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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DJ가 우리를 살리는구나!"

[철학자의 서재] 유헌식의 <죽음아, 날 살려라>

죽기 싫다니까? 살기 싫다니까!

솔직하게 고백한다. 살면서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버젓이 살아 있으니 죽음을 두려워한 적도 죽기 싫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면, 더 큰 거짓말이다. 인간의 본질적 조건과 생명의 존엄성을 등한시하는 뒤틀린 정치 구조 안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뻔뻔스런 거짓말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죽음 생각은 더 빈번해지고, 죽음에 대한 거부와 죽음에 대한 유혹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고 있다. 죽음은 근원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사건이지만, 인격성을 박탈하는 사회에서 살다보니 오히려 어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죽음아, 날 살려라>(유헌식 외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라는 책을 발견했다.

책 제목을 읽으면서 든 생각. '다리야, 날 살려라'를 잘못 패러디했군. 죽음은 날 죽이는 것인데, 날 살리라니? 인간은 출생부터 죽음으로 향하지, 삶으로 향하는 게 아니야. 생명을 앗아가는 죽음에게 자기를 살려내라고 하다니. 어불성설이지.

그래도 어떻게 살려내는지가 다소 궁금하여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독서 와중에 몇 번의 사선과 갖은 고문, 계속되는 인권 탄압을 당하면서도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를 일궈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날 살리는 죽음에 대한 독서는 진지함으로 반전되었다.

나는 죽음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
▲ <죽음아, 날 살려라>(유헌식 외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프레시안

독서 과정에서 이루어진 반전은 한 개인의 죽음이라는 단지 우연한 시간적 일치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책에 담긴 내용은 죽음에 대한 상투적 감정에서 시작하여 삶과의 연관을 깊이 통찰하여 삶의 의미, 생명의 가치를 본질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상엿소리에서부터 홀로 죽음과 싸우는 소설의 주인공들, 영생을 거부하는 뱀파이어, 사후 세계를 더 참다운 세계로 간주하여 기쁘게 죽음을 재촉하는 소크라테스, 사후에도 자연의 흐름 속에 영속하는 몸의 편재성을 순차로 다룸으로써 죽음에 대한 나의 태도와 내가 겪은 사람들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떠올리게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낯선 타인 대하듯이 죽음을 대한다. 관심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거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단순한 형태 변화나 단순한 결핍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완전히 절멸되고 무화되는 것이라서, 어떤 식으로든 다시 돌이킬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을 낯선 타인 대하듯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절멸에 대한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죽음에 임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가까운 타인이 실제로 죽었을 경우에 슬퍼하기도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뒤돌아서면 곧바로 죽음을 잊어버린다. "친구의 죽음은 나랑 관계없는 일이야"로 일축해 버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랑 관계없는 일이라기보다는 "나랑 관계없는 일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의 작용이다. 죽음을 자신과 관계없는 일로 만들고 싶은 소망이 현명하게도 죽음이 자신과 실제로 관계없다는 자기 최면을 일으킨다.

그러나 자기와 관계없는 일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고통이 자신의 삶을 후려치면 죽음이라는 도피처를 떠올리고, 죽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와 반대로 자신의 죽음 대신 타인의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고통이 몰아칠 때는 고통을 야기한 자나 때로는 불특정 다수를 죽이는 방식을 취하여 세상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심지어 엽기적 살인이 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드물게는 자신의 죽음은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타인 중에서 어떤 사람은 죽지 않기를, 아니면 최소한 오래 살기라도 했으면 하고 바라는 경우도 있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 만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자신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정신적 스승과 같은 사람들은 죽음이 연기되거나 죽음 자체가 그에게서 소멸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죽음은 삶을 거부하는가? 삶의 일부인가?

죽음 앞에서 느끼는 이러한 다양한 감정을 책의 저자는 삶과 긴밀하게 연결하여 성찰한다. 인간은 아등바등 사느라 자신의 욕구와 충동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한 데, 저자는 상엿소리에서 죽음에 임하는 인간의 삶의 욕구, 충동을 건전하게 수용하는 태도 변화를 발견한다.

그에 반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서는 인간은 언젠가 한번은 죽어야 하는데, 죽음 앞에서 죽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삶을 다른 각도, 다른 가치로 보게 하는 관점 전환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삶과 죽음은 경계가 불투명하며, 죽음은 유한한 인간의 삶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이며, 죽음의 빛을 통한 개안이 죽음 가운데서 가능해진다.

그래서인지 3장에서는 영생을 얻은 자가 오히려 삶을 부담스러워 하고 그래서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삶이나 다름없는 신화, 뱀파이어 예를 제시한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불변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에 반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삶의 절망을 야기하며, 탄생에서 성장으로, 성장에서 소멸로 진행되는 유한한 인간의 특징이 영생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인간에게 무엇이 더 아름다우냐가 관건이며, 죽음은 인간에게 그런 아름다움을 깨우쳐주는 기제이다.

필자는 아름다움에 박차를 가하여 죽음은 삶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분이며, 삶에서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오히려 삶을 삶답게 살기 위한 전제라고 밀고 나간다. 우리는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의 삶을 아무렇게 내팽개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 때문에 상실하게 될 삶의 의미, 타인과의 소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삶이 개인적 욕구 충족에 그치지 않고 타인에게 소중한 사람,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된다. 살아있어도 죽어있는 삶이 아니라, 죽어있어도 살아있는 삶, 죽어서도 삶에 감동을 주는 최고로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래서 5장에서 일상성의 반복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살을 기도하는 베로니카의 사례를 통해 죽음, 자살은 뻔한 삶에 종지부를 찍는 자기 부정 행위가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죽음과 자살에 대한 단상은 뻔한 삶으로 자기를 전락시키는 요소, 가치 있는 삶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라는 자각을 야기한다.

죽음과 자살 앞에서 나는 그저 절망하고 삶을 단축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해 요소를 제거하고 '새로운 자기를 만나는 길'을 모색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삶의 태도를 바꾸고, 죽음을 훨씬 더 나은 삶을 야기하는 원동력으로 반전시킨다.

죽음에 대한 감정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의 태도를 바꾸어서 삶을 더 알차고 풍요롭게 하는 삶의 일부분이다. 죽음 자각은 삶에 무기력하고 일상성에 구토를 느끼는 자기를 떠나서 새로운 자기를 찾는 원동력,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게 한다. 이때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을 찾게 되고, 그래서 단순한 욕구 충족을 넘어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집착하게 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철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진리에 대한 사랑과 진리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6장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서 독배를 마시고 죽어야만 하는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에 죽음에 대해 친구,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플라톤의 <파이돈>을 인용하여 분석한다.

소크라테스에게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가 참된 진리에 도달하는 관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참된 삶으로의 진입이다. 참된 삶으로 진입해야 진리에 도달한다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은 죽음을 거쳐야 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위대한 죽음은 위대한 삶의 연속?

인간은 죽을 때 반드시 고통을 겪게 된다. 어느 고통보다도 심각하기 때문에 단말마의 고통이라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죽음이 설령 참된 삶, 진리로 진입하는 관문이라고 해도, 육체의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도 죽음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실제로 고통을 용기 있게 무시하고서 초연하게 독배를 마신다. 자신의 행동이 진리를 찾는 행동이라면, 죽음 이후에 더 참된 삶이 가능하다면, 진리에 대한 믿음과 용기를 지니고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참다운 철학자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리는 죽음을 무릅쓰고서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이다. 진리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단말마의 고통과 완전 소멸을 야기하는 죽음을 용기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용기를 보일 때, 위대한 죽음이 된다. 정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무릅쓰고서 나아가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관점은 결국 진리와 정의에 대한 믿음과 용기를 현실 삶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대한 죽음을 야기하는 용기는 삶 또한 위대하게 만든다.

죽음이 인간을 후려치더라도, 단말마 고통이 인간을 후려치더라도, 진리와 삶을 소신 있게 성찰할 때, 죽음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진입시킨다. 우리의 죽음은 존재의 절멸, 존재의 완전한 무화로 끝나는 듯해도, 죽음이 후려칠 때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진리, 정의를 위한 용기를 발휘한다면, 완전한 절멸에서 벗어나서 인류에게 삶의 보편적 가치와 존엄성을 선사해주며, 그 용기는 후대인의 삶에 편재하게 된다.

죽음의 고비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느끼면서, 한반도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삶을 불사른 위인이 우리에게도 있다. 진리를 위해 죽음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처럼, 사회 민주화, 한반도 평화, 남북관계 개선, 인권을 위해 죽음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던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고난 받는 순례자처럼, 진리를 향하는 철학자처럼, 마지막까지도 현 정권의 독재와 어리석음을 깨기 위해 사력을 다한 실천하는 시대양심이었다.

죽어간 이여,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소서

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안타까움을 야기하는 삶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시작이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회이다. 애절한 안타까움을 야기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은 사회 진보의 끝도, 부족한 정치 행보에 대한 비난의 끝도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과 더불어 진행되는 새로운 발전의 시작이다. 그래서 '죽음아, 날 살려라'라고 외치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욕심스럽게 외치면서 새로운 발전의 시작을 주문하고 싶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아,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을 살려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아, 남북관계의 경색을 풀고 평화와 화해를 약동하게 하라, 죽어버린 인권의 생명력이 솟아나게 하라."

그러나 이런 외침이 무색하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은 북측 특사조의방문단이 우리에게 오게 만들었고, 특사메시지를 동반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현 정권의 경직된 남북관계를 풀고 새로운 관계 맺기 기회로-마치 기다렸다는 듯이-사용하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해법을 찾지 못해 고심하는 한반도에 죽어서까지도 화해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죽음이 한반도 평화를 살려내고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죽음이 현 정권의 남북관계 개선을 야기하는 위대한 죽음이 되는 것은 살아생전에 이룬 남북 화해의 업적 때문이다. 위대한 삶은 위대한 죽음을 낳고, 위대한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삶의 비범함과 내적으로 연관되어 죽음도 비범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금의 3대 위기(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라는 무거운 짐을 남은 자들에게 맡기고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빈다.

<죽음아, 날 살려라>는 열심히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죽음을 억지로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삶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핵심이며, 죽음 후에도 편재하는 삶의 생동성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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