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제 분류상 철학자이고 인문학자이지만, 철학과 인문학의 중요성을 마구 강조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좀 의아스러워하는 편이다. 사실은 독자적인 인문학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확신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학문이라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지적인 탐구이고 우리의 삶이 그 세계의 일부로 이루어지는 한, 인간에 대한 탐구는 세계에 대한 탐구와 연동되어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인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느냐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우선적인가? 인간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바뀌는가, 아니면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서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는가?
인간관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순수한(?) 철학자나 인문학자보다는 과학자였던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갈릴레이나 다윈을 보라. 당시의 지식인들이 대개 그렇듯, 두 사람 다 보통 이상의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고 있었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뒤바꾼 것은 그들의 과학적 탐구 결과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근대 이후 이런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한다든지 어떤 초월자와 연결 지어 이해하는 방식은, 비록 여전히 영향력이 있다 해도, 이데올로기적이고 기생적(寄生的)인 데 그친다. 단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지배적인 인간관은 지배적인 과학적 지식의 함수다.
물론 인문학의 중요성을 내세우는 주요한 이유가 몰(沒)가치적인 요즘의 세태, 더 정확히 말하면 경제적 가치만을 내세우는 부박(浮薄)한 세태에 저항하는 데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또 성급한 환원주의로 인해 쉽게 무시되어 버리곤 하는 다양한 문화적 터전과 산물을 그나마 보호하고자 하는 데 있다는 점도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를 위해서도 인문학은 인문학의 테두리 내에 갇힐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소칼(Sokal) 사건에서처럼 인문학을 일종의 지적 사기로 매도하는 취급을 당할지 모른다. 자연과학자가 그 사회적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어야 하듯이, 인문학자도 책임 있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는 제반 과학의 탐구 성과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
고집불통 인문학자와 뇌 과학
▲ <인문학에게 뇌 과학을 말하다>(크리스 프리스 지음, 장호연 옮김, 동녘 펴냄). ⓒ프레시안 |
이 책엔 저자가 상대하는 인문학 교수가 한 사람 등장한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고집불통'의 여교수다. 그녀는 신경과학에 맞서 인문학 나름의 방법과 가치를 고수하고자 하지만, 가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줄도 안다. 이 책은 뇌 과학자이고 신경심리학자인 저자가 근래의 뇌 과학이 이룩한 성과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인식하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인문학 여교수는 이런 설명에 흥미를 돋궈주는,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기특한(?) 상대 역할을 한다.
뇌 과학은 1990년대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분야로 알려져 있다. 뇌를 스캔하는 장비(주로 기능성 자기공명 영상 장치 : fMRI)와 기술이 밑바탕이 되었다. 우리가 생각을 하거나 활동을 할 때 뇌의 어떤 부위가 활성화하는지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활성화의 자세한 메커니즘이나 구조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뇌의 활동 방식이나 기능, 예컨대 기억 메커니즘 등에 대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밖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뇌의 활성 부위를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여러 종류의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괄목할 만하게 달라졌다. 국내에도 이와 관련된 많은 책자들이 나와 있는데, <인문학에게 뇌 과학을 말하다>도 그 중의 하나인 셈이다.
이 책이 뇌 과학에 관한 다른 책들에 비해 아주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읽기 쉽고 논의의 초점과 줄거리가 분명하며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서는 철학자들의 이름이 거의 거론되지 않지만(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나 카를 야스퍼스 등이 신통찮은 주장을 한 예로 등장할 뿐이다), 과거에 철학자들이 다루었던 문제가 꽤 선명한 형태의 주장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근대의 주요 철학 분야였던 인식론은 뇌 과학이나 신경심리학 쪽으로 거의 넘어가 버린 느낌이다. 하긴 철학자들이 다루던 영역이 새로 생겨난 개별 과학의 대상이 된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인간 지식의 진보라는 면에서 보면, 이런 사태는 아쉬워할 일이 아니라 반기고 환영해야 할 일인 줄 안다.
뇌가 세계를 만든다
이 책의 중심 주장은 우리가 보고 인식하는 세계란 뇌가 만들어내는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대뜸 칸트를 생각나게 하는 견해다. 근대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칸트는, 인간이면 누구나 세상을 똑같은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묻고, 그 답을 인간이 가지고 인식 능력에서 찾았다.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이 작용하는 바에 따라 인식하게 된다는 얘기다. 칸트는 이 인식 능력을 해명하려고 감성(感性)이니 지성(知性)이니 범주(範疇)니 하는 어려운 개념들을 도입했다.
그런데 이제 현대의 신경심리학은 이런 것들을 뇌의 기능을 통해 설명해 낸다. 뇌가 만들어내는 세계도 칸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세계와 직접 접촉하여 세계를 알아낼 방도가 없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우리의 뇌가 알려주는 것인데, 뇌는 신경을 통해 주어진 자극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고 변형하여 의식에 전달한다. 이 의식을 지닌 우리가 바깥의 세계와 직접 접촉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뇌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환상이요 착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뇌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모습이 제멋대로라는 것은 아니다. 뇌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모형을 만들어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우리의 활동을 통해 들어오는 신경 정보를 매개로 그 모형을 계속 수정한다. 덕택에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데 유용한 지표로 삼을 수 있다.
뇌 과학에 관한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특기할 만한 내용은 '베이스의 정리'다. 이것은 18세기 영국의 목사였던 토머스 베이스가 제시한 확률론의 공식인데, 이 공식은 우리가 새로운 증거를 접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기존의 믿음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야 하는지를 나타낸다. 우리는 빈약한 증거는 무시하고 유력한 증거는 증폭해서 받아들여 우리의 믿음 체계를 수정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 뇌는 이런 과정을 계속적이고도 신속하게 수행해서 우리가 이렇게 조정된 세계 모형을 통해 잘 행동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의 의식과 뇌는 같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 뇌는 알지만 의식적 존재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뇌가 감지한 어떤 정보를 통해 공포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뚜렷이 의식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뇌가 처리하는 일은 엄청나게 많다. 그 중 의식에 알려지는 것은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일부만이다.
하지만 의식 또한 뇌의 기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의식은 뇌의 어느 부위에서 생겨나는 걸까? 이것은 <이중나선>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크릭 같은 학자가 오랫동안 매달려서도 풀지 못한 문제이다. 의식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그래서 아직 중요한 철학적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뇌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무시하고는 만족스런 해결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자유 의지는 존재하는가?
특히 우리가 의식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자유 의지의 문제는 1983년의 유명한 리벳 실험 이후에 새삼스런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 실험은 아주 단순하다. 피험자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린다. 이때 피험자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체크된다.
그런데 실험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험자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려는 충동을 느끼기 전에 손가락을 들어 올릴 것을 알려주는 뇌 활동이 먼저(약 0.3초 전에) 일어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전에 우리의 뇌가 이미 선택을 내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이렇게 단순한 선택에서마저 의식의 결정이 사후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자유 의지는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 기능이 만들어내는 착각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 프리스는 자아라는 감각조차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스스로를 독자적인 행위자로 경험하는 것조차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변수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복잡한 관계망 중 일부일 뿐이다. 만일 이런 주장이 납득할 만한 증거를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나의 뇌는 왜 내가 스스로를 자유로운 행위자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이런 경험의 이점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잠정적인 답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어 나가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율적인 행위자라고 보아야 처벌과 보상 따위를 통해 협력적 관계를 조정하는 일이 용이해진다.
물론 이런 식의 주장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또 따지고 보면 그렇게 새로운 주장인 것도 아니다.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도 이것과 아주 유사한 주장을 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은, 쉽게 부인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경험 과학적 근거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런 주장들을 좀 더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의 견지에서는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인문학의 토대에 대한 문제제기이지 않은가. 만일 우리의 통념을 바꿀 필요가 생긴다면, 그러한 변화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생각을 하고 산다는 사실에 값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란 무용지물이 아니겠는가.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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