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다음이 서비스 하는 '아고라'에 모인 누리꾼들은 '키보드 워리어(행동은 하지 않고 방 안에 앉아 컴퓨터 자판으로만 불만을 쏟아내는 누리꾼을 비하하는 속어)'가 아니었다.
아고라는 촛불 집회 기간 내내 온-오프라인을 연결하는 통로로 자리 잡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아고라'가 큼지막히 쓰인 깃발 밑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어느덧 이곳은 시민의 자발성으로 대표되는 촛불 집회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아고리언(아고라 사람들)'은 아고라 활동을 통해 무엇을 느꼈을까. 아고라는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과연 아고라가 가진 부작용은 없을까. 아고라 사람들이 말하는 아고라는 어떤 곳일까.
"이번 집회로 아고라에서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진' 아고리언 배성용 씨(29, 한국디지털대 1학년)는 이번 '광우병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고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토론방이 어떤 곳인지도, 청원방이 무얼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안티이명박 카페'에서 온라인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 '안단테(대통령 탄핵 서명을 받은 고교 2학년 누리꾼)'가 아고라 청원방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 서명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아고라를 알게 됐죠. 단식투쟁을 결심했는데 카페 회원께서 '아고라에도 글을 올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아고라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배성용 씨는 지난 달 8일부터 16일까지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때문에 건강이 악화돼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배 씨는 HIV(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 에이즈의 병원체) 감염자다.
다른 누리꾼 역시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촛불 집회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고라는 누리꾼 사이에서 크게 회자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인 페르마타(31)는 "촛불 정국이 이어지면서 언론기사에서 아고라가 몇 번 보도됐다. 그 때부터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아고라에서 '아고라 기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고리언 스스로가 정보를 찾고 취재를 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다.
아고리언은 아고라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로 '소통하는 법'을 꼽는다.
배성용 씨는 "예전에는 감성적으로 살았는데 아고라에 글을 올리고 사람들과 댓글로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닉네임을 밝히기 꺼려한 박모 씨(41, 자영업)는 "'소통을 할 줄 모르는' 정부를 맞으면서 오히려 나는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배움의 장은 아고라다"고 대답했다.
박 씨는 주로 아고라 자유토론방에 올라오는 글을 읽기만 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도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솔직히 <한겨레> 신문이 '빨갱이 신문'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아고라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읽으며 '내 생각이 틀렸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아고라 활동을 통해 자부심을 느낄 때도 많다. 배성용 씨는 "아고라 깃발 앞에 서서 행진을 하면 시민들이 '아고라다'하고 환호한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페르마타는 "아고라 기자단 활동을 하면서 지난 번 <한국방송> 앞에서 극우단체 회원들이 각목을 이용해 여성을 집단폭행한 사실을 아고라에 알렸다. 사실상 아고라 기자로서 첫 특종이었던 셈인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박 씨는 "친척과 친구 등에게 <한겨레>나 <경향신문>, <시사IN>을 읽으라고 권하고 다닌다. 다들 처음에는 이상한 눈길로 나를 봤는데 얼마 전에 한 명이 <경향신문>을 구독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연락이 왔다. 내가 뭔가 큰 일을 해낸 것 같았다"고 답했다.
아고라의 부작용, 있다
아고라가 이번 촛불 정국에 끼친 영향은 크다. 고교생을 처음 거리로 모은 동력도,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비폭력 기조를 외쳤던 힘도, 거리 행진을 주도하고 쇠고기 재협상 촛불을 공영방송 지키기 촛불로 옮겨가게 한 추진력도 모두 아고라에서 나왔다.
누리꾼들이 스스로 이름 붙인 일명 '아고라 CSI'의 활약 또한 눈부셨다. 경찰이 "폭행이 없었다"고 말하면 어김없이 이를 반박하는 증거자료가 올라왔다. 전국 각지에서 속속 올라오는 현장 속보는 기자들이 따라가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아고라의 위상이 워낙 급부상하다 보니 경찰이 연행자에 대고 "아고라가 뭐하는 단체야"하고 묻는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다.
하지만 이렇게 위상이 커지다 보니 부작용도 비례한다. 아고리언은 아고라가 가진 가장 큰 부작용으로 정보의 부정확성을 꼽았다.
페르마타는 "솔직히 아고라에 '카더라 통신'이 많이 나도는 편이다.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나간 아고리언이 올리는 사진 일부는 초상권을 침해하는 것도 있다"고 답했다.
닉네임을 밝혔지만 '절대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이모 씨(36, 직장인)는 "본의 아니게 아고라가 마치 이번 시위의 주도세력인 양 비춰지기 시작했다. 시민이 그만큼 큰 기대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보지만 아고라 자체가 시민이 모이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실제 이 점 때문에 아고라 내에서는 '시위 때 깃발을 없애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마다 있는 '악플러(악의가 있는 댓글을 다는 누리꾼)'의 횡포 역시 이곳에 존재한다. 배성용 씨는 유명세에 따라오는 악플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예전 성적 취향(그는 동성애자다) 때문에 병무청 상담란에 병역 문제를 묻는 글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게 기사화 됐어요. 본의 아니게 아우팅(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는 말)한 셈이죠. 그런 걸 어떻게 찾아내서 입에 담지 못할 악플을 남기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박 씨 역시 감정적인 글을 자제해주기를 부탁했다. 그는 "촛불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비난 글은 눈이 찌푸려진다"며 "모두가 '세상을 바꾼다'는 자부심만큼 책임질 줄 아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겨레>과 <경향신문>에 응원광고를 올려 화제가 된 패션 커뮤니티 '소울드레서' 회원이기도 한 김모 씨(26, 취업준비생)는 "'6.10 촛불항쟁' 이후에도 온라인은 죽지 않았는데 오프라인 열기는 확 죽은 것 같다"며 "아고라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조금 더 열심히 오프라인 활동도 병행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고라는 내 삶을 이렇게 바꿨다"
아고라 활동을 통해 많은 누리꾼이 '생활 투쟁가'가 됐다. 조·중·동 절독 운동이 일어났고 생활 속 반미 투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그 동안 상대적으로 판매부수가 낮았던 신문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삼양라면 먹기 운동'이 벌어지고 '르까프 칭찬하기 응원'이 줄을 이었다.
양심선언을 한 김이태 박사 등 몇몇 공무원은 아고라에서 순식간에 '영웅'으로 떠올랐고, 일부 이해하기 어려운 어록을 남긴 유명인은 '열사'로 비틀어졌다. 무엇보다 아고라는 평범했던 우리 이웃의 삶을 뒤흔들어놨다.
다음은 아고라에 몸을 던진 이들이 말하는 '아고라가 내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한 보고서다.
①배성용 : 단식 투쟁을 하면서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HIV 때문에 면역력이 낮아져 감기 걸렸지만 쉽게 낫지 않는다. 아마 지금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면 CD4(면역세포 수치)가 200 이하로 나올 지도 모르겠다. 700이 넘어야 정상인인데 에이즈 환자 대부분이 500 이하다. 만약 이 상태로 진료받으면 약 복용 진단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평생 약을 먹다 죽어야 한다. 어떻게 관리해서 얻은 건강인데…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타 큰 부담을 느낀다는 점도 솔직히 괴롭다. 스트레스성 거식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고라 깃발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다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수만 명의 사람이 우리와 같이 걷고 있다. 즉석에서 토론이 벌어지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내게 와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어본다. 사람들이 내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 같다. 나도 그냥 보통 시민일 뿐인데… 경찰 정보과 형사도 나를 알아본다.
잃은 게 너무 많지만 그 정도 각오를 하고 투쟁을 시작했다. 반면 얻은 것도 많다. 아고라 활동을 하면서 주로 만나게 된 분들이 몇 분 있는데 예전에 알던 형 한 명을 빼곤 모두 처음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동성애자라 해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자살을 생각할 때도 아고라에서 알게 된 누님이 위로를 해줬다. 소통의 중요성을 처음 깨달은 계기가 됐다.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이명박 정권이 국민을 위할 때까지 싸울 생각이다. 아고라가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②페르마타 : 아고라에서 예전 PC통신을 할 때 '플라자'라는 공개토론방에 접속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 때처럼 밤낮이 바뀌었다. 아고라에 올라오는 정보가 워낙 많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모니터를 게을리하면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만큼 중독성이 있다. TV를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항상 아고라를 켜 놓는다. 스스로 아고라 기자단의 이름을 달게 되면서 더 바빠진 것 같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아내와 크게 다투기도 했다. 아내가 '못 살겠다'는 말까지 해 요즘에는 자제하고 있다. 아내 몰래 접속한다.
③소울드레서 회원 김모 씨 :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인데 사실 지장이 너무 많다. 하지만 취직한다고 해도 이 상태로 시간이 지난다면 내가 생각하는 나라가 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어 촛불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걸 잊고 공부하자'고 생각했지만 아고라에서 이런저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져 결국 거리로 나간다. 시위 현장에서 구입한 지 두 달 된 핸드폰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④'가짜 386' 박모 씨 : 소위 말하는 386세대다. 하지만 가짜다. 나는 그 때 한 번도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항상 부끄러운 마음이 컸다. 민주화 투쟁 관련 소식이 방송에 나올 때마다 '아이들이 물어보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컸다. 아고라 덕분에 스스로에게 당당해질 기회를 얻었다. 아내가 어느날 나보고 '요즘 표정이 좋다'는 말을 했을 때 가슴 뭉클한 뭔가가 느껴지더라.
⑤닉네임은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직장인 이모 씨 : 아고라는 각계각층의 사람이 제공한 정보가 유통되는 곳이다. 단체의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정부나 경찰이 예전의 시위를 보는 시각으로 아고라를 대하니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한 때 '싸워야 이긴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비폭력이 이긴다는 것을 느꼈다. 정부의 압력이 강해지면서 어느 정도 동력이 줄어들 것 같다는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아고라로 대표되는 온라인은 절대 죽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촛불이 생활 곳곳에서 타오르는 계기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아내와 쇠고기의 위험성에 대해 얘기하고 민영화의 문제점을 찾아본다. 평범하게 직장 생활에만 안주했으면 절대 얻지 못했을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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