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한국노총과 경총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는 한 달의 논의 끝에 23일 '합의문'을 내놓았다.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주도적 사회적 합의이며 각계각층이 참여해 만든 포괄적 합의"라며 의의를 설명했다.
▲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는 한 달의 논의 끝에 23일 '합의문'을 내놓았다. 형식적으로는 노사 양 측 모두 한 발씩 양보한 듯 보이지만, 양보의 수위가 달랐다. 노동계가 최대 무기인 임금을 내놓고 "파업 자제"까지 내놓았지만, 경영계는 당연한 노력만을 약속했다. ⓒ연합뉴스 |
형식적으로는 노사 양 측 모두 한 발씩 양보한 듯 보이지만, 양보의 수위가 달랐다. 노동계가 최대 무기인 임금을 내놓고 "파업 자제"까지 내놓았지만, 경영계는 '지극히 당연한' 노력만을 약속했다.
심지어 "기업은 잉여금 등 보유 자금을 활용해 일자리 창출에 노력한다"는 합의문 내용을 놓고도 이수영 경총 회장은 "항상 투자를 해야 하는 기업의 운명에 대한 선언적 노력일 뿐 강요나 강력한 의미의 약속은 아니다"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합의 이전에 이미 내놓았던 경제 위기 대책에서 특별히 진전된 내용을 찾기 어려웠다. 특히 △일자리 나누기 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 △실업 급여의 탄력적 적용 △임금 체불 노동자에 대한 생계비 대부 확대 등 예산 확보가 절대적인 사업에 대해 뚜렷한 재정 마련 계획도 없었다.
이런 사정 탓에 이번 합의를 놓고 민주노총 등 일각에서는 "노동자의 임금 삭감만 있고 정부와 사용자 측의 책임과 역할은 전혀 없다"며 "결국 일자리 나누기가 아니라 오직 노동자에게 모든 고통을 떠넘기려는 경제 파탄 합의"라고 비판했다.
64개 항목 걸쳐 "공존 공생" 위한 각 주체의 노력 명기
이날 나온 노·사·민·정 합의문의 목표는 경제 위기 극복 방안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합의다. 말 그대로 "지금은 전체 사회 주체들의 협력 없이는 쉽사리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와 빈곤 계층에 대한 보호 대책에 대한 합의를 통해 "공존 공생"의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대의적 명분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실무회의와 대표자 회의 등 10여 차례의 회의를 통해 도출된 합의문은 64개 항목에 걸쳐 일자리 나누기, 물가 안정, 실업자 및 비정규직 지원 강화 등 광범위한 각종 노력을 추상적으로 약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노동계는 △불법 파업 근절 △파업 자제 △불합리한 경영 참여 요구 중단 등을 약속하고 심지어 막판까지 쟁점이 된 임금 부분도 "동결·반납 또는 절감을 실천한다"며 구체적 양보를 내놓았지만, 경영계와 정부는 아니었다.
'일자리 나누기'를 위해 내놓은 경영계의 약속은 △부당노동행위 근절 △투명경영, 윤리경영 및 성실한 노사협의 △하청업체의 고용안정 및 상생 협력 등 경제 위기 상황이 아니어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자제" 약속이 들어가긴 했지만, 바로 다음 항목에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경우에도 일방적 감원보다는 희망퇴직을 최대한 활용한다"고 명시해 빠져나갈 틈을 확보했다.
정부의 약속은 더 추상적이다. △물가 안정 노력 △기업의 고용 촉진 지원 방안 강구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 △비정규직 고용 안정 위한 재정 지원 등이 전부였다. 그나마 이 '노력'을 위해 필수적인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해서도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이행을 위해 관계부처 예산에 적극 반영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국민 전체의 합의"?…핵심 주체들 벌써부터 합의문 해석 신경전
비상대책회의 이세중 공동의장은 이날 "논란도 있고 격론도 벌어졌지만 전반적으로 한 발씩 물러나는 성숙한 자세로 만들어진 합의문"이라며 "이번 계기로 국민들도 그동안 갈라졌던 아픔과 갈등을 극복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김대모 위원장도 "비록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은 것이 유감이지만 11년 전과 달리 사회적 대타협 참여의 폭이 넓어진 만큼 이번 합의는 국민 전체의 합의로 생각한다"며 의의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합의에 참여하지 않은 민주노총은 고사하고, 같이 서명한 핵심 주체들 사이의 합의문 해석을 둘러싼 신경전도 벌써부터 팽팽했다.
특히 기업 유보금의 투자에 대해 장석춘 위원장은 "외환위기 때와 달리 기업의 유보금이 있고, 이번 합의는 국민들의 고용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분명한 약속"이라고 강조했지만, 이수영 회장은 "(기업에 대한) 강요나 강력한 약속의 의미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임금 부분도 장석춘 위원장은 "잘 되는 기업까지 임금을 동결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 임금 인상도 가능하다"며 유연성을 강조했지만, 이수영 회장은 "명시되진 않았지만 노총도 올해는 임금인상 요구안을 내지 않고 경총도 임금 관련 지침을 내리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다"고 맞받아쳤다.
민주노총 "기업은 각종 혜택 가져가고 노동자만 고통 분담?…희대의 사기"
처음부터 노사민정 대화 자체를 거부했던 민주노총은 즉각 "희대의 사기"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기업은 경제 위기를 빌미로 각종 세제지원 등의 혜택을 쓸어가는데, 노동자만 자기 몫을 내놓으라고 한다는 것이 요지다.
민주노총은 "이번 합의에 따라 심지어 법정 기준 미만의 휴업수당 지급도 허용돼 정부가 나서 탈법을 조장하는 셈"이라며 "그 어떤 내용도 수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민주노총은 "노사의 고통 분담이 공정히 이뤄지려면 우선 일자리 유지 및 나누기는 노동시간 단축이 중심이 돼야 한다"며 "단축된 임금 삭감분에 대해 공정한 노사정의 분담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엉터리 합의가 오히려 정부의 비정규직법, 최저임금제도 개악의 면죄부를 줬다"며 "각계 시민사회단체 및 야4당과의 적극적 연대로 3월 추경 예산 확보부터 일자리 대책 마련을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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