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위기'설' 뿐이라면 사정이 낫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서민 가계는 심각한 위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이미 실질소득은 마이너스로 떨어진 상태고 서민가계의 가장 큰 위협인 고금리 구도는 좀처럼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민의 빈곤층 전락 지름길로 변한지 오래인 자영업 시장 참여자는 과거에 비해 줄어들고 있다.
'검은 9월' 서민 경제 파탄 시기 되나
서민층을 억누르는 가장 큰 위협요인은 바로 고물가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반면 임금은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1일 통계청에 따르면 8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5.6% 상승했다. 유가 하락분이 곧바로 물가에 반영되면서 당초 예상보다는 낮은 수치가 나왔다. 그렇다고 예단하기에는 이르다. 고물가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7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9%, 6월은 5.5% 뛰었다.
서민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각종 생필품값은 특히 높은 수준으로 뛰어오르고 있다. 지난 7월 16일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서울시내 주요 백화점과 대형마트, 대형 슈퍼마켓 등 300여 곳에서 팔리는 11개 생필품 값을 지난 3월 17일 가격과 비교한 결과 이들 생필품은 단 넉 달 만에 최고 14.5% 가량 올랐다. 11개 생필품은 밀가루, 라면, 세제, 식용유 등으로 구비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물건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소비위축을 우려해 최대한 인상이 늦춰지던 각종 서비스료도 서서히 뛰어오르고 있다. 지난 2005년부터 단 한 차례도 오른 적이 없던 변리사료는 지난 6월 5.1% 상승했고 공인회계사료(5.3%) 역시 지난 2005년 6월 9.4%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의 인상폭을 기록했다. 학생을 둔 가계에 가장 큰 부담 중 하나인 사교육비가 급등한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이다.
특히 환율이 새달 들어 폭등세로 출발하면서 1100원 선을 훌쩍 넘어섬에 따라 9월 소비자물가는 수입물가 상승으로 유가 하락 프리미엄을 누리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은 더 암울해진다.
같은 기간 임금인상률이 5%대 초반에 머물렀다는 점 또한 부정적 기운을 물씬 풍긴다. 이는 지난 3개월간 실질소득이 감소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서민들의 월급봉투가 과거보다 더 얇아졌다는 얘기다.
순소득보다 순지출이 더 많은 적자가구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올 1분기 가계수지동향에 따르면 적자가구는 전체의 31.8%에 달한다. 세 가구 중 한 가구가 적자인 셈이다. 특히 소득 1분위 가구(소득 기준 하위 20%)는 1분기 기준으로 매달 86만9900원을 벌어 121만5500원을 지출했다. 매달 44만 원씩 적자를 보는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정이 이러니 당연히 "IMF 사태 때보다 어렵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심지어 여권 관계자도 서민경제에 한해서는 우리 경제가 심각한 상황에 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의장이 지난달 31일 "민생고통의 측면에선 과거 IMF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게 사실"이라고 말한 게 대표적 사례다. 그는 다만 "거시경제 지표와 외환 사정 등을 감안할 때 '위기'로까지 발전될 수준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서서히 붕괴하고 있는 자영업자…구제대책 있나
특히 서민가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영업자층이 이미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우려를 더 키운다. 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자영업자의 1인당 연평균 소득은 1377만 원에 그쳐 임금근로자(2570만 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임금근로자에 비해 더 많은 자영업자가 저소득층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이들의 연소득은 10년 전보다 오히려 260만 원가량 줄어들었다.
문제는 자영업자가 고물가-실질소득 감소의 직격탄을 그대로 얻어맞고 있다는 데 있다. 임금근로 가계에서 실질소득 감소분을 메우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소비지출 축소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당연한 수순이다. 우리나라 최하위 자영업자층의 61.4%가 경기변동에 가장 민감한 도소매음식숙박업에 종사한다.
내수시장 위축이 자영업자층에 어느 정도로 큰 타격을 주는지는 통계가 증명한다. 지난달 17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올 상반기 자영업자 수는 594만5000명에 그쳐 지난해보다 7만3000명이 줄어들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종업원이 없는 이른바 '생계형자영업자'가 5만2000여명에 달해 영세자영업자의 몰락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이 드러났다.
이런 어려움을 반영하듯 한국전화번호부의 조사에서 적어도 마음만은 풍성해야 할 이번 추석 때 "고향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 자영업자가 조사 대상자의 62%에 달했다. 귀향을 하지 않는 이유로는 '귀향 비용이 부담스러워서'라고 답한 이가 41%에 달했다. 반면 '연휴를 이용한 국내외 여행을 위해' 라고 답한 응답자는 2%에 그쳤다.
한국의 자영업자 중 상당수가 지난 외환위기 이후 임금근로 시장에서 퇴출된 이들이다. 자영업 시장에서 퇴출된 자영업자가 임금근로 시장으로 재흡수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들 대다수는 자영업 시장에서도 퇴출된다면 임금근로자로 다시 편입하지 못해 노동통계에서 말 그대로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는 사회불안으로 이어진다.
뚜렷한 연관 관계를 찾기는 어렵지만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신규 노숙자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서민 임금근로자-영세 자영업자 고리에서 이탈한 이들 중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서울신문>이 지난 6월 전국 12개 노숙인 봉사단체와 공동으로 노숙자를 조사한 결과 서울 영등포역 주변의 노숙자는 지난해 5월 600여 명에서 올해 1050명으로 늘어났다. 경기도 군포의 ㄷ센터에 따르면 지난해는 한 명도 없던 노숙인이 올해 20명 생겨났다. 지난해 60여 명이던 성남역 노숙인은 올해 100명이 넘어섰다. 이에 대해 자원봉사단체 관계자들은 "최근 고물가로 인한 생계곤란과 비정규직 문제로 인한 일자리 감소 때문에 노숙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민 가계 붕괴하는 상황서 정부 내놓은 대책은 '감세'가 전부
서민층의 붕괴가 이처럼 현실화하고 있는데도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대책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위기설이 퍼지는 가운데 정부가 내놓은 대책의 큰 골자는 부동산 시장 활성화와 대규모 감세가 전부나 마찬가지다.
특히 1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감세안을 놓고는 자유선진당 등 보수층에서도 비판이 나올 지경이다. 기획재정부는 이날 소득세와 법인세, 부동산세 등을 대대적으로 감면해 향후 5년간 25조 원에 달하는 세금을 깎아주는 세제개편안을 발표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 수준으로 난 상황에서도 세수를 오히려 줄이는 '이상한' 선택을 정부가 한 것이다.
양도세 고가주택 기준상향의 경우 대상인 6억 원 초과 주택은 29만 가구(작년 기준)로 전체 주택 729만 가구 중 4%에 그친다. 고가주택 기준이 9억 원 초과로 올라가면 이 중 18만 가구(2.5%)는 1세대 1주택과 거주요건을 충족하면 양도세를 내지 않는다. 과표적용률 동결, 보유세 세부담 상한선 하향조정, 농어촌특별세 폐지 등 종합부동산세 개편방안도 마찬가지다.
중산층 이상에 혜택이 집중되는 감세 카드를 정부가 빼든데 반해 서민이나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은 소득세 정률인하 정도가 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세청 조사에 따르면 2004년 현재 근로소득 과세자는 전체 근로자의 54%에 불과하다. 한국 노동자의 절반가량은 소득이 적어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들은 이번 정책으로 아무런 혜택을 입지 않는다.
반면 고소득층은 상속세율 인하와 종부세 완화 등으로 부담이 대폭 줄어들었다. 그만큼 그들이 내는 세금도 줄어든다. 특히 상속세와 연동된 특성 때문에 상속세율 인하에 따라 증여세율까지 자동적으로 내려가게 돼 재벌가 자녀들은 큰 부담 없이도 부모 소유의 재벌그룹을 합법적으로 증여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결과적으로 정부가 현재까지 내놓은 대책만 놓고 본다면 이미 붕괴하기 시작한 서민 가계를 위한 대책은 찾아볼 수 없다. '경제 위기설'이 자꾸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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