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공자가 조정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가 마구간이 불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공자는 다친 사람이 없는지를 물으셨고 말(馬)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논어> '향당' 편)
마구간은 말이 사는 곳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는 마구간이 불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말이 몇 마리나 불에 타 죽거나 다쳤는지를 걱정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2500여 년 전 이야기이니 마구간에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노예에 가까운 아랫것들만 있었을 테고 말 한 필 값이 사람 몇십 명 목숨보다 더 컸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자는 이상하게도 사람이 다치지 않았는지만 물었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을 인본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 한복판에서 사람에 대해 묻지 않고 말에 대해서만 묻는 일이 일어났다. 국제 무역수지 12~3위를 오르내리는 경제력에다 UN 사무총장도 배출한 나라, 이젠 G20 의장국이라고 으스대면서 국격(國格)이라는 이상한 말까지 만들어 국가의 품격을 강조하는 나라에서 말이다.
사람들이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뉴타운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는 만화 같은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더니 마침내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 없다고 저항하던 평범한 사람들을 폭도로 몰아 다섯 명이나 불태워 죽인 용산 참사. 그들은 2009년 1월 19일 살기 위해 남일당 건물 옥상에 지은 망루에 올라갔고 그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출근하던 시간에 경찰특공대의 무차별 강제 진압 과정에서 한 명의 경찰특공대원과 함께 불에 타 죽었다. 그 뒤 정부의 사과 한마디 없이 철거민 다섯 명의 시신이 1년 가까이 냉동고에 방치되었다가 2010년 1월 9일에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 참사로 사망한 철거민은 이성수(51세), 윤용헌(49세), 이상림(72세), 양회성(58세), 한대성(54세)이다. 폭도 치고는 나이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자본주의 욕망의 꽃, 재개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힘은 자본이며 자본은 더 많은 잉여가 보장되는 곳으로 몰려간다. 어떤 때는 주식으로 몰려가고 어떤 때는 부동산으로 몰려가면서 더 많은 소유를 꿈꾼다. 그 가운데 부동산이 주식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1970년대 일었던 강남 개발 붐, 198~90년대의 수도권 신도시들, 그리고 오늘날 용산 참사로 나타난 재개발 붐이 모두 그러한 욕망의 결과이다. 특히 건설 경기의 침체와 함께 새로운 건물의 분양을 통한 이익이 적어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도심 재개발 사업이었다.
재개발은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에 의해 진행되다가 이제는 뉴타운특별법이라고도 불리는 '도시재정비촉진을위한특별법'을 근거로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조치에는 강남에 대한 강북의 균형 발전이라는 의미와 함께 낙후된 시설을 새롭게 바꾼다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재개발조합을 구성하는 토지와 건물 소유자들, 그리고 건설 회사의 이익이 우선되면서 그곳에 거주하던 세입자들이 벼랑 끝으로 몰려나는 데 있다. 이번 용산참 사의 경우도 오순도순 꿈을 키우던 보금자리를 잃고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철거민과 이를 지원하러 온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을 용역 직원들과 진압 경찰이 강제로 몰아내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본래 용산이라는 지명의 유래에는 용이 나타났다는 설과 산줄기가 구불구불 뻗어나간 모습이 용 같다는 설이 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무악재 부근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서울역 뒤 약현과 만리동 고개를 지나 한강변까지 이어지면서 용이 머리를 한강에 넣고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용산 화재는 서울 전체 등성이들의 화재인 셈이다. 이른바 산동네라고 불리는 지역이 대부분 용이 꿈틀대는 지세의 연결점이며 오늘날 재개발 대상 지역들이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여기에 26~40층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 6개동을 짓겠다고 하면서 보상이 적다고 반발해 온 세입자들을 2008년 11월부터 강제로 철거시키기 시작하였다. 재개발조합은 세입자들에게 법적으로 규정된 휴업보상비 3개월분과 주거 이전비 4개월분을 지급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상액으로는 대부분의 세입자들이 기존의 생계와 주거를 이어갈 수 없었다. 따라서 890명 가운데 100여 명이 보상을 거부한 채 임시 상가 등의 대책 마련을 내세워 시위를 계속해왔다.
그런데 정부는 UN에서도 금지하고 있고 서울시 또한 금지하는 행정 지침이 있음에도 겨울철 강제 철거를 감행한 것이다. 더구나 경찰은 농성장에 다량의 가연성 물질이 있어 대형 화재의 위험성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방차나 화학차를 배치하지 않은 채 서둘러 진압에 나섰다. 당시 6층짜리 남일당 상가 건물 옥상에는 30여 명이 농성 중이었고, 3개 중대 300여 명의 경찰특공대와 철거 용역이 물대포를 쏘며 진압에 나선 시각은 6시 15분이었다. 6시 45분 경찰은 특공대를 컨테이너에 태워 옥상으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는 한 시간 뒤인 7시 45분 불이 붙은 망루가 무너져 내렸다. 철거민들은 왜 과격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으며 전철연 같은 전국 조직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일까? 그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요 폭도들이었을까?
용산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 <내가 살던 용산>(김성희 외 글 그림, 보리 펴냄). ⓒ프레시안 |
정말 만화 같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7월에는 서울경찰특공대가 대테러 종합전술훈련을 하면서 용산 참사 현장을 재연해 놓은 듯한 훈련을 했다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망루에 불을 내 경찰관을 숨지게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4명의 피고인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가 기각 당하였고, 경찰 핵심 지휘관들의 진술조서 등이 포함된 3000여 쪽의 수사기록을 변호인에게 공개하지 않아서 제대로 변론을 할 수 없다며 재판 중지를 요청했던 변호인들이 마침내 법원의 결정에 불복하면서 변론을 거부하여 국선변호인들에게 사건이 맡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진통 끝에 2010년 1월 9일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주재로 8854명의 자발적인 장례위원들의 참여 속에 희생자 5명의 범국민장이 치러져 모란공원에 모셔졌다.
이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보상 합의와 장례는 끝났지만 재판이 남아 있고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2010년 2월 9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당시 '경찰력 행사가 위법의 단계'였다는 의견을 서울고법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용산 참사 수사를 지휘한 검찰 특별수사본부장과 수사참여 검사들에 의한 조사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 행위가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검찰총장에게 "특별수사본부장을 주의 조치할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권고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진행이 늘 그러했듯 언젠가 반드시 진상이 밝혀질 것임을 알고 있다.
얼마 전 이 글을 쓰기 위해 용산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한 검색 포탈 엔진에서 어떤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의 '용산 참사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올라온 답 글을 읽고 한순간 기가 막힌 적이 있었다. 아래에 인용한 그 글은 장례식 직후에 올라온 글이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용산역 앞에 좀 허름한 동네가 있어요. 그 동네(지역)가 재개발한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재개발 하려면 새 건물 같은걸 만들어야 겠죠? 그러면 거기 있던 건물들은 부셔야 하는데 그 건물에 살고 있던 전세, 월세(집 빌려서 사는것) 사는 사람들 즉, 그 건물의 주인도 아닌 사람들이 돈 좀 벌고 싶어서 자기들은 자기가 빌려서 살고 있는 곳에서 못나가겠다 돈 내놔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이렇게 억지 부리고 안 나가고 시위하고 그러니 경찰들을 동원해서 막으려 하는데 어떤 건물에서 시위하던 사람들이 화염병을 던진 거예요. 그래서 시위하던 사람들하고 경찰이 죽었어요. 이게 '용산 참사' 이에요. 그 후 그때 자기들이 던진 화염병에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이 그 시위하던 건물에서 뻐기면서 죽은 사람 피해 보상해라 하다가 결국 돈 받고 그 건물에서 나갔죠. 간단히 정리하면 재개발 하는데 자기 돈 좀 벌고 싶어서 쌩쇼 하다가 죽은 사건입니다.
물론 자신의 견해를 답으로 쓴 것이겠지만 이 글을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죽은 사건을 놓고, '재개발 하는데 자기 돈 좀 벌고 싶어서 쌩쇼 하다가 죽은 사건'이라니. 삶의 터전을 뿌리째 뽑힌 사람들의 마지막 저항을 어떻게 이토록 폄하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람에 대해 묻지 않고 말에 대해 묻다니? 아니다. 이런 생각이 나오는 까닭은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5명의 희생자가 바로 우리 곁에 있던 평범한 이웃이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리는 길은 무엇일까?
영화를 보고 우는 사람들은 많다. 소설을 보다 울기도 하고 시를 보고 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만화를 보고도 울음이 나온다. 만화 같은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낸 <내가 살던 용산>(김성희 외 글 그림, 보리 펴냄). 6명의 만화가가 유가족들을 만나고 수감된 분도 만나서 진솔한 얘기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 눈시울을 젖게 한 만화. 이 만화를 보고 나면 다시는 말(馬)에 대해 묻지 않을 것이다.
이성수(51세), 윤용헌(49세), 이상림(72세), 양회성(58세), 한대성(54세) 다섯 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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