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30일 2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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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봉이'를 아시나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⑪
임방규와 김창근, 병사(病舍)에서 만나다 대부분의 사상범이 그렇듯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좌익수들의 생활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주요 정치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사상 전향 공작은 한층 간교해졌다. 장면 정부와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 행해진 사상범에 대한 처우와 공안 탄압이 대표적인 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1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
"바늘로 온몸 찌르고, 걸핏하면 몽둥이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⑩
'무기수' 임방규, 푸른 죄수복을 입다 임방규를 포함해 무기수로 감형된 7명의 사형수들이 오후 늦게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사복을 벗고 푸른 죄수복으로 바꿔 입은 임방규는 그제야 '사형을 면했구나'라며 안도했다. 무기수 이하만 죄수복이 지급됐고, 곧 처형될 사형수는 사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임방규가 있는 동안 대전교도소에서는 총살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노학자 "한국 우경화, '친일파' 박정희가 뿌리"
[인터뷰 기고] 사토 쇼진 "위안부 한일협정에 분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회담을 보면서 아주아주 분했다. 아베는 사죄하지 않았고, 일본은 알량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굉장히 절망스럽고 화가 났다" 일본인 역사학자 사토 쇼진(佐藤 正人·74세) 씨는 2일 인터뷰에서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한국의 자화상을 지난해 12월 합의된 '최종적, 불가역적’ 한일회담
명당 집 자손이라서? "나는 결국 총살을 피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⑨
총살 집행 현장과 美고문의 확인 사살 빨치산 사형수들에게는 수정(手錠)을 채웠다. 대부분 앞 수정을 찬 것과 달리 일부는 뒤 수정을 찬 채 꽤나 불편하게 움직였다. 아마도 감방 내에서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임방규는 뒤늦게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터라 수정이 부족해 손목을 채우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취침 시에도 수정을 찬 채 잠을 잤다. 이 때문에 조
"영양실조에 쥐 잡아먹었더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⑧
포로수용소 내 변절자, 그리고 탈출 사건 하루는 미군이 먹던 통조림을 포로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그런 날은 필시 상부의 검열이 있거나, 기념일 또는 광주 지역 유지들이 수용소를 찾은 날이다. 하지만 방문객이 가고나면 통조림은 모두 회수됐다. 천막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길게 잠자리가 들어서 있고, 막사 한가운데에는 흙을 고른 뒤 난로가 설치됐다. 하지만
"쥐까지 잡아먹었지만, 결국 굶어 죽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⑦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고통 조선대학교 정문 건너 편(광주 동구 서석동)에서부터 전남대학교병원(광주 동구 학동)까지 길게 늘어선 광주 포로수용소(남광주 수용소)에는 빨치산 패잔병으로 넘쳐났다. 나무 널빤지와 천막을 올려 엉성하게 늘어뜨린 막사에는 김창근을 비롯해 수많은 포로들이 곧 있을 죽음을 기다렸다. 차가운 맨바닥을 고른 뒤 그 위에 짚을
"빨치산에게 굶주림보다 무서운 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⑥
한국전쟁의 애환이 묻어있는 '한정당' 김창근이 좌익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종형님의 영향이 컸다. 그의 사촌형인 김택근(전쟁 전 사망)은 왜정 때부터 공산당 조직원이었고, 김영근(당시 22세)은 전쟁 전부터 좌익 활동을 했다. 김영근은 전쟁 중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뒤 본인의 뜻에 따라 북송된 이후 소식이 끊겼다. 방호산 부대(인민군 6사단)가 순창에 내
인민군에 징집된 그 청년, 살아남았을까?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⑤
가슴 메이는 이름 '쌍치'…'돌고개' 전투 전북 순창군 쌍치면. 누군가에게 '쌍치'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메이는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과 군경이 번갈아가며 장악했고, '해방구(解放區)'란 이유만으로 수많은 이들이 학살됐다. 좌우 이념대립의 정점에서 애먼 주민들만 통곡의 피를 흘린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양민 학살이 그러했듯 이곳 역시 군경에 의한 학살
"니가 뭔데 사람을 패!"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④
기포병단 '기차 전복' 작전 1951년 9월 병단의 규모가 컸던 기포병단은 전남도당의 요청으로 영광 불갑산 지원 작전을 폈다. 전남도당 인민유격대 불갑지구사령부는 이곳에 본거지를 두고 전남 서북권을 관할해왔다. 하지만 1951년 2월20일(음력 1월15일) 이른바 '불갑산 대보름작전'이 전개되면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이뤄졌고, 군경토벌대는 이 지역을 완전히
소설 <남부군>, 실제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북도 순창 ③
덕유산 '송치골 회의', 그리고 빨치산 재편 빨치산 병력은 수시로 재편됐다. 그만큼 전선의 변화가 극심했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녹음이 짙푸르던 1951년 8월의 일이다. 남부지구(회문산 일대) 역시 군경에 의한 대공세가 이뤄지자 병단을 사단제로 개편한다. 기포병단은 407연대, 카츄사병단은 408연대로 바뀌었고, 두 연대가 합쳐져 46사단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