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볼 때 이 두 가지는 기독교인에 대한 다른 함축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인 기독교인의 실제 모습과 기독교인에 대한 기대치이다. 사실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주류는 이런 우려와 상관없이 잘 돌아가는 듯하다. 기독교 서클 안의 안정성은 "그들만의 리그"로, "기독교 집단 이기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모습을 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자기 헌신을 보이기보다는 자기와 자기 가족의 복을 기원하는 열렬한 신앙 상태로 변질된 모습. 사실 이 경우 그 신앙이 기독교냐 샤머니즘이냐, 이런 문제는 크게 중요하진 않다. 이게 좀 확장되어 나와 같은 공동체, 교회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그 이익에 목을 매는 모습이 현재 한국 기독교의 주류로 볼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내가 하는 변명이 있다. 기독교의 본질은 그게 아니라고.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예수의 길을 쫒아 가려는 사람들을 보라고. 저기 있다고. 사실 그 사람들은 수적으로 약세이고 처한 상황도 열악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류대영 지음, 푸른역사 펴냄). ⓒ프레시안 |
이 책은 "한국 기독교는 1880년대에서 최근까지 어떠했는가?" 라는 질문을 가진 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과 분석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저서는 기독교계의 보수, 진보적 진영 모두 같이 볼 수 있고 읽어볼 만하다. 애써서 역사적 사실과 사실 분석 위주로 저술한 듯한 이 저서는 그래도 한국 기독교의 과거를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진단하면서, 이것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미래의 방향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말하고 있다.
문명개화론과 기독교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현상, 서구 종교인 기독교는 어떻게 조선반도에서 그렇게도 빨리 전파되어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을까? 같은 유교 이념의 공동체국가였던 일본, 중국과도 대비해도 이것은 놀라운 상황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서양 문명 수입의 중요한 통로요, 조선 개혁에 도움이 될 요소"로 여겼기 때문이다(33쪽). 이것은 김옥균만이 아니라 이후 지식인들이 가졌던 생각이고 실제로 기독교는 서구 근대 문명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인들의 각성만으로 조선반도에서 기독교의 부흥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지배층의 기독교에 대한 정서가 일본 민중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과는 달리, 이미 조선 지배층에 대한 존경심을 상실한 기층 민중은 스스로 기독교를 필요에 의해 받아들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개항기 조선에서는 기독교가 주로 서북 지방, 즉 조선의 정치 질서에서 소외되어 유교적 신분 질서와 사회체제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졌던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고 한다. 지배층과는 달리 서북 지역인들은 상업적, 현실적 가치관과 , 진취적이고 개방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55쪽), 이런 사람들을 통해 전혀 이질적이었던 서구종교인 기독교는 빠르게 흡수되었다.
대부흥 운동
기독교는 이성적 각성이나 선진 문물의 대표자로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유교가 배격 했던 민간 신앙이나 불교에서 개인적 차원의 종교적 욕구를 부분적으로 충족시켰는데", "기독교가 높은 문명적 가치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사적 개인의 종교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사실"(123쪽)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한국적 정착화에서 지나칠 수 없는 종교 체험이 있다. 그것은 "대부흥 운동"인데 현재 한국 기독교 생활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한국의 대부흥 운동은 한국인의 원초적 종교성, 기독의 전통, 몰락해가는 왕조 속에서 극히 피폐해진 민중의 삶 등 복잡한 원인을 가지고 있다135쪽).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와 붙들 수 있는 절대적 존재가 결여되어 있던 때에 이런 집단적 분위기는 유교적 공동체 윤리 대신 개인적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신과의 개인적, 초이성적 관계의 체험을 낳게 된다. 사회적 불안정이 인간에게 더욱 절대적인 존재를 갈구하게 된다는 점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진리일 것이다.
다만 류대영의 분석처럼 한국 교인들이 일본인들을 증오한 일까지 회개하고, 고종 퇴위로 극도로 반일 감정이 상당히 고조되었을 때 길선주가 기독교적 원칙에 따라 그것을 진정시킨 현상 등은 종교계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분노까지 회개의 대상으로 삼거나 제어한 것이고 공동체적 감정마저 사적 차원의 회개거리로 인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이런 사회관, 종교관은 1900년대 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2000년대 한국 교회가 현실 정치에 무비판적인 모습으로까지 연장되는 듯하다.
다른 동양 전통과 기독교
예전에 나는 미국인 여선교사에게 불교나 도교를 연구하는 박사 과정을 그만둬야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 실제로 1900년대 초 기독교인 며느리가 제사 관습을 거부하다 자살한 사건은 <동아일보>에 게재되면서 당시 열띤 논쟁을 일으킨 사회적 이슈였고,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덜하지만 아직도 기독교와 제사 문제는 충돌되기도 한다. 또 동양학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아서 현재도 내 주변의 동양학 연구자들 중 기독교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십계명이 한국에선 이런 식의 배타적 분위기를 낳은 듯하다. 그러나 1890년대에서 1930년대 조선의 외국인 선교사들은 다른 동양 전통 사유나 종교에 대해 가치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조선의 법률, 교육, 예절, 사회경제, 도덕을 형성시킨 막강한 힘(178쪽)"으로서 유교를 인정했고, 대승불교의 성격을 분석하고 동학의 종교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런 그들의 노력은 오늘날 극단적 배타성을 지닌 기독교관을 설파하는 종교 지도층이나 기독교 기층에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공존?
내가 서구에서 만난 기독교인들은 기도드릴 때 하나같이 좀 조용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통성기도는 서구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기이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은 한국 기독교인이 참으로 부지런하다고 칭찬한다. 매일 새벽에 나와 함께 기도하고 예배드린다고 신기해한다. 한국 기독교가 서구 기독교와 다른 차별점으로, 새벽 기도회와 통성기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의 원초적 종교성을 이루고 있었던 샤머니즘적 성격, 민간신앙적 관습과 한국인에게 익숙한 집단적 통곡 행위가 기독교에 유입된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초 대부흥 운동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26쪽).
이것처럼 일견 안 어울리는 또 다른 조합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일 것이다. 종교적 욕구가 해소되어, 인민의 아편인 종교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사회주의국가에서조차 기독교가 현존한다.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집권층은 기독교를 공산주의 정권에 이롭게 활용할 방안을 모색하기까지 한다.
북한의 박승덕의 표현대로 "압제와 예속을 반대하고 자유와 평등을 념원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식 삶의 길을 제시하는 인생관(254쪽)"으로서 북한에서 기독교는 인정되고 있다. "인간 해방과 민족 해방을 위한 현실적 공동 목표들이 존재하는 한, 주체 사상과 대화 상대가 되는 기독교인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을 포용한다는 것(260쪽)"이 북한 지도층의 기조를 이루는 한 이 둘의 대화는 계속될 것이다. 사회주의체제에서도 인간의 본성엔 절대자에 대한 열망이 있고, 자기 수련과 사회 통합 차원에서도 종교는 핵심적 부분으로 인류 사회에 요구될 것 같다.
2050년에 2000년대 한국 기독교는 어떻게 기억될까?
이제 2000년대 대한민국 사회로 다시 돌아가 보자. 최근 개신교 복음주의 우파가 정치적 극우파와 손잡고 반공, 친미를 외치는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류대영의 말대로 그들의 "수세적 반응(376쪽)"으로 이해해야 할까?
현 한국 사회에서 보수 진영은 진보주의자들이 집권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구축해온 가치와 구조가 공격받고 있다고 느낀다. 현재 진보 진영, 보수 진영 어느 쪽도 한국 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하는 "힘의 공백"의 상황에서, 복음주의자 우파의 분노와 위기 의식도 근본적으로 이런 피해 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앞으로의 정치 세력 판도에 따라 압도적인 정치적 힘 앞에 순종하는 관습을 유지했던 우리나라의 보수적 기독교인의 모습(379쪽)"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는 신학적, 정치사회적으로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 그들의 신학적, 정치사회적 다양성을 생각할 때, 그들이 모든 문제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보일 가능성은 없다. (…) 한국의 기독교 뉴라이트가 정치적 집단으로서 앞으로 겪게 될 어려움의 본질은 국내의 정치사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가 반공, 시장경제, 친미라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이 허락하는 차원으로 수렴될 수 없다는 데 있다." (382쪽)
기독교 뉴라이트 운동에 대한 그의 통찰은 그들이 핵심으로 삼고 있는 반공, 시장경제, 친미라는 이데올로기로 모두 설명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복잡성에 대한 통찰과 맞닿아 있다. 이 사회에 대한 그들의 분석의 틀이 낡고 협소한데 그 세력의 영향력에 대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미국의 기독교 우파와는 달리 사회, 윤리적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못하고 오직 정치경제적 문제에 편중되어 드러나는 그들의 수세적 반응에 대해 기독교계가 함께 도매금으로 욕을 먹는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기독교계를 욕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양하다. 그에 못지않게 기독교계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집단이다. 기독교의 윤리로 도저히 설명되지 못하는 기독교계 종사자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할 만한 비윤리와 부패를 지닌 집단에서부터, 이런 범죄 집단의 이중적인 모습에 대해 적어도 같이 비난을 받기에 억울한 기독교인들도 많다. 적어도 윤리와 부패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자부할 만한 개인 윤리의식을 가진 집단도 있다. 또 자신과 자기 집단의 안녕을 구복하면서 주변에 적당히 인심을 베풀며 사는 중산층의 모습이 기독교의 주류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실적 삶의 노곤함을 절대적 존재에 의지해서 잊거나 극복하려는 계층도 존재한다. 또 기독교의 사회복음(social gospel)을 외치고 꾸준히 분투하는 그룹도 현재는 미미해졌지만 아직 존재한다. 신학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 기독교인으로 "같이" 불리운다. 이들을 한 가지 이데올로기로 묶는 것이 가능한 것일지, 요즘은 그런 의문까지 든다.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게 가능할까. 최소한 기독교계 어떤 명망있는 지도자가 "이것이 길이다"라고 제시할 때 무조건 하나로 따를 수 있을까.
최소한 한국사회 기독교계 사람들은 "기독교"란 이름으로 단일하게 묶이기엔 너무 복잡하다. 최소한 2009년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이 문제가 기독교인이냐, 불교도냐, 무신론자인가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결단과 실천을 요구한다고 본다.
사실 종교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독교의 후진성에 대해 말해왔다. 미래의 종교는 불교처럼 열려있는 종교, 자기의 내부에서 구원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종교, 타인에 대한 화해가 근본적으로 가능한 종교라고 말해 왔다. 나는 기독교 교리에 그런 모습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하나님의 유일성이 배타적으로 강조되는 신앙을 참진리로 여긴다는 것이 문제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불교 등과는 달리 아주 대중적이고 간명한 교리로 대중 속을 파고 들었다. 기독교는 탄탄한 조직력과 대중적이고 간단한 신앙 원리로 인해 20세기 최대 세력의 종교로 부상했다. 기독교에 관한 역사적, 사회적 통찰은 이렇게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뒤 균형감각을 찾은 부분이 있다. 기독교는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근대성을 심는 데 이바지했다. 1900년 전후 조선반도에서 기독교는 정치적 개화, 민권, 근면성, 조국애, 여권신장, 교육을 통한 개화를 전파하려고 했다. 당시 일부 지식인들에게 모든 학문과 문명 진보의 근원으로 여겨졌던 기독교는, 그렇게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삶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들이 기독교에 몰려든 것은 기독교가 닦은 포장술과 조직력에만 있지 아니하다. 그 속에 사람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사로잡고, 사회를 변혁시킨 요소가 존재한다. 2009년 이후 한국 기독교는 100년 전인 1900년처럼 인간 사회를 더 살만하게 만드는 종교로 기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가 딛고 있는 이 한국사회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다고 보는가? 기독교의 탈만 쓰고 있는 이들로 인해서. 그렇다면 당신을 통해 기독교를 이해시켜라, 이 세계에.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여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을 보여주는 건 쉽지 않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아니 내 몸만큼은 못하더라도 자신의 상식과 기준에 벗어난 부당한 경우를 당해도 참아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자기 자신의 욕망을 항상 다스리고 수련하면서 사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십자가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구세주의 피로 새로 태어 난 인간으로서 자신의 새 삶을 믿고 그만큼 타인의 변화를 기대하고 믿는 삶은 얼마나 대단한 삶인가. 기독교인으로 사는 건 본디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기독교인으로서 사는 것을 결단한 이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 대단한 사람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좀 더 인간적이고 인심 좋은 곳으로 변하리라고 기대해본다. 기독교인이 진정으로 기독교인다울 때 각박하고 흉흉한 이 사회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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