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는 평가가 대세다. 미국 민주당은 물론 상대적으로 시장 자유에 관대한 공화당에서도 이와 같은 재무부 조치를 환영했다.
하지만 이 조치 뒤에는 꼬리표처럼 '자본가의 방만한 경영 책임을 납세자에게 떠넘긴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상대적으로 월가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이를 막기 위한 규제조치가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는 논의되지 않는 분위기다.
미국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공적자금 투입'이라는 방식으로 소수 자본가를 위한 시스템을 유지시켜왔다. 미국의 경제위기 극복 역사는 납세자, 즉 대다수 국민들의 무한 책임의 역사였다. 외환위기 당시 재벌기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세금은 물론, 금붙이마저 내놓은 한국 국민들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대공황의 비극과 HOLC 설립
항상 파국 직전 세계는 자본주의가 낳는 풍요로움을 찬양하기 바빴다. 그리고 파국은 또 다른 낙관을 낳았다. 낙관이 폭발하면 여지없이 공적자금 투입이 결정됐다. 1930년대 경제대공황(The Depression)은 대표적 사례다.
1913년 신경제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마지막 대부자'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탄생하자 당시 지식인들은 '이제 경기순환은 끝났다'는 낙관론에 사로잡혔다. 정부도 이를 부추겼다. 재무부는 소득세를 65%에서 32%로, 법인세를 대폭 낮추는 공격적 감세정책을 폈다.
마치 신앙처럼 번지던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주식시장으로 번졌다. 상장기업의 미래수익을 현재가치로 할인해 주가를 평가하는 방식이 정설화됐다. "미래가치뿐만 아니라 저승의 가치까지도 할인한다"는 말이 뉴욕 증시를 휩쓸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 제너럴모터스(GM) 설립자 윌리엄 크래포 듀란트 등 유명인은 엄청난 규모의 주식투자로 떼돈을 벌었다. 투기 광풍이 나라 전체로 번졌다.
믿음은 1929년 10월 24일, 이른바 '검은 목요일'에 주가가 폭락하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주가폭락과 실물경제 붕괴는 다른 얘기로 여겨졌다. 증시는 곧 회복세를 보였다. 돈잔치의 끝을 본 투기꾼들의 시체가 허드슨강에 떠올랐지만 경제붕괴 조짐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안도했다. 1930년 3월 후버 대통령은 "두 달이 지나면 증시폭락에 따른 고용불안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붕괴는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후 찾아왔다. 국내총생산(GDP)은 전해에 비해 60%가 줄어들었고 실업자는 1250만 명에 달했다. 자살하는 이는 투기자를 넘어 기업인으로 번졌다. 1932년 3월 세계 성냥시장의 3/4을 장악했던 '성냥왕' 이바르 크루거는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목숨을 끊었다. 1929년 114달러에 달하던 RCA 주식이 1932년 2.5달러로 내려앉자 이 회사 주식으로 작전을 벌였던 마이크 미핸은 1936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집을 저당잡혀 주식투자를 일삼던 서민 투자자의 목을 공황이 조여왔다. 길바닥으로 나앉는 사람이 늘어만갔다.
재해가 휩쓴 나라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통제'를 주문하는 케인스주의를 위기대처 해법으로 채택했다. 하루에만 1000계약의 모기지 저당권 상실이 기록되던 1933년 6월, 그는 취임과 동시에 주택소유자대부공사(Home Owners' Loan Corporation, HOLC)를 설립해 주택시장 안정 조치를 취했다.
HOLC는 은행으로부터 지급 불능 상태에 처한 모기지를 사들이고 대신 새로운 대출을 주택소유자에게 제공했다. 생긴지 2년도 못 돼 HOLC는 190만 명에 달하는 주택소유자들의 구제요청을 받았고 100만 계약이 넘는 새 모기지를 만들어냈다. 이로써 HOLC는 당시 미국 내 존재한 모든 모기지의 1/5을 보유하게 됐다. HOLC가 소유한 주택은 20만 호에 이르렀다. 당시 HOLC의 총 대출규모는 35억 달러에 달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7500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다.
1951년 문을 닫기까지 HOLC는 파산위기에 처한 수많은 주택소유자를 구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늘도 짙었다. 어마어마한 액수를 정부 빚으로 끌어 썼지만 HOLC 대출자의 20%는 결국 파산했다. HOLC가 대출자의 등급을 가르기 위해 만든 새로운 주택 감정시스템이 인종차별을 합법화하기도 했다. '붉은 선 긋기(Redlining)'로 불리는 지역 평가법은 흑인과 멕시코인이 사는 지역을 붉은 경계선으로 지도에 구분했는데 이는 곧 그들이 '경제적 위험이 높은' 인종이라는 의미였다.
신자유주의의 파국, S&L 사태
케인스주의는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사태를 맞으며 종말을 고했다. 대신해서 나타난 경제철학은 신자유주의였다.
1979년 영국 대처정부에 이어 1980년 미국에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는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했다. 밀턴 프리드먼과 아서 래퍼 등 신자유주의자를 신봉한 레이건 대통령은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소득세와 법인세 삭감을 이어갔다. 기업의 부채는 급격하게 늘어났고 소득 간 격차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금리가 내려가면서 기업의 자금조달이 용이해지자 차입매수(LBO, leveraged buyout)를 이용한 기업사냥이 본격화됐다.
저금리와 세금감면 정책으로 자금조달 비용이 줄어들자 투기 열풍은 정크본드(투자 부적격 등급 채권) 투기로 번졌다. 공격적인 정크본드 투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마이클 밀켄은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은 정크다. 정크푸드, 정크레코드, 정크의류…. 시간이 지나야 본질이 드러나는 모든 것은 정크다"라고 거들먹거렸다.
그동안 건실한 미국 서민경제의 상징이었던 저축대부조합(S&L) 역시 퇴폐하기 시작했다. 이자율 규제 완화로 시중은행이 앞 다퉈 고금리를 미끼로 고객모집에 나서자 S&L 역시 단기예금 유치를 위해 고금리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는 장기 저리대출과 맞물려 예대 역마진을 낳았다. 1981년과 1982년 S&L의 금리스프레드(모기지 포트폴리오와 조달금리)는 각각 -1.0%, -0.7%였다.
S&L이 위기에 처하자 레이건 정부는 강력한 규제완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모든 S&L이 월가에서도 자금조달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버리고 연방저축대부보험공사(FSLIC)를 만들어 개별 S&L 예금에 대해 10만 달러까지 보장해주도록 했다. 이로써 S&L은 마치 투자은행처럼 정크본드와 부동산 등 다양한 자산에 돈을 투자할 수 있게 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홈런을 친 기분!"이라고 말했다.
새 법안이 투기열풍에의 동참을 도우면서 S&L 매니저들은 순식간에 투기꾼으로 변했다. 고객의 자산으로 정크본드와 파생금융상품에 '묻지마 투자'를 하는 매니저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텍사스주 S&L 매니저들은 매년 1200%씩 대출을 늘리면서 이를 투기적 자산거래에 이용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매니저들이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하고 최고급요리를 사먹는 데 쓰였다. 정치인과 금융감독자들을 매수하는 데도 이용됐다. 2000년대 초저금리 정책을 펼친 앨런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도 당시 링컨S&L의 자문역으로 활동했다.
자유방임주의가 낳은 광적인 열풍은 1987년 10월 19일 '검은 월요일'에 갑자기 가라앉았다. 이날 하루 거래량의 40%에 달하는 40억 달러 규모가 프로그램 매도로 시장을 내리쳤다. 다우지수는 22.6%가 하락했고 S&P500지수는 20.5% 폭락했다. 1조 달러에 가까운 돈이 갑자기 증발해버렸다.
이후 1000여 개가 넘는 S&L 업체가 최악의 빚잔치 후유증으로 무너졌다. FSLIC는 S&L의 연이은 도산으로 지급불능 처지에 놓이게 됐다. FSLIC의 파산을 가장 먼저 예고한 버트 엘라이 엘라이&코 대표는 "FSLIC의 파산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게 아니다. 수년 전부터 잠복한 재앙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서민 가계에 직접 타격을 입힐 게 뻔했기 때문에 정부의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1989년 정리신탁공사(RTC)를 설립해 부실자산을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투입된 공적자금은 약 4000억 달러에 달해 당시로서 사상 최대 규모였다.
투기꾼들이 망쳐놓은 시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투입된 자금의 2/3는 결국 회수되지 못했다. 매니저들과 투기자본 세력이 사상 유례없는 사치를 누린데 대한 뒷정리는 국민의 세금 몫이었다.
파생금융 시장의 위기가 결국 실물경제 위협으로
1970년대부터 새로운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군림한 신자유주의는 파생금융시장의 급성장을 이끌었다. 레버리지 효과(대규모 차입금을 이용한 투자로 자기자본이익률이 높아지는 효과)에 도취된 월가는 온갖 새로운 파생금융상품을 시장에 선보였고 이는 처음에는 '시장의 위험을 낮춰줄 혁신적 조치'로 평가받았다.
1972년 외환선물시장이 시카고에 개설됐고 1981년에는 이자율 선물거래도 합법화됐다. 이로써 마침내 현물이 거래되지 않는 파생상품 시장이 탄생했다. 최첨단 이론으로 중무장한 과학자들은 금융사에 스카우트돼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시스템을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금융상품을 시장에 내놨다. 열역학과 우주공학이 경제학에 이용됐다.
위험헤지용 상품은 특유의 고수익성 덕분에 점차 투기상품으로 변해갔다. '금융 기법의 새혁명'이었다고 평가받는 블랙숄즈 옵션가격 결정 모형을 만들어낸 마이런 숄즈 MIT 교수마저 파생금융상품 투기에 발을 담글 정도였다. 비유동성 자산을 한데 모아 등급별로 쪼개 유동화시킨 상품인 유동화 증권이 시장에 선보이면서 모든 자산이 투자 대상으로 변했다. 리먼브러더스는 부채담보부증권(CDO) 판매로 일약 세계 4대 투자은행의 반열에 올라섰다.
파생상품의 등장으로 자본의 국제화가 더욱 활발해지면서 월가에 취업하는 이들은 '화장실에서 몇 번이나 졸도했는지'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을 정도로 일벌레가 돼야만 했다. 대신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보너스를 받으며 40세 이전에 은퇴하는 삶을 꿈꾸게 됐다. 규제의 끈은 이번에도 그들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앨런 그린스펀 연준의장은 버블닷컴 붕괴를 넘어서기 위한 조치로 저금리 정책을 펼쳐 자금조달 비용을 더욱 낮춰줬다. 금융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미국인들의 지갑은 다시 두툼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유증이 최근 모기지론 파멸로 이어지며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금융위기로 번졌다. 미국은 이번에도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했다. 페니매와 프레디맥 구제를 위해 2000억 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AIG를 국유화하는데도 85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와 같은 조치에도 시장이 안정되지 않자 미국 정부는 다시 7000억 달러(약 795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채권 매입에 나섰다. 이와 함께 미국 국가채무의 한계를 기존 10조6150억 달러에서 11조3150억 달러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이 원안 그대로 통과될 경우 미국 정부는 국내총생산(GDP)의 81%에 달하는 국가채무를 질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조치다.
그러나 이번에도 형평성 논란은 끊이지 않고 제기된다. 리먼브러더스의 회생에는 정부가 나서지 않다 AIG에 공적자금이 투입되자 '대마불사' 논란이 일어났다. 특히 자본가의 부도덕성으로 인한 고통을 왜 납세자가 떠안아야 하느냐는 근본적 의문에 이번 조치는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콜롬비아대 교수는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1929년 월가 붕괴와 비교되는 이번 금융 위기는 금융기관의 부정직성과 정책결정자의 무능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미국의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잔치 뒤에 납세자의 고통'을 반복해왔다. 이번 조치로 금융기관의 건전성이 얼마나 높아질지, 후유증은 얼마나 길어질지, 적절한 규제정책이 구출될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과연 빈사상태에 빠진 미국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지도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이 기사는 <금융투기의 역사>(에드워드 챈슬러 지금, 강남규 옮김), 한국법제연구원의 <국가재정과 주택금융제도-미국의 주택금융법제>, 1946년 <TIME>에 실린 'Profitable HOLC', 엘라이&코의 버트 엘라이 대표가 'The Library of Economics and Liberty'에 기고한 <Savings and Loan Crisis>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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