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 사랑하는 우리의 님이 가셨습니다. 우리를 홀로 두고 님께서 그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홀연 떠난 님을 원망할 수도 없고 그 가시는 걸음 부여 붙잡고 부디 가지 말라며 몸부림칠 수 없어 더욱 애통합니다. 오신 길이 그리도 험했건만, 가시는 길도 자꾸만 뒤 돌아볼 수밖에 없는 하수상한 시절이니 어디 그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기나 하셨겠습니까?
님께서는 이 시대의 고통을 마지막 순간까지 감싸 안으며 진실로 아파하셨습니다. 역사의 십자가를 온 몸 깊이 새기고 평생을 살아오신 님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앞에서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많은 사랑으로 님께서는 이 시대가 하늘에 드리는 기도 자체가 되셨습니다. 그 기도의 능력이 우리의 자신감과 기력이 되었습니다. 그런 님이 계셔서 우리는 참으로 든든했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님과 이제는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한다는 소식에 겉잡을 수없는 슬픔이 가슴에서 둑이 터진 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강은 어디로 흘러야할지 모르는 채 혼절하여 하늘로 솟구치고, 천 갈래 만 갈래 물길로 들판을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며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마음은 하염없는 통곡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비통함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인동초의 힘이여
▲ 지난 2006년 10월 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울대 특별 강연을 통해서 북한 핵실험으로 경색된 남북 간의 대화를 촉구했다. ⓒ연합뉴스 |
그런데 그 님께서 영원한 침묵이 안개처럼 뒤 덮은 숲 속 길 너머로 새벽이슬처럼 사라지고 마신 겁니다. 불러도 대답을 들을 수 없고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는 곳으로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붙잡고 우리의 억울함과 한 맺힘을 마음껏 하소연 하며, 누구에게 달려가 지혜와 뜻을 구해야 합니까? 이제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며 이 강포하고 잔혹한 시대를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며 물러섬이 없이 싸울 자들과 싸울 수 있는 겁니까?
쪼개진 나라가 하나가 되어 평화를 이루는 꿈, 서민들의 고통을 덜고 함께 잘 살아보자는 염원,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 되어 우리 모두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는 시대를 열자는 희망을 위해 희생적으로 투신해온 우리의 영원한 대통령 김대중. 그러기에 님께서는 한때 대통령이었던 전직 대통령이 아니라 누가 뭐래도 우리의 현직 대통령입니다.
김대중, 우리의 영원한 대통령
대통령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지금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님께서는 여전히 현직인 우리 모두의 정신적 대통령이십니다. 그건 제도를 뛰어넘는 우리 시대의 움직일 수없는 결정입니다. 이 추모사에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이 달리 있지 아니합니다.
님께서는 이 모든 꿈과 기원과 갈망이 쌓아올린 희망의 탑이, 백성들을 때리고 잡아놓고 빈궁하게 만드는 저 간악하고 무뢰한 자들로 말미암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에, 억장도 함께 무너지는 듯하셨을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추도사 하나 못하게 막아버린 자들이 쥐고 흔드는 세월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주체할 길 없는 눈물로 슬픔을 토해내신 그 장면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감동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슬퍼하며 무엇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지 분명히 말씀하신 셈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인격 앞에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 누구이건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님께서 이 땅에 민주주의와 통일의 대세를 위해 성심으로 몸을 바쳐 죽음도 불사하며 투쟁해 오셨다는 겁니다. 사람이 당대를 살면서 가장 중요한 과제 하나만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면 위대합니다. 님께서는 하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의 짐을 지고 줄기차게 달려오셨습니다.
그 위대함을 뒤늦게 깨달은 이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그건 실로 감사한 일이자, 님의 영광입니다. 그런 님과 함께 한 시대가 자랑스럽습니다. 뿐만 아니라 님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경륜이 깊은 위대한 인격으로 우리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 육성과 그 미소와 그 눈물로 우리의 귀는 새롭게 열리고 우리의 심장은 뛰고 우리의 눈은 밝아졌습니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 그리도 감사했습니다.
누구는 님의 달변을, 또 누구는 님의 의지를, 또 다른 누구는 님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는 무엇보다도 님의 진심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진심 하나로 온갖 음해와 모략과 비난을 견뎌냈고, 무한한 용기와 의지를 뿜어냈음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 몸에 새긴 그 십자가의 자국은,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가진 부활의 능력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걸 몸으로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압니다.
새 희망의 정수박이
8월, 폭염(暴炎)의 시절인데 현실은 맹추위가 기세등등한 동토(凍土)의 계절입니다. 때 아닌 인동초가 여기저기서 피어나야 할 날들인가 봅니다. 그러나 두렵지 않습니다. 마음 꺾어지지 아니합니다. 황망하여 슬퍼하나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오래 전 "님의 침묵" 앞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른 분의 뜻을 따라,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을 겁니다. 님께서도 우리가 애통하기만 하는 것을 바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이렇게 말해놓고도 여전히 슬픈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왜 좀 더 건강하게 사시지, 왜 좀 더 좋은 세월 보시면서 기뻐하며 떠나시지, 왜 좀 더 혼미한 세월을 바로 잡아 나가는 선생님이 되어주시고 가시면 누가 뭐래나, 하는 억하심정이 북받칩니다.
대통령이 되시기 전, 뉴욕에 잠시 오셨을 때 제가 통역으로 나서서 도와드렸던 아주 먼 옛날이 새삼 생각납니다. 지팡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회초리라고도 번역되는 "cane"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고문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님께서는 재미있는 유머를 하셨지요.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은 고문으로 절게 된 다리를 의지하는 지팡이지 남을 때리는 회초리는 아니라면서, 양심을 가진 민주인사들에게 회초리를 든 사람들은 따로 있다면서 좌중을 웃기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현실을 깊이 생각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대통령, 감사합니다
민중을 지키는 지팡이가 민중을 가격하는 몽둥이로 변해버린 현실에서 더더욱 새롭게 기억나는 님의 유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머로 그치지 않고, 고난의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희망의 미래를 다시 다지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팡이는 고난의 역사를 보여줌과 함께, 역사의 미래를 가리키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님을 떠나보내는 통절한 마음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자 다시금 우리의 뇌리에 새겨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당신을 잊은 지 오래"라고 하지 않도록 새기고 또 새깁니다. 수십 년의 시간 속에서 피멍이 들고 뼈가 부서지며 살점이 떨어져나갔던 고통을 삭이고 역사의 희망이 되어주신 김대중 대통령님에게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로부터 이승에서는 보지 못할 것이나 우리의 영혼에서 우리는 님을 떠나보내지 아니합니다. 그 오고 가신 길을 뒤따르며, 우리는 더욱 용맹해질 것이며 더욱 강건해질 것입니다. 지금은 황망한 마음으로 슬픔에 젖어 어찌 할 바 몰라도,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우리가 이기는 것이 님의 참된 기쁨임을 믿습니다. 님의 그 다사로운 미소가 우리를 지켜줄 것을 확신합니다.
부디 편히 영면하소서. 떠나신 님을 그리워하며 존경과 사랑의 눈물을 마음껏 흘려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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