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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위해 애쓴 미국 대사들
[김기협의 냉전 이후] <40> 도널드 그레그와 제임스 레이니
1993년 10월부터 1996년 2월까지 주한 미국대사로 근무한 제임스 레이니(1927~ )는 특이한 배경의 인물이었다. 예일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육군에 입대해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한국에서 복무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신학-성직의 진로를 결심했다고 한다. 학부를 마친 후 예일 신학대에서 공부하고 감리교 목사가 된 후 1959년에서 1964년까
김기협 역사학자
2014.07.21 14:49:13
김영삼, '북핵 일괄 타결안' 반대한 이유는?
[김기협의 냉전 이후] <39> 북미회담 발전을 가로막은 한-미 군부의 역기류
1993년 7월 19일 제네바에서 제2차 북미회담이 끝날 때 양측 대표단은 두 달 후 제3차 회담의 재개를 기대하고 있었다. 재개의 조건인 북-IAEA, 북-남 관계가 순조롭게 풀리지 않음에 따라 회담 재개가 늦어졌다. 그런 가운데 북한 측이 '일괄협상안'을 점차적으로 구체화해서 내놓음에 따라 미국도 포괄적 타결을 차츰 더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10월
2014.07.14 15:48:07
'떼쓰는 애' 같았던 북핵 대응, 해결은 미국 몫?
[김기협의 냉전 이후] <38>미국 정책 거스르는 한국, 이것이 '자주성'인가?
소련과 공산권의 몰락이 '체제경쟁'의 패배에 기인한 것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체제경쟁의 초점은 경제력의 경쟁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세계는 호황을 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오랜 전쟁기간 동안 기술은 크게 발전해 있었던 반면 그 기술을 이용한 자원 개발이 부진했기 때문에 미개발 자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든 자본주의 체제든
2014.07.10 11:59:27
북핵 문제, 北이 경수로 제공을 받았다면?
[김기협의 냉전 이후] <37> "체제 보장만 해 달라.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
'경수로 제공'이 1993년 7월 제2차 회담 이후 북미회담의 초점이 되는데, 경수로의 의미에 대한 간결한 설명을 옮겨놓는다.경수로는 본래 산화중수소, 다시 말해 중수(重水)를 사용하는 원자로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핵반응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일반 물을 사용하는 원자로다. 경수로는 영변에서 가동 혹은 건설 중인 흑연 감속 원
2014.07.07 18:44:04
북한의 '핵무기 없는 핵카드', 누가 만들어줬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36> 북핵 문제, 북한만 책임질 일 아니다
1990년대 초반의 세계정세 변화 방향과 그에 임하는 북한의 사정과 자세에 대해 나는 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갖고 있다. 이 주제에 집중해 온 연구자 중에 나와 다른 관점을 보이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내 관점이 그분들과 다른 점에 대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일반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입장에서는 내 주관에 매몰되어 독자를 오도할 위험을 피하도록 주
2014.06.30 16:11:30
'미국 꼭두각시' IAEA는 어쩌다 미국에 어깃장 놨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35> 1993년 북미회담과 IAEA
1992년 1월 22일 북한 로동당 김용순 국제비서와 미국 국무부 아놀드 캔터 차관이 만난 뉴욕회담은 북-미간 최초의 고위급 공식접촉이었다. 반년 전부터 유엔가입 등 개방노선에 나선 북한에 대해 미국은 국제핵안전 지침 준수, 미사일 수출 중단, 한국과의 대화 촉구, 테러리즘 포기, 한국전쟁 때 미군 전사자의 유해 송환 등 요구사항만 있었을 뿐, 관계를 맺을
2014.06.26 11:52:04
북한이 '핵 카드'를 놓을 수 없었던 이유
[김기협의 냉전 이후] <34> 무시당하는 대신 적대적 반응을 택한 북한
1993년 7월 제네바 북미회담의 미국대표단 단장이었던 로버트 갈루치는 7월 16일 회의에서 북한 측이 내놓은 '경수로 제공' 조건이 가진 의미를 당시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당시에는 분명치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경수로 제안을 북한이 내놓았다는 것은 북한이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흑연감속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을 처음으로 암시한 것이었
2014.06.23 10:07:08
YS,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더니…
[김기협의 냉전 이후] <33> 100일도 안 되어 마음 바꾼 김영삼
1993년 3월 12일 북한의 NPT 탈퇴선언으로 비롯된 긴장은 탈퇴가 이뤄지기까지의 유예기간 만료 직전에 북한의 탈퇴 보류 선언으로 한 고비를 넘겼다. 갈루치 국무성 차관보를 단장으로 하는 미국 대표단은 북한의 상황이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북한이 원하는 양보를 해줌으로써 위기를 넘기고 다음 단계 대화의 장을 열 수 있었다.미국의 '양보
2014.06.16 10:24:20
"주권 존중? 북한에 넘어간 것 아닌가"
[김기협의 냉전 이후] <32> 미국 국무부 '한국통' 퀴노네스의 고역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NPT 탈퇴에는 3개월의 유예기간이 규정되어 있다. 6월 12일 이전에 탈퇴선언을 취소하지 않으면 공식적 탈퇴가 되는 것이다. 결국 북한이 6월 11일에 북-미 공동성명과 함께 탈퇴 연기를 발표함으로써 위기가 한 차례 수습된다. 오늘은 그 과정을 살펴보겠다."한 번 만들어진 조직은 그 유지와 확대를 위
2014.06.09 14:07:29
김영삼이 원한 건 '북핵위기'의 지속이었나?
[김기협의 냉전 이후] <31> 남북관계 파탄 낸 YS 정권과 대결주의의 승리
북한은 1991년 중엽 유엔 가입 결정으로 시작해서 개방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남한과 미국이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 팀스피릿훈련 중단 등 이에 호응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얼마 동안 북한의 국제사회 진입이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다가 1992년 중엽 IAEA 사찰을 계기로 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IAEA의 특별사찰 요구, 팀스피릿훈련 재개방침 발표, 남한
2014.06.05 14:5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