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전태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붙는 칭호다. "노동자도 사람이다"를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뜻을 평생 온 몸으로 이어 온 이소선 여사가 올해 팔순을 맞았다. 사단법인 전태일기념사업회는 그의 팔순을 기념해 헌정 문집 <조선 질경이 이소선>을 발간한다. 여러 사람의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이소선 여사의 치열한 삶은 깊은 감동과 함께 노동운동 또 우리의 삶에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과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9편을 골라 연재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오는 12월 5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팔순 잔치 겸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
이소선 어머니 하면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가끔 살아가면서 세상일에 지칠 때, 이소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나는 친어머니 말고는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어머니라는 호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소선 어머니께는 지금도 만나면 자연스럽게 "어머니~" 하면서 끌어안게 된다.
나는 아직도 1974년 12월 23일, 그날 밤에 있었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처음으로 농성에 참여하는 날이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노동교실에 들어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노동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앞에서 농성을 진행하는 노동조합 간부가 그날 저녁에 우리가 모인 이유를 설명했다.
"그동안 우리는 근로기준법이 있는데도 장시간 근무를 해왔습니다. 언제 햇빛 한 번 본 적이 있습니까? 새벽 밥 먹고 출근해서 막차 타고 집에 들어가면 통금시간 아니었나요? 일하는 시간을 단축해서 우리도 인간답게 살아 봅시다."
진행자의 호소에 농성장에 모인 조합원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그렇게 시작된 '시간 단축 농성'이 어느새 밤 10시를 훌쩍 넘어갔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서 조합원들이 집에 가야 한다며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동교실을 꽉 메웠던 노동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한 목소리로 요구하면 반드시 관철될 것이다."
이소선 어머니는 자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척 안타까워 하셨다. 오늘 하루 통금 전에 집에 가는 것보다 앞으로의 노동시간 단축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하며 붙잡았지만 노동자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계속 빠져나갔다.
11시 40분쯤에는 약 30명 정도도 남아 있지 않아서 차마 나까지 집에 가겠다는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집에서 엄마와 언니가 얼마나 기다릴까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에 전화는 노동자들에게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 자리에 모인 어머니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밤새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집 걱정에 애가 타고 있었다. 어느새 새벽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집에서 나를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 생각이 났다. 이소선 어머니께 집에 가서 소식을 전하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씀 드렸다.
"갔다가 꼭 와요, 꼭 다시 와요. 알았지?"
이소선 어머니는 선선이 승낙하시며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노동교실에서 나와 당시 내가 살던 신도림동 집에 갔다가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모른다. 1시간쯤 지나면 출근시간인데 공장으로 가야 하나 노동교실로 가야 하나 수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꼭 다시 와요" 하신 이소선어머니의 말씀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고 내 마음은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하고 싶지 않았다. 노동교실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창문 밖을 내다보고 계시던 어머니가 나를 보시고는 "야, 저기 까만 바바리 노동자 한 명 온다" 하면서 좋아하셨다고 한다.
아마 이소선어머니는 그날 이후로 나를 확실히 기억하셨을 거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내게 '까만 바바리'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셨다. 그랬다. 까만 바바리만 6~7년 이상 입고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날 저녁,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며 간 노동자들은 대부분 노동교실로 돌아오지 않고 공장으로 출근을 하였다. 그래서 오죽하면 어머니가 "돈이 있으면 노동자들을 돈 주고라도 사왔으면 좋겠네"라고 말할 정도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쉬웠다.
24일 낮 12시쯤이 되자 경찰들이 확성기로 지금 해산하지 않으면 전원 구속시키겠다고 을러대었다. 나는 무서웠다. 해산을 하니 못하니 양쪽에서 줄다리기를 3시간 정도 한 후, 당시 경찰서 정보과 과장이던 사람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보과장은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해산하라고 압박하면서 이소선 어머니께 "아주머니는 당장 나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더 큰소리로 "노동시간 단축만 해주면 지금 당장 해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소선 어머니는 몸소 우리들에게 당당함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실천으로 가르쳐주셨다. 결국 우리의 농성은 승리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저녁 8시면 퇴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나는 지금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맑스'를 공부를 하고 있다. 노동의 이론가인 맑스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외쳤다면 당시 이소선 어머니는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과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단결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소선 어머니와 대화는 주로 투쟁현장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1975년 봄, 임금인상 때문에 노동자들은 다시 노동교실에 모였다. 그때 어머니는 우리 여공들에게 "여러분, 하루에 옷을 몇 장 만드는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이다음에 결혼해서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킬지, 남편과 관계를 어떻게 잘 만들어갈 것인지 등을 공부하고 고민해야 한다"면서 공장생활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셨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이소선 어머니의 말뜻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살아가면서 며느리 역할이 뭔지, 아내 자리가 뭔지를 알았다. 딸들에게 엄마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셨고, 우리 노동자들에게 자신감과 당당함을 몸으로 알려주셨다.
▲ 1977년 여름이었다. 장기표 선생 재판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어처구니없는 트집을 잡아 경찰은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하였다. 사진은 지난 1998년 공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된 장기표 씨가 그의 부인 조무하 씨와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다.ⓒ연합뉴스 |
1977년 여름이었다. 장기표 선생 재판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어처구니없는 트집을 잡아 경찰은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하였다. 청계노조 노동자들은 죄 없는 이소선 어머니를 석방하라며 9월 9일 노동교실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나를 비롯하여 몇몇이 구속되었고, 서대문구치소에 이송되어 징역을 살게 되었다. 성동구치소에 있던 어머니는 항소를 해서 내가 징역을 살고 있던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돼 오셨다. 서대문구치소에서 이소선 어머니와 임미경, 이숙희와 나는 감독하는 교도관들의 눈을 피해 통방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머니!"하고 부르면, "순애야, 숙희야, 미경아!" 하고 어머니는 우리를 부르셨다. "아프지 말고 밥 잘 먹고 있어라" 어머니는 늘 같은 말을 하셨고, 우리들도 "어머니도 식사 잘하시고 힘내세요"라고 소리쳤다. 어머니가 아침에 세면장에 가려고 복도에 줄을 서면, 우리는 새둥지 속 새끼들처럼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눈이 마주치면 밥 많이 먹고 힘내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지금도 그때 일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그때 어머니가 계서서 하루하루가 지루하지 않았고, 힘든 감옥생활도 견뎌낼 수 있었다.
나는 1978년 6월경 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노조 사무실에서 상근하게 되면서 다시 최선을 다해 노조활동을 시작하였다. 경찰이 집에까지 쫓아와서 노동조합 활동을 못하게 압력을 넣었다. 전세 살고 있던 집주인이 정보기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당신 딸이 빨갱이라는데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라'며 우리 엄마한테 전셋돈 7만 원을 던져주었다. 결국 전세도 쫓겨나야 했다. 그때도 이소선 어머니는 "순애야, 무슨 걱정 있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그럼 창동 우리 집으로 주소를 옮기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창동으로 집을 옮겨 이소선 어머니 곁에서 살 수 있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이렇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해결사 역할도 해주셨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겪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나는 1966년 평화시장 삼양사 아복동 만드는 공장에서 시다로 시작하여 미싱을 배웠으며, 와이셔츠 만드는 봉제기술은 최고의 경지까지 가는 일류기술자가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봉제공장 미싱사 출신인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노조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동지들과 전태일 동지의 정신을 계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감은 온몸을 바쳐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신 이소선 어머니의 지혜와 사랑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도 이소선 어머니는 젊은 날 못지않게 주변 사람들을 챙겨주시고 노동자들과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밑바닥 사람들의 편에 서서 열심히 살고 계신다. 언제나 변치 않고 정열적으로 사시는 이소선 어머니가 건강하게 우리들 곁에 오래오래 남아 주시길 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신순애 선생은 청계노조에서 일했고, 1977년에는 '이소선 어머니 석방과 노동교실 되찾기' 농성을 벌이다 징역을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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