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2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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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에 대한 열광, '마취'가 없었다면…
[근대 의료의 풍경·29] <제중원> 보고서 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제중원 진료의 하이라이트는 외과였다.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본 것처럼 내과계 질병에 대해서는 근대 서양 의학도 별다른 대처 수단을 갖지 못했던 시대였다. 파스퇴르(Louis Pasteur·1822~1895)와 코흐(제28회) 등에 의해 세균성 전염병의 정체와 원인이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기생충과 동거는 일상생활…그 해결책은?
[근대 의료의 풍경·28] <제중원> 보고서 ④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나와 있는 소화기계 질병은 소화 불량(dyspepsia and indigestion), 설사, 이질, 치질, 항문누공, 회충, 유구조충(보고서에는 "Tinea Salium"이라고 되어 있는데 "Taenia solium"을 잘못 적었을 것이다) 순이다. 당시에는 별다른
조선을 덮친 '오래된 역병'…그 대응은?
[근대 의료의 풍경·27] <제중원> 보고서 ③
살바르산 606이 개발되기 전에 매독 치료제로 가장 많이 썼던 것은 수은과 발열 요법이다.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매독에 걸려 죽었고, 또 수은으로 치료를 받다 수은 중독 때문에 죽었다. 모차
<제중원>의 성병 환자는 어떻게 치료했을까?
[근대 의료의 풍경·26] <제중원> 보고서 ②
남아메리카 페루(잉카)의 원주민이 오래 전부터 말라리아와 같은 열병 치료에 사용하던 기나 나무껍질이 유럽에 도입된 것은 1630년대였다. 그리고 200년쯤 뒤인 1820년에 프랑스의 약사 펠레티에(Pierre Joshep Pelletier)와 카방투(Joshep Bienaime Caventou)가 기나 나무
<제중원>에 말라리아 환자가 많았던 이유는?
[근대 의료의 풍경·25] <제중원> 보고서 ①
해링턴은 알렌의 조선에서의 활동을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하느님, 마몬(재물의 신), 일본인" 등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했다고 했는데(제23회), 거기에 "기록자(chronicler) 알렌"이라는 칭호 한 가지를 더 붙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알렌은 <Korea : Fact and Fancy&g
<제중원> 의사들이 권총 차고 나선 사연은…
[근대 의료의 풍경·24] <제중원>의 환수
구리개 제중원은 1894년 9월에 에비슨에게 운영권이 이관되었다가 10년 반이 지난 1905년 4월에 대한제국 정부로 환수되었다. 일부에서는 그 사이에 정부가 제중원을 환수하려는 의사가 없었다고 하지만, 제중원을 되돌려 받으려는 계획은 1895년과 1902년, 두 차례 있었던
헌법재판소 <제중원>의 뒷 이야기는…
[근대 의료의 풍경·23] <제중원>의 이전 ③
이번 회에서는 우선 구리개 제중원 사진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재동 제중원의 뒷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구리개 제중원 사진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해링턴(Fred Harvey Harrington)의 저서 <God, Mammon, and the Japanese>(1966년)
<제중원>이 '명동길'로 옮긴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22] <제중원>의 이전 ②
알렌이 국왕에게 직접 제안한 시점이 외아문 독판 서리 서상우에게 공문을 보낸 1886년 8월 14일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번에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신임하는 국왕의 힘을 빌려 새 병원 이전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렌이 고종에게 서울 '소공동'을 요구한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21] <제중원>의 이전 ①
여성 전용 병원의 설치를 의미하는 재동 제중원의 제2차 확장(제19회)이 마무리된 시기는 엘러스가 조선에 도착한 전후일 것이므로 1886년 7월 초쯤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14일에 알렌은 외아문 독판 서리 서상우(徐相雨)에게 공문을 보내 제
미국에서 온 <제중원> 여의사는 '가짜' 의사?
[근대 의료의 풍경·20] 최초의 여의사 엘러스의 정체
1886년 7월 4일 엘러스(Annie J Ellers·1860~1938)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일할 헐버트 부부, 길모어 부부, 그리고 번커와 함께였다. 독신으로 조선에 온 엘러스와 번커(Dalziel A Bunker·조선식 이름은 房巨·1853~1932)는 꼭 1년 뒤 부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