠다', 이렇게 나왔다. 이튿날에는 일부 학생들이 교내 시위도 벌였다.

긴급 조치 7호 발동한 박정희, 죽음으로 항거한 김상진

프레시안 : 다른 대학들의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석방 학생들의 복교를 연세대뿐만 아니라 중앙대, 서강대, 성균관대, 서울대, 한신대 등 다른 여러 대학에서도 요구했고 그러면서 학원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그런 속에서 3월 31일 고려대 학생 1500여 명이 유신 헌법 철폐, 미석방 학생 석방, 고문 정치 원흉 처단, 독재 정치 중지를 요구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

대학생들의 투쟁은 4월에 가서 더 치열하게 전개됐다. 4월 3일 연세대에서 다시 긴급 학생 총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6000명이나 참석했다고 돼 있다. 연세대 전교생이 7000명 정도였는데 그중 6000명이나 모인 것이다. 이들은 정문에서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시위를 벌였는데, 개교 이래 최대 규모였다. 그러자 바로 2개월간 휴교령이 연세대에 내려졌다. 그러면서 박대선 총장이 사임하게 된다.

연세대 학생들이 큰 규모의 시위를 한 4월 3일, 서울대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다. 이날은 민청학련 사건 1주년, 그러니까 긴급 조치 4호를 선포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서울대생 2000여 명이 모여 "수감 중인 우리의 동료 이현배, 유인태, 김효순, 이강철을 즉각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전원을 즉각 사면, 복교시키라는 결의도 했다. 그러고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고려대에서도 4월 7일 오후 5시에 2000여 명이 모여서 유신 쿠데타 이듬해(1973년)에 터진 민우지 사건, 야생화 사건(검은 10월단 사건)으로 구속된 선배들을 다 석방하라고 요구하고, 민주 헌정을 즉각 회복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500여 명이 도서관에서 철야 농성에 들어갔는데, 철야 농성을 한 학생들이 다음 날 아침에 등교한 학생들과 합류하면서 8일 30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그러자 4월 8일 바로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고려대라는 하나의 대학을 대상으로 해서 긴급 조치 7호를 발동했다.


▲ 긴급 조치 7호 선포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75년 4월 10일 자 1면.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프레시안 : 한 나라를 관장하는 청와대에서 대학 하나를 상대로 그런 초강경 조치를 취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일이 왜 생긴 것인가. 청와대에 특별히 밉보일 만큼, 4월 7~8일 고려대 시위가 다른 대학에서 일어난 시위보다 규모가 크고 강도가 셌던 것인가?

서중석 : 그 시위는 다른 데에 비하면 그렇게 크다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긴급 조치를 남발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한 대학을 상대로 해서 그렇게 긴급 조치를 선포할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사실 이즈음 고려대에서 큰 시위가 그렇게 여러 차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고려대의 경우 주요 서클 구성원들이 민우지 사건, 야생화 사건으로 구속되고 그 후에도 탄압이 있고 해서 오히려 연세대나 서울대에 비해 학생들의 활동이 약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한 고려대에 긴급 조치 7호를 내린 건 또 하나의 신호가 아니었느냐, 그렇게 볼 수 있다.

긴급 조치 7호 발동과 동시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긴급 조치 7호 위반자는 3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 있게 됐다. 오후 5시에 긴급 조치 7호를 내렸는데, 그 직후 오토바이를 선두로 해서 완전 무장한 헌병대 1개 중대 병력이 고려대에 들어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조치는 하나의 신호, 그러니까 '이제 더는 유신 체제가 물러서지 않겠다. 강펀치를 날리면서 계속 나아가겠다', 이런 신호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박정희는 긴급 조치 4호 발동 후 1년 만에 다시 유신 수호 태도를 아주 강하게 드러냈다. 유신 정권은 4월 8일 이날 한신대에도 휴업령을 내렸다. 9일까지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 등도 휴교에 돌입했다.

긴급 조치 7호 발동 사흘 후인 4월 11일, 수원에 있는 서울대 농대에서 학생들이 자유 성토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발언자로 나선 김상진 학생이, 이 사람은 복학생이었는데, 할복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레시안 : 인생에서 20대는 다른 시기에 비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꿈도 많은 때다. 그러한 20대이던, 더욱이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도 좋은 서울대 학생이던 김상진은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가. 그리고 김상진의 행동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이 사건은 학생들한테 아주 큰 충격을 줬다. 노동자 전태일이 1970년 11월 몸에 석유를 끼얹고 자기 몸을 불살라 큰 충격을 줬는데 그 이후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 또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는 이런 사건이 좀 더 자주 일어나게 되는데, 김상진 할복자살 사건은 사회, 그중에서도 특히 학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토대회에서 김상진은 양심선언문을 읽었는데 이게 참 인용이 많이 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 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전의 결의로 진격하자." 이런 내용을 쭉 읽어가다가 양심선언 끝부분, "이것이 영원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를 읽으면서 칼을 꺼내 하복부를 그었다. 학우들이 의식 불명의 김상진 학생을 수원 도립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다음 날 절명했다. 김상진 할복자살 사건 직후 명동성당에서는 추도 미사를 열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다음 달에 유명한 5·22 서울대 시위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내가 8, 9년 전 금강산에 갔을 때 놀랍게도 그 모임의 주최 세력 중 한 축이 김상진 유지 계승 사업을 하고 있는 서울대 농대 후배들이었다. '이분이 할복자살한 지 3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렇게 후배들이 계속 그 뜻을 받들어 일을 해나가고 있구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8명 사법 살인으로도 모자라 시신까지 강탈한 유신 정권

프레시안 : 불의를 눈감고 출셋길을 달리는 대신 죽음으로 저항한 사례다. 1975년 4월 봄날의 안타까운 죽음은 이것만이 아니지 않나. 사법 살인으로 희생되는 이들이 생긴 것도 이때 아닌가.

서중석 : 긴급 조치 7호가 고려대에 발동된 4월 8일 그날 대법원에서 인혁당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렸는데, 인혁당 재건위 쪽으로 재판을 받은 22명 중 7명의 사형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고 민청학련 쪽으로 재판받은 여정남도 사형이 확정됐다. 민복기가 대법원장이던 대법원은 비상고등군법회의 판결 그대로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도 있을 수 없는 판결이지만, 비상군법회의의 군인들이 아닌 민간인들조차 그런 있을 수 없는 판결을 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것도 대법원 판사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 충격적인 일이 곧이어 일어났다. 그다음 날 새벽에, 도대체 하루도 안 지난 이때 여덟 분을 처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법원 확정 판결 후 19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새벽 4시 55분에 서도원으로 시작돼 오전 8시 30분까지 여덟 분이 법의 이름으로 학살됐다. 사형수의 경우 3년 내지 5년은 보통 감옥소에 그대로 놔두는 법 아닌가. 빨리 처형한다고 해도 대개 1~2년은 그냥 두는 건데 이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봉암이 그렇게 빨리 처형당했고 지난번에 이야기한 문세광도 빨리 처형당했는데 이때는 그보다 더 빠르게, 대법원 판결 직후 이런 처형이 이뤄졌다.

프레시안 : 사형 집행이 왜 그렇게 빨리 이뤄진 것인가.

서중석 :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처형이 이뤄졌느냐.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 이 사건 수사의 현장 지휘자였던 이자조차 중앙정보부 관계자들도 그렇게 빨리 사형이 집행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이용택에 따르면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 명령을 내려라'라는 박정희 지시가 국방부에 이미 전달돼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박정희는 1975년 2월 21일 문공부 순시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합법 정부를 뒤집어엎으려 한 자들은 어느 나라 법에서든지 극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고 이미 얘기한 바가 있다. 그리고 긴급 조치 4호를 선포할 때 발표한 특별 담화 같은 것은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다. 공산주의자 또는 지하 공산당으로 몰아치고 그중 몇 명을 희생시켜서 유신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끔 한다. 긴급 조치 4호 특별 담화나 그 이후 수사 발표 같은 것에서 그런 걸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박정희가 몇 명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희생당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1975년에 도대체 턱도 없이, 부엌칼을 쓰면 될 걸 도끼를 휘두른 것과 같은 조치가 고려대에 내려졌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이런 일이 또 일어난 것이다.

이 여덟 분의 시신은 가족들한테 제대로 인계되지도 못했다. 함세웅 신부가 있는 응암동 성당에 시신들을 안치해 장례식을 치르려 했는데, 경찰이 완력으로 일부 시신을 탈취해 자기들 차에 싣고 가서 벽제화장터에서 화장하거나 장지로 옮겨갔다. 마지막으로 송상진의 시신을 실어 가려 할 때 신부들이 앞장서서 영구차를 뺏기지 않으려 분투했다. 시노트 신부 같은 사람은 차 밑 바퀴 사이로 기어들어가서 드러누웠다가 개 끌려가듯 끌려나왔다. 문정현 신부는 경찰이 동원한 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등 시신 탈취에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다리를 크게 다쳤다. 문 신부는 지금까지도 정말 대단한 투사인데, 그때 심하게 다쳐 지금도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하여튼 결국 크레인에 견인돼 이 시신도 벽제화장터로 끌려갔다. 가족들 확인도 없이 화장된 것이다. (시신 8구 중 4월 9일 그날 가족들에게 인계된 건 3구뿐이었다. 나머지 5구 중 3구는 나중에 인계됐지만, 2구는 가족 동의조차 없이 화장됐다. 잔혹한 고문으로 엉망이 된 시신이 공개되는 것을 꺼린 박정희 정권이 생전에는 가족 면회를 막고 사형 집행 후에는 시신을 빼앗아 화장해버린 것이다. '편집자') 그러면서 4월 30일에는 시노트 신부가 오글 목사에 이어 추방당한다.

이처럼, 사법사상 가장 어두운 날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강신옥 변호사가 말한 그대로 사법 살인, 법살이라고도 표현되는 사법 살인 또는 법에 의한 8명의 학살이 유신 체제 수호라는 것 때문에 발생했다.

▲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이 있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2012년 9월 12일,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 유족들이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박근혜 후보를 규탄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연합뉴스


유신 체제에 활로를 열어준 인도차이나 사태

프레시안 : 유신 체제의 경우 성립부터 몰락의 그 순간까지 강권을 빼놓고 말할 수 없긴 하지만, 오로지 힘만을 내세워 특정한 하나의 체제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연이어 나타나자 박정희 정권은 사법 살인을 비롯한 무리수를 거듭 뒀지만, 그것만으로 유신 체제를 지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유신 체제는 그 후 4년이나 더 존속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서중석 : 유신 체제를 구한 건 이런 잔혹한 학살 또는 사람들한테 납득이 안 가는 긴급 조치 7호 발동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유신 체제에 너무나 뜻밖에도 구원자가 나섰다. 사실 유신 체제는 1973년 10월부터 아주 큰 도전, 유신 반대 운동에 직면해서 '저거 제대로 가겠느냐'는 상태로 1975년 4월까지 왔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이 시기에 인도차이나 사태가 일어났다. 4월 17일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에 들어갔다. 4월 30일에는 베트남의 사이공이 월맹, 베트콩에 의해 함락됐다. 라오스도 파테트라오가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세 나라가 공산화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엄청난 규모의 안보 궐기 대회 같은 것들이 열리게 된다. 유신 정권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볼 수는 있겠지만, 여기에 나온 사람들이 전부 그런 조종 때문에 동원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자발적으로 그런 궐기 대회라고 할까,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임 같은 게 이때 생기고 그런다. 인도차이나 사태를 보면서 '이거 우리도 저렇게 되는 것 아냐' 하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이다. 개신교 보수 세력과 극우 반공적인 세력 등 여러 세력이 인도차이나 사태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인도차이나에서 세 나라가 무너졌다고 해서 한국도 연이어 공산화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가능성은 전혀 있을 수가 없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 1949년 국공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난 것이 김일성을 고무해 한국전쟁으로 이어지게 만든 것처럼 1975년 인도차이나 공산화가 김일성을 다시 그 방향으로 고무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 않나.


서중석 : 유신 체제가 너무나 잘못된 것이기에, 민주 헌정을 짓밟은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항쟁이라고 할까 투쟁은 격렬하게 일어났지만 그것이 사회를 큰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나? 이걸 우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 때문에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질 만한 상황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그렇지 않았다. 시위가 많긴 했지만 사실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교문 밖에 제대로 나오기도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도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만하다고 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잘못된 유신 체제를 바꾸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리게끔 돼 있었다. 바로 그런 상태였다.

그리고 미국이 도미노를 우려하면서 인도차이나에 그렇게 오래 묶여 있었는데, 인도차이나가 결국 공산화되지 않았나. 인도차이나가 그렇게 돼버렸으니까, 미국은 이제 거기는 끝내버리고 아주 중요한 동북아 쪽에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인도차이나 공산화 이듬해인 1976년 한국과 미국, 두 나라 군대의 대규모 연례 합동 훈련인 팀 스피릿 훈련이 시작됐다. '편집자')

물론 이 시기에 김일성이 중국에 가서 한 발언 같은 것이 좀 자극을 줬을 수는 있다. 4월 18일 김일성은 14년 만에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김일성은 중국 방문 기간 중 등소평(덩샤오핑)이 주최한 행사에서 연설을 했다. 이때 국내 신문에 보도된 걸 보면 이 연설에서 중요한 내용이 그대로 보도된 게 아니라 일부만 소개됐는데, 거기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만일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단일 민족이면서 같은 민족으로서 팔짱을 끼고 있지 않고 남조선 인민을 적극 돕겠다."

이게 아주 강한 남침 의사를 표현한 것이냐고 할 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그뿐 아니라 북한이 그런 식으로 뭔가 하려고 하는 걸 돕겠다는 태도를 중국 쪽에서 보여줬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4월 26일 발표된 공동 성명에 그와 관련된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기에 소련은 김일성의 방문 자체를 거부한 것으로 나와 있다. 만일 김일성이 이와 관련해 뭔가를 하려 했을 때 소련이 지원했을 것인가를 살펴보면, 그럴 의사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인도차이나 사태를 보면서 그렇게 발언한 건데, 강하다고 하면 강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그렇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홍석률 교수 같은 경우 이렇게 얘기하더라. 이때 김일성은 오히려 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왜냐하면 인도차이나 사태가 끝났다는 건 미국이 이제는 동북아 쪽으로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런 점에서 오히려 수세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발언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한다.

그런데 한국의 수구적인 성격이 강한 세력은 한말, 일제 시기, 해방 직후, 또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신계 움직임에 대해 취한 태도, 1961년 5·16쿠데타 때 취한 태도 같은 걸 보면 너무나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정신적,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사실은 물질적으로도 '우리가 취약하기 때문에 꼭 원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는데 특히 정신적으로 위기감을 잘 느끼는 것 같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작전권 같은 것에 대해 미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렇게 강하게 일부에서는 피력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을 반영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1975년 이때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남쪽이 군사적으로 조금도 열세라고 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미국이 있지 않나.

그런 건데, 적잖은 사람들이 인도차이나 사태에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유신 정권의 총력 안보 태세에 호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이 점에서도 운이 무척 좋은 사람인데, 1973년 10월부터 유신 반대 운동이라는 큰 도전에 직면했던 박 대통령이 유신 체제를 한꺼번에 수호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를 이 인도차이나 사태라는 것을 통해 잡게 된 것이다. 그것을 기민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박 대통령은 보여줬다.

인도차이나 사태를 계기로 몰아친 안보 광풍

ⓒ오월의봄
프레시안 : 이즈음 땅굴이 연이어 발견된 것도 많은 사람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았나.

서중석 : 1974년 11월 경기도 고랑포 부근 비무장지대에서 땅굴이 발견됐고 4개월 후인 1975년 3월 강원도 철원 부근에서 또 땅굴이 발견된 것도 김일성 발언과 함께 북한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면을 가져다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그러니까 유신 체제에 협력해 총력 안보 태세를 취해야 한다고까지 할 만한 상태였느냐, 그것이 문제다.

하여튼 안보 광풍이라고 일부에서는 표현하고 있는데, 총력 안보 궐기 대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사실 한국인의 상당수는 지금도 안보 문제, 북한 카드 같은 것에 일종의 조건 반사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나.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사안인데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점 때문에도 유신 체제에서 있었던 안보 바람 부분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1975년 5월 6일 자 조선일보를 보면 '휴일 없는 반공 궐기 총력 안보 기도회가 열렸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5월 7일 자를 보면 조계종에서도 안보 대회가 열린 것으로 돼 있다. 개신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그런 행사를 연 것이다.

그러면서 5월 9일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8개 대학에서 각각 교직원, 학생 등이 참여한 속에서 궐기 대회를 열었다. 여러 대학에서 참여한 인원이 4만여 명에 달한다고 신문에 보도됐다. 서울대 한심석 총장은 반공 궐기 대회에서 남부 베트남 패망의 교훈을 상기하는 궐기사를 낭독했다. 이날 이북 5도청, 서울시교육회, 전국버스택시화물자동차조합, 경성방직, 유일고무주식회사, 대한모방 같은 데서도 궐기 대회를 열었다. 또 38개 사회단체는 총력안보국민협의회라는 걸 결성했다. 11일에는 총력 안보 서울시민 궐기 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그러면서 혈서를 쓰고 김일성 화형식을 하는 안보 물결이 아주 크게 일어났다. 조선일보 기사 같은 걸 보면 학생들도 여기에 많이 참여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드디어 긴급 조치 9호가 5월 13일 선포됐는데, 그 이후에도 안보 궐기 대회가 여기저기서 계속 열렸다. 대학 교수 회의에서조차 국민 총화에 호응하자는 내용의 시국 결의문을 발표했다.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도 이때 안보 바람 속에서 태도가 크게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속에서 유신 정권은 유명한 4대 전시 입법이라는 걸 통과시킨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쉰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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