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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무슨 일이 있었나"

[망국 100년] 망국의 의미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한국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두 나라의 합병 조약이 체결되었고, 1주일 뒤인 29일에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림으로써 대한제국의 종결이 확정되었다. 8개조로 된 합병 조약은 제1조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에게 양여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 사건이 한반도 주민들에게 가진 의미를 세 개 층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 500여 년간 한반도를 통치해 온 조선 왕조의 종말이다. 마지막 10여 년간은 대한제국으로 국호와 국체를 바꾸고 있었지만 조선 왕조의 실질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으므로 대한제국 시기를 조선 왕조의 일부로 보는 데 별 문제가 없다.

둘째,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일천수백만 인구의 한민족이 이민족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신라 통일 이래 반도 국가가 이민족의 침략과 정복을 받은 일은 여러 번 있었지만, 전국이 이민족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100여 년간 원나라 지배를 받은 것이 가장 비근한 예지만, 그것은 직접 지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배' 대신 '간섭'이란 표현을 굳이 쓰는 이들도 있다.

셋째, 고대 이래 한국이 속해 있던 동아시아 문명권으로부터 유럽에서 발원한 근대문명으로의 전환 과정이 촉진된 것이다. 조선은 19세기 중엽부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파도에 휩쓸려들기 시작했다. 유럽의 산업화로 시작된 이 파도는 전 인류에게 '근대화'라는 이름의 문명 전환을 통해 전 세계적 산업사회에 편입하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 변화에 저항하던 왕조 체제가 제거되고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해 온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변화가 빨라지게 되었다.

망국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조선 왕조의 종말이라는 의미가 압도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인간의 가치 인식은 경험에 근거를 두는 면이 크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조선 왕조 체제는 한국인들이 십여 대에 걸쳐 생활을 꾸려나가고 자손을 퍼뜨리는 과정의 기반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이 조건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불안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장례식(1926년). ⓒ프레시안

그러나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왕조 교체가 비록 일상적인 사건은 아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유가 정치 사상에도 역성(易姓) 혁명의 개념이 있고, 실제 역사에도 왕조 교체가 있어 왔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이 중세 이래 처음 겪어보는 이민족 지배가 더 중대한 사태였다.

중국의 경우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의 소위 정복 왕조들을 이민족 지배로 본다면 이민족 지배 역시 왕조 교체와 큰 차이 없는 주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복 왕조를 세운 이민족들이 정복 당시에 중국 문명을 이미 상당 수준 받아들인 존재였고 한족에 비해 아주 작은 크기의 집단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넓은 의미의 중국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의 위치로 볼 수도 있다. 정복 민족은 통치 체제의 최상층부만을 점유했을 뿐, 중국인은 중국인 그대로 살게 했다. 언어도 사상도 통째로 바꾸려 한 일이 없었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도 이 틀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와 다른 것이었다.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살게 놔두고 그 상전 노릇을 하는 데 만족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 집단을 일본인 집단에 종속된 존재로 개조해서 일본인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작용을 35년간 계속했다. 그 결과 1945년 이후의 한국인은 1910년 이전의 한국인과 상당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한민족이 중세 이후 가장 짧은 기간에 겪은 가장 큰 변화였다. 일본의 지배가 아니더라도 근대화의 과제 앞에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변화의 방향이 일본 지배에 의해 크게 굴절되었다.

한국인을 일본인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일본인과 같은 존재로 만들려 한 것이라고 주장한 일본인들도 있었고 한국인들도 있었다. 거짓말쟁이 아니면 바보다. '일부' 한국인이 일반 일본인과 비슷한 위치에 접근하는 것은 가능했다. 일본인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인 집단 전체가 일본인 집단에 동화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었으며, 칼자루를 일본이 쥐고 있는 한 변화의 목적은 일본의 이익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한국인 그대로는 일본을 위한 이용 가치가 적기 때문에 이용 가치를 늘리기 위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바꿔놓는 것이 일본에게 한국 지배의 기본 목적이었다. 이웃의 한국인을 좋은 길로 이끌어준다는 생각을 가진 양심적인 일본인이 더러 있었더라도, 흑인을 문명의 길로 이끌어준다며 백인 지배를 정당화한 '백인의 짐' 관념과 같은 수준의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이민족 지배는 피지배 민족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거니와, 일본의 한국 지배는 이 문제가 현대 세계사에서 가장 심각했던 사례의 하나다.

조선 왕조가 끝나는 것은 외세의 충격 없이 동아시아 문명의 맥락 속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있을 수 있는 일 정도가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로는 왕조 교체를 위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는데도 30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1910년 당시 사람들에게는 왕조의 종말이 충격이었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안 되어 독립운동의 목표가 '대한민국'으로 옮겨져 있었다. 조선 왕조는 그 역할을 포기하자 몇 해 안 돼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 존재 당위성이 잊힐 만큼 기능이 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큰 안목에서 더 충격적인 것은 이민족 지배였다. 한민족이 신라 통일 이래 1000여 년간 이민족의 직접 지배를 겪지 않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원나라와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한반도를 정복하고도 직접 지배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한민족이 고유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지배가 힘들고, 그토록 힘든 일을 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초의 일본은 한국을 직접 지배하겠다고 나섰다.

일본에게도 한국 지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이 어려운 일을 하러 나설 충분히 강한 동기가 있었다. 제국주의 단계의 근대적 세계 체제에 편입한 일본은 식민지를 필요로 한 것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류큐, 홋카이도, 타이완, 한국으로 지배 영역을 넓혀갔다. 류큐와 홋카이도는 오랫동안 식민지 대접을 받았지만 결국은 그야말로 '합병'이 된 셈이다. 문화적 저항이 비교적 약해서 일본이 상당한 투자를 해서라도 고정 자산으로 확보할 엄두를 낼 수 있는 곳들이었다. 그러나 타이완과 한국은 일본에 동화될 수 없는 전통의 힘을 가진 곳이었고, 일본에게는 어디까지나 식민지였을 뿐이다.

제국주의 단계의 세계 체제는 먹지 않으면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전 세계가 산업화의 길을 향함에 따라 지역들이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역할로 갈라지고 있었다. 앞선 자들은 착취자의 역할을 맡기 위해 피착취자를 필요로 했고, 피착취자 쟁탈 경쟁이 격화된 결과 특정한 피착취 지역을 식민지란 이름으로 분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러 대륙을 식민지로 만든 유럽 국가들이 마지막 남아있던 동아시아로 향했을 때,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착취자의 길을 배운 일본이 식민지 쟁탈전의 한 주체로 끼어든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의 큰 줄기는 물론 산업화였다. 농업 사회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던 한국에 많은 공장들이 세워졌고, 근대적 교통수단이 만들어졌고, 도시들이 자라났고, 교육, 행정, 의료 등 근대적 서비스들이 도입되었다.

대한제국 시기까지 원활하지 못했던 변화가 일본 통치를 계기로 가속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일본 통치에 감사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식민지 시대에 근대화가 많이 진척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근대화'를 무조건 신성시하는 유사 종교다.

근대화가 인간에게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하는 탈근대적 의문까지 아니더라도,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근대화도 볕과 그늘의 양면을 가진 하나의 현상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어떤 방식에 따라 진행되느냐에 따라 개인과 집단, 지역과 국가의 득실이 엇갈리는 변화였다.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방향과 방식을 결정할 칼자루를 근대화 초기 단계에서 일본인들에게 맡겨놓았다는 것은 한국인의 큰 불행이었다. 가장 가까운 상대일수록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선택은 어떤 공장을 어디에 짓느냐, 어느 철도를 언제 놓느냐 하는 물적 자원 관리에 그치지 않았다. 미래 세대에게 어떤 교육을 제공하느냐, 토지와 자본의 소유를 어떤 부류 사람들에게 맡기느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관리하는 자와 관리 받는 자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빚어내느냐, 등 사회 조직 방법도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맞춰 결정되었다.

일본은 식민지 한국 근대 교육에서 고등 교육의 비율을 매우 적게 했다. 국내보다 일본에 가서 대학 교육을 받은 한국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경성제대 설립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국인 졸업생 수가 불과 300여 명이었다.) 한국 내의 초·중등 교육도 일본에 종속시키는 방향이었지만, 엘리트 교육의 경우는 더욱 철저하게 일본 교육 체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든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 토지 소유의 지주 집중을 더욱 강화했다. 통치자가 관리하기 쉬운 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부를 집중시켜 일본의 이해관계와 밀착시킨 것이다. 정상적 사회에서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 취약한 민중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배려를 일본은 한국 민중에게 베풀지 않고 물리적 힘으로 억누르기만 했다. 시기에 따라 다소의 굴곡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최대한의 이익을 쉽게 뽑아내기 위해 현지 사회의 안정성을 무시한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장래를 스스로 찾아나갈 지도층을 육성하는 대신 일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협력자 집단을 키워냈다. 정상적 사회의 지도층이 갖춰야 할 도덕성이 경시되고 이기심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이 풍토 속에서 재산과 고등 교육은 도덕성이 약한 특권층에게 집중되었다.

산업화를 주축으로 하는 근대화는 세계 어디에서나 전통 시대에 비해 사회 조직 원리로서 도덕성보다 이기심이 득세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변화가 특히 극심했던 것은 통치권을 쥔 종주국보다 통치를 당하는 식민지였다. 최소한의 사회적 건강도 고려하지 않는 능률 위주의 지배 정책 때문이다. 통치국에서는 전통의 힘과 변화의 필요 사이에 '도전과 응전(challenge and response)'의 유기적 과정이 펼쳐졌지만, 식민지에서는 도전만이 있고 응전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가깝고 비슷한 나라의 식민지 노릇이 식민지 중에서도 제일 엄혹했다. 식민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종주국은 두터운 층의 협력자를 필요로 하고 식민지 상황에 어느 수준 이상 깊이 개입하기 힘들었다. 이에 비해 한국을 비교적 잘 아는 일본은 식민지에 깊숙이 파고들어 최대한의 능률을 추구할 수 있었다. 35년이라는 주어진 시간 내에 가장 철저하게 한국 사회를 망가뜨릴 능력을 가진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중세 체제에서 벗어난다는, 넓은 의미의 '근대화'는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리고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그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국가들은 비교적 완만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폭력적 성격이 강한 산업화 중심의 근대화가 18세기 유럽에서 궤도에 오르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해일과 같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이 물결이 19세기 중엽 동아시아에 이르렀다.

일본은 이 물결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증폭시켜 대륙을 향해 쏟아 부었다. 일본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한국과 중국은 협공당하는 입장이 되어 선택의 폭과 적응의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었다. 서양 열강들의 앞선 위치를 따라잡기 바쁜 일본은 서양 열강들보다 훨씬 더 혹독하고 다급하게 한국과 중국을 몰아붙여 두 나라의 주체적 대응 기회를 빼앗았다.

1860년대에 외세의 압박을 뚜렷이 느끼기 시작하고서부터 1910년의 망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저항력은 세 개 차원에서 작동했다. 왕조 차원, 민족 차원, 문명 차원이었다. 문명 차원의 저항력 붕괴가 결정적 고비였다. 동아시아 문명 전체가 짓밟히는 상황 속에서 왕조의 저항력과 민족의 저항력은 큰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망국의 의미를 문명 전환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금요일(8일)에 실리는 다음 회에는 '중세 체제 극복의 과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근대화의 기본 의미가 중세 체제 극복에 있다고 한다면, 전통의 발전 속에서 근대화의 길을 찾은 사회들과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을 상실한 사회들 사이에 근대사의 명암이 크게 갈라진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중세 체제 극복 노력이 일어나는 상황은 연재 뒷쪽에서 다루게 되겠습니다만, 우선 이 과제의 존재를 초두에서 개관해 두고자 합니다. (☞블로그 바로 가기)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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