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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왜 몰락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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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왜 몰락했나?

[망국 100년] 근대화의 트라우마 ① 프랑스와 독일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가 앞 회에서 이야기한 인클로저 현상이라는 데는 대다수 연구자가 동의한다. 중세 체제에서 벗어난다는 산업화의 기본 의미에도 적합하다는 점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근 500년에 걸쳐 진행된 인클로저 현상은 영국 사회에 많은 갈등과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보상이 19세기 대영제국의 패권이었다고 흔히 얘기한다. 나는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긴 시간에 걸쳐 완만한 전환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여러 종류 선택의 기회를 누림으로써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영국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인클로저 현상의 진행에는 영국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별로 작용하지 않았다. 영국 내부의 조건에 따라 진로가 결정되었다.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을 때는 속도를 늦출 수도 있었고, 두 갈래 이상의 길이 보일 때는 정치사회적 조건에 따라 선택할 여지가 있었다. 근대화의 진통을 겪기는 했지만 외부 조건 때문에 불필요한 고통이나 왜곡을 겪은 것은 가장 적었다고 할 수 있다.

후발국들은 다른 사정이었다. 선발 산업국과의 경쟁 상황에 몰려 산업화를 모색하게 된 후발국들은 경쟁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경쟁을 빨리 따라잡기 위해 내부 조건을 억눌러 가며 억지로 산업화 정책을 추진해야만 하는 상황을 많이 겪었다. 영국 다음으로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인 프랑스와 독일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경쟁의 압력이 극심했던 사정을 알아볼 수 있다.

대혁명(1789) 이전의 프랑스 정치사회 체제를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이라 부른다. 이 앙시앵 레짐은 매우 안정성이 높은 체제로서 한 세기 이상 유지되어 온 것이었다. 정치 체제와 사회 체제가 강력하게 결합된 것이어서 정치나 사회 어느 한 방면에서 변화의 필요가 제기되어도 두 방면의 변화가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안정성이 높았던 것이었다.

이 체제는 태양왕 루이 14세(1643~1715) 초년에 구축된 것이었다. 17세기 초반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 국력 성장을 중심으로 변화가 많은 시기였고 왕권과 귀족 세력 사이의 갈등이 증폭된 시기였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잉글랜드 내전(1641~1651)을 통해 왕권이 몰락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프롱드'(Fronde)라 불리는 1648~53년의 항쟁 사태를 진압함으로써 왕권이 안정되었다. 파를러망(parlement·지방재판소) 프롱드와 귀족 프롱드의 두 단계로 파악되는 프롱드 사태는 봉건적 기득권을 왕권으로부터 지키려는 항쟁이란 점에서 잉글랜드 내전과 통하는 성격이었는데, 이것이 진압됨으로써 프랑스 절대왕정이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앞서 리슐리외가 궤도에 올려놓은 중상주의 정책을 굳건히 밀고 나감으로써 앙시앵 레짐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 재력으로 당시 유럽에서 독보적인 40만 상비군을 조직했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결합은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가져왔고, 귀족 세력은 왕권에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1695년의 인두세와 1710년의 십일조는 귀족층의 전통적 권익을 명백히 침해하는 것이었지만 아무 저항이 없었다.

체제가 안정된 만큼 프랑스는 변화에 소극적이었다. 인클로저처럼 뚜렷한 농촌 분화 현상이 프랑스에는 없었다. 1710년 10퍼센트였던 도시 인구 비율이 1789년 15퍼센트에 이른 정도였다. 1770년 영국의 석탄 생산량이 600만 톤이었는데 프랑스는 70만 톤이었다.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이 제조업 발전을 전연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처럼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1740년대부터 프랑스에는 변화의 필요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의 주체가 없었다. 절대화된 권력을 쥐고 있던 국왕은 앙시앵 레짐에 집착했다. 왕권에 대항할 실력을 가진 두 집단, 귀족층과 신흥 부르주아지는 영국에서처럼 연대하지 못하고 서로 견제했다. 효율성을 잃은 채 견고성만을 지키고 있는 앙시앵 레짐의 배경 위에서 현실에 충분히 반영될 수 없었던 개혁 욕구는 계몽사상이라는 형태로 펼쳐졌다.

이 글에서는 프랑스혁명을 개관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과의 경쟁의 압박이라는 한 가지 측면만을 밝히고자 한다. 앙시앵 레짐 기간 내내 프랑스는 영국과 긴장 상태에 있었다. 1740년대 이후 재정 문제의 가장 큰 원인도 7년전쟁(1756~1763)을 비롯한 영국과의 만성적 전쟁 상태에 있었고, 미국 독립전쟁 개입으로 결정적 파탄에 이르렀다.

생산력만으로 볼 때 18세기의 프랑스 경제는 괜찮았다. 1730년대 이후 공업생산량이 연 평균 2퍼센트 가까이 성장해서, 1700년에서 1790년 사이 영국의 190퍼센트보다 더 큰 260퍼센트의 성장률에 달했다. 한 세대 뒤진 산업화를 추격해 가는 기세였다. 서인도제도 등 식민지를 발판으로 한 무역 활동도 크게 자라나 1780년대에는 수출이 국민총소득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었다. 내부 조건만으로는 무너지기 힘든 경제지표였다.

그러나 7년전쟁으로 많은 식민지를 빼앗기는 등 영국과의 경쟁에서 뚜렷해지는 열세가 앙시앵 레짐의 위기를 재촉했다. 18세기 두 나라의 경쟁에는 냉전시대 미·소의 대결과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견고한 체제의 프랑스가 내부 유동성이 큰 영국과의 장기간 대결에서 힘을 탕진하고 무너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1776년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보인 믿음은 두 나라의 경쟁 양상을 참고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산업혁명의 한 가지 배경으로 17세기 영국의 '과학혁명'을 흔히 거론하는데, 같은 시기 프랑스의 과학 연구도 영국에 뒤지지 않게 활발했다. 과학혁명이 산업혁명으로 연결되는 결정적 열쇠가 사회경제적 조건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영국의 인클로저 현상과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을 비교하면서 하게 된다.

영국은 산업혁명 덕분으로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을 군사적 경쟁으로 압박해 파탄으로 몰아넣었고, 19세기 초의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우위를 확인했다. 그런데도 프랑스는 영국식 산업화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다. 기계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제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초까지 영국에서 기반을 마련한 다음 벨기에의 발로니아 지방을 거쳐 독일 루르 지방으로 퍼져나갔지만 프랑스는 그 발전의 축을 비켜 서 있었다. 그 결과 1870년 이후로는 영국만이 아니라 독일에 대해서도 군사적 열세를 보이게 된다.

극심한 경쟁의 압박 속에서도 프랑스가 극단적 산업화를 기피하는 경향을 가졌던 것은 경쟁국들에 비해 전통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도 프랑스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득실이 그리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 완벽한 기하학적 질서가 앙시앵 레짐의 지독한 안정성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인위적 아름다움의 극치라고까지 평가되는 이 궁전이 생활에는 무척 불편한 곳이 아닐까 꼬집는 얘기들도 있다. 대혁명을 겪고도 산업혁명의 주류를 비켜간 프랑스의 진로는 중상주의 시대의 영광을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닐지. ⓒ프레시안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정신없이 진행되던 18세기 말까지도 독일 지역은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거의 완전한 중세 상태였다.

10세기 중엽 세워진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 무너질 때까지 독일 지역의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오랫동안 그 실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였다. 합스부르크 가는 15세기 중엽 이후 계속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었고, 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한 때 스페인, 나폴리, 네덜란드 등지까지 통치권을 가졌던 유럽 최고의 권력 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위세가 당당하던 시절 독일은 수십 개의(구분 기준에 따라서는 수백 개에 달하는) 조그만 정치 조직으로 쪼개져 있었다. 그 군주와 수장들이 신성로마황제의 제후였다. 황제는 현상 유지를 위해 제후들의 안보를 책임졌다. 그래서 군주들은 자기 나라 안에서 견제 없는 권력을 행사했고 다른 나라와 경쟁할 일도 없었다. 중세적 질서를 벗어날 필요가 없었던 이유다.

18세기 들어 프랑스의 국력이 자라나 오스트리아의 힘을 견제하게 되면서 독일 지역에서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장 강한 도전자가 프러시아였다. 18세기 동안 프러시아는 몇 차례 전쟁을 통해 독일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큰 영토 국가로 자라났다. 그러나 18세기 프러시아의 성장은 아직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더 많은 영지를 가져 더 큰 영주가 되고 싶은 욕심일 뿐이었다. 정치를 질적으로 바꿀 생각도 없고 독일 민족을 대표하려는 뜻도 없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뒤이어 나폴레옹의 패권이 동방으로 뻗쳐오면서 독일 지역이 갑자기 근대에 노출되었다. 반세기 후 동아시아 지역이 겪게 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오랜 종주국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군에게 저항과 굴욕을 몇 차례 거듭하다가 결국 신성로마제국을 포기하고 축소된 오스트리아제국으로 주저앉은 것은 중국의 경험과 흡사하다. 독일 지역의 제일 뒤쪽에 있던 새 실력자 프러시아가 약간의 시련 끝에 새로운 상황에 앞장서서 적응한 것은 일본의 경험과 비슷하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대한 서양의 압력이 꾸준히 계속된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위협은 20년 만에 사라지고 독일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대표하는 반세기 동안의 복고시대에 들어섰다. 그러나 20년에 걸친 충격은 독일 지역에 깊고 큰 파장을 남겨 독일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갔다.

서유럽의 여러 기술, 사상과 제도가 19세기 초의 독일에 몰려 들어왔다. 서양 문명의 여러 요소들이 20세기 초의 우리나라에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선망하는 측면이 엇갈리기는 했지만, 변화의 방향이 차츰 조정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 진취성을 보인 프러시아가 결국 오스트리아를 제치고 근대국민국가 독일의 새 역사를 열어가는 주역이 되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구체제가 무너진 후 1866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결전을 거쳐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 중 독일제국이 선포되기까지 65년 시간이 걸렸다. 새 '독일제국'은 프러시아의 단순한 확장이 아니었다. 프러시아는 독일제국의 일부분이 되었을 뿐이고, 독일제국의 성격은 1871년까지의 형성 과정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그 과정에는 프러시아의 일방적 침략만이 아니라 독일제국에 합류할 여러 요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들어 있었다. 이 글에서 그 과정을 세밀히 살피지 못하지만 1848~49년의 상황 한 장면을 예시한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은 독일 지역으로 큰 파장을 일으켜 보냈다. 그 파장이 크게 증폭된 것은 반동체제 아래 잠복해 있던 개혁의 열망이 갑자기 촉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메테르니히가 퇴진하고 많은 나라에서 개혁파가 정권을 맡았으며, 통일국가의 헌법 기초 작업이 프랑크푸르트의 연방의회에서 진행되었다. 개혁의 양대 이념인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잠복해 있을 때는 한 목소리 같던 개혁파가 막상 칼자루를 쥐자 분화 현상이 나타났다. 모든 국면에서 온건파와 과격파의 대립이 일어나는 가운데 지지 기반도 가라앉아 1년이 지나자 더 이상 상황을 끌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온건 개혁파가 모색한 돌파구가 프러시아의 실력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방의회가 세습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통일연방국 헌법을 만들고 프러시아 왕이 황제에 오를 것을 청했다. 이것을 프러시아 왕이 거절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49년 황제 자리를 거절한 것은 전제적 황제권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2년 후 빌헬름 1세가 장악한 황제권도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그보다 더 전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차이는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이었다. 1849년에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우선권이 분명하지 않았다. 1871년에는 숙적 프랑스에 대한 복수의 기쁨에 들떠 민주적 절차까지도 경시되고 있었다. 1850년대에 집중적으로 진행된 산업화의 성과와 극도로 고조된 민족주의를 가지고 국제 경쟁에 당당히 뛰어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는 독일제국 형성에서 프러시아의 역할을 선망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제국에 합류한 작은 나라들은 언어와 문화를 프러시아와 공유하는 나라들이었고, 1871년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두루 검토한 끝에 프러시아 중심의 독일제국을 유력한 방안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독일 통일은 프러시아의 힘을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그 힘이 통합을 강제하기보다 통합의 여러 주체들에게 선택받은 것이었다.

정치적 분열 상태에 있던 독일 민족이 근대국민국가로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 근대화 과정과 겹쳐졌기 때문에 독일의 근대화는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 있었다. 강한 힘은 장애물을 쉽게 제거하고 발전을 빠르게 해줬다. 그러나 독일제국이 '게르만의 영광'이란 이름으로 시원시원하게 제거한 장애물 중에는 민주적 가치도 있었고 문화적 가치도 있었다. 20세기 들어 독일인이 밖으로는 무분별한 전쟁을 일으키고 안으로는 극도로 비인간적 상황을 펼치게 되는 것은 19세기 후반의 빛나는 추진력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 아닐지.

영국을 뒤이은 후발국들의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는 일이 생각 외로 까다롭습니다. 연재 주제와 관계되는 측면을 알아볼 만하게 정리한다는 것이 제 얕은 식견에는 벅찬 것 같습니다. 다음 회에는 미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9세기 한국이 처해 있던 세계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요긴한 배경이므로 힘들다고 제쳐놓을 수가 없군요. (☞블로그 바로 가기)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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