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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 사라진 적십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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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 사라진 적십자병원

[복지국가SOCIETY] "공공의료 마지막 보루가 흔들린다"

인도주의를 내세우는 적십자사

요즘 대한적십자사의 홍보물을 지하철역에서 자주 본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시절 적십자 회비를 모금하기 위한 포스터를 다시 사용해 만든 홍보물이다.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된 어린 아이를 적십자사가 안아주고 있는 이 그림은 '인도주의 정신'을 상징한다. 여기에 "삼천만은 다같이 회원되자"는 구호가 붙어 있다. 적십자사의 인도주의에 모든 국민들이 동참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적십자사는 한국전쟁이라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내세우며, 2010년 적십자사 회비를 납부하도록 독려하는 의미에서 다시 이 포스터를 들고 나온 것 같다.

▲ 대한적십자사 포스터.

'적자'를 이유로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내치는 적십자사

설 연휴가 끝난 지난 17일부터 대구적십자병원 노동조합은 서울로 올라와 대한적십자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적십자사가 대구병원을 폐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기 때문이다. 2월 24일이 되면 그나마 일하던 두 명의 의사도 계약이 만료되어 병원을 떠나게 되어 사실상 문을 닫게 된다. 이런 일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적십자사는 전국의 6개 적십자병원을 평가하면서 서울병원과 대구병원에 대해 축소하거나 폐원하는 조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경영상 적자가 난다는 이유였다. 2008년의 경우 서울적십자병원은 약 9억원, 대구적십자병원은 약 12억 원의 적자가 났다.

그러나 적십자병원에서 발생한 이와 같은 적자는 당연한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행려환자, 새터민,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같이 이윤을 쫓는 민간병원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의 치료를 담당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의 47.4퍼센트, 대구적십자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의 68.4퍼센트가 빈곤층의 의료급여 수급자였다. 더군다나 이런 어려운 사람들을 진료하고 환자가 내야 하는 치료비는 적은 병원이었다. 100원 짜리 진료를 한 경우 민간 종합병원에서는 환자가 36원을 부담해야 하지만, 적십자병원에서는 환자가 19원만 내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적십자사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운영하는 병원에서 적자가 발생하는 것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상대학교 정백근 교수는 적십자병원의 환자진료 수입을 분석한 결과를 보며, "만일 적십자사에서 치료받은 환자들이 다른 민간병원과 같이 중산층 이상의 건강보험 환자였다면 적십자병원은 흑자를 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 가난한 사람들과 행려환자, 새터민,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같이 이윤을 쫓는 민간병원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의 치료를 담당하는 게 적십자병원의 할 일이다.

국민이 낸 적십자회비 중 적십자병원 지원 1%도 안 된다

적십자병원이 적자가 나는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이 있다. 대한적십자사가 적십자병원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2008년의 경우 대한적십자사는 6개 적십자병원에 대하여 3억6500만 원을 지원했다. 이는 2008년에 국민이 낸 적십자회비 479억 원의 1퍼센트도 안 되는 규모였다. 적십자병원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라는 점에서 적자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대한적십자사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적십자사는 병원에 대한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면, 대한적십자사는 6개 병원에서 적자가 발생하는 이유,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진료를 위한 불가피한 적자였음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앞으로 재정적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의지와 계획을 내놓아야 했다. 그랬다면 적십자회비 납부에 더 많은 국민들의 참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는 적자가 났다고 대구병원을 폐원시키려 하고 있고, 심지어 병원 직원들의 임금을 무려 10개월 치나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게 '인도주의'를 내세우며 적십자 회비를 납부해달라고 독촉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의사와 환자를 내쫓고 병원 노동자의 임금을 체불하는 등 인도주의를 짓밟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말이다.

정부의 무관심과 방관도 적십자병원 폐원의 원인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정부는 뒷짐을 진채 바라만 보고 있다. 사실 '적십자병원'도 정부가 책임지는 '공공병원'으로 분류된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에는 공공병원이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시장주의 의료체계가 갖추어진 미국에서도 공공병원이 20퍼센트가 넘는데, 우리나라는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공공병원을 늘려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진 못할망정,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공공병원이 문을 닫는 상황을 바라만 보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권, 치료받을 권리를 책임지지 않는 행동에 동참하는 꼴이다.

정부는 적십자사에게 대구병원과 서울병원을 정상화하도록 촉구하고, 병원에 대한 재정지원을 확대하도록 촉구하는 동시에 정부 차원의 지원방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적십자사는 재정지원 확대하고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병원발전위원회 꾸려야

지금 대구적십자병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2월 24일 근무하던 두 명의 의사마저 대구적십자병원을 떠나게 되면, 더 이상 환자를 볼 수 없어 사실상 문을 닫는 상황이 된다. 그동안 대구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저소득층과 외국인 노동자, 새터민들은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를 막아보자고 노동조합원과 직원들이 대한적십자사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대한적십자사의 재정지원을 확대하여 병원을 정상화할 것, 체불된 임금을 지급할 것, 병원의 발전전략을 직원들과 함께 세울 것, 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의 반응은 매우 냉랭하다.

사실 적십자병원은 대한적십자사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며, 공공의 자산이다. 국가적 지원이 있었고, 대한적십자사가 어려운 계층에게 의료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한 사회적 임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이런 점에서 적십자병원은 대한적십자사가 단독으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대한적십자사는 국민 앞에 두 가지를 내놓아야 한다. 우선, 국민이 납부하는 대한적십자사 회비 중 7% 이상을 병원에 지원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이 정도가 되어야 적십자병원이 적자를 발생하지 않고 정상적 운영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전제로 시민사회, 정부, 적십자사가 참여하는 '적십자병원 발전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시민의 병원으로 적십자병원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대책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와 같은 결론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하고 서로 책임져야 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과정이 될 때 국민들은 대한적십자사의 의미, 적십자병원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적십자 회비 모금 운동의 방법이 있을까?

유종하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작년 말 국회 국정감사에서 적십자병원을 없애지 않고 정상적으로 운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와 같은 발언은 국민과의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을 책임 있게 수행하기를 촉구한다. 최근 네티즌과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인터넷에서 '대한적십자사 회비 납부 거부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89319)

병원의 폐원과 축소를 반대하며, 적십자병원을 정상화하지 않는다면 적십자 회비 납부 거부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겠다고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운동이 시작된다면 대한적십자사의 반인도주의적 행태는 그대로 폭로되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한적십자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유리할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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