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과연 난장(亂場)이었다. 그것은 마치 5일 장이 들어선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놀라운 광경이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이미 권력의 진압대상이 아니다. 어느새 승리한 자들의 환희가 가득한 자리다. 승패는 확연했고, 광화문 광장은 이제 어떤 권력자도 범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성역을 여유롭게 확보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외된 자는 오직 독선의 권력뿐이었다. 그건 자초한 비극이다. 거대한 컨테이너가 광화문 광장을 괴물처럼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명박 정권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권력의 바리케이드는 되지 못했다. 민중의 지혜는 경악할 정도였다. 시위 저지선으로 세워놓은 컨테이너는 넘을 수 없는 권력의 성채가 아니라, 애초에 조롱의 대상에서 점차 시민 민주주의의 전리품이 되어갔다.
권력의 컨테이너, 시민 민주주의 전리품으로
그건 어느새 광장의 게시판이 되어갔으며, 스티로폼으로 세워진 인권 탑 발언대의 역동성 앞에서 과거의 낡은 유물처럼 초라하게 서 있었다. 누가 지고 누가 이기고 있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
시민들이 스스로 만든 아크로폴리스는 바로 그곳에서 창출되었으며, 마침내 집단 토론의 치열하고 진지한 결론은 승리의 상징적 행위로 마무리 짓는 것으로 이어졌다. 권력이 설치해놓은 철골의 방어선은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패배를 증명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을 뿐이다. 촛불을 든 시민 민주주의는 이 나라의 집단지성이 어떤 역량을 보이고 있는지 전 세계에 여실히 과시했고 하나가 된 촛불은 그 어떤 것으로 끌 수 없음을 일깨웠다.
돌이킬 수 없는 길
그런데 그 하나는 그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의 대오가 획일적으로 모든 것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시민 민주주의의 직접행동을 벌이는 현장에 합류한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개성을 즐겁게 지키고 있었다. 중심은 다양하게 존재했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분명한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그건, 민주주의의 흥겨운 에너지가 마침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21년 전 6.10 항쟁이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군사주의 정권에 항거해서 민주주의의 기본적이고도 최소한의 판을 짜는 일에 주력했다면, 그 스무 해가 지나는 동안에 우리는 민주주의가 오만과 독선에 찬 권력자에게 위협당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전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런데 그건 한으로 응어리진 분노의 폭발을 넘어서서, 상대를 압도하는 여유와 웃음, 그리고 "흥"의 위력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춤추는 혁명의 유쾌함
눈에 핏발이 선 채 비장하게 일어서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웃으며 유연하고 탄력 있는 힘을 내공으로 가진 시민 민주주의의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춤을 추고 노래하며 유쾌한 반란을 시작한 10대 소녀들은 바로 이 시민 민주주의 주체의 씨알들이 되었다. 과연 춤출 줄 모르는 자의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갈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혁명의 문으로 인도되었다. 그건 우리가 지불했던 과거의 고통과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춤추는 혁명세대의 속도를 따르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너무 타박할 필요가 없다. 이미 낡아버린 세대라는 자기규정으로 스스로 초라해질 까닭이 없다. 본래 부모는 세월이 지나면 늙게 마련이며, 후손의 재롱으로 기뻐하며 회춘의 감사를 누리는 법이다.
우린 바로 그렇게, 회춘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와 만나는데 성공하고 있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고, 엄마는 아들의 손을 잡고 광장의 흥겨움을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은 21세기의 선구자가 되었다. 어떻게 아이들이 자라게 될 지 과연 눈에 선히 보이지 않는가?
배를 띄우고 날개를 펴 날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이 합류의 거대한 바다는 이제 우리가 배를 띄울 자리다. 물이 얕으면 배를 띄우고 싶어도 그리 하지 못한다. 권력의 무지와 오만을 단숨에 무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시대의 기(氣)가 시민 민주주의의 광장을 열기 높게 채우고 있다. 하늘의 기운이 충만하지 않으면 거대한 새, 붕(鵬)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지 못한다. 물이 그득 차고 하늘의 기운이 또한 이리도 팽팽하니, 무엇을 하지 못할까?
광화문 광장에서 저 숭례문에 이르는 길까지 밝혀진 촛불의 함성과 행렬은 우리 모두의 자부심이 되었고, 쇠퇴할 수 없는 능력이 되었다. 역사에서 승리하는 경험을 쌓아나가는 것은 두고두고 미래를 위해 소중한 자산이다. 4.19와 5.18, 그리고 6.10과 또 하나의 6.10은 계속 진화해왔으며 앞으로 어떤 진화의 지점에 도달할 것인지 아무도 미리 예단할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의 힘에 놀라워하고 있고 그로써 진정 역사를 이끌어 가는 이는, 순결한 영혼과 맑은 마음, 그리고 지치지 않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임을 입증해냈다.
시민과 진보진영의 합류
굴곡과 고민, 그리고 불안의 지점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배후설이 제기되면서 시민과 진보진영은 권력의 분리통치 전술에 또다시 갇힐 위기에 처했었다. 시민의 소박한 열정과 조직적으로 훈련된 진영의 결합이 마치 죄악인 것처럼 매도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어나갈 셈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칫 패배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러나 시민 대중은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지혜로웠다.
촛불 집회의 역동성 앞에서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이끄는 운동의 위계질서는 당연히 무너졌고 그것은 바람직한 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시민과 진보진영을 가르는 논리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사건은 아니다. 시민은 생동감 있게 상황에 대처하는 동시에 누군가 책임을 맡고 상황전개에 필요한 기본 봉사를 하기를 원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권력의 공세 앞에서 훈련된 대응에 역부족을 느낄 수 있었다. 대책위는 시민들의 비판도 받았지만, 이들의 존재 없이 시민 민주주의의 응집력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은 또한 아니었다.
권력의 분리통치전술 와해되어가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시민과 진보진영의 변증법적 합류가 이루어져 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처음에 거부감을 일으켰던 운동권의 노래와 언사는 차츰 전체적인 다양성 속에 하나로 자리 잡는데 시민들에게 용인되기 시작했다. 낡은 진보는 새로운 기운과 만났고 시민들은 그간 희생적으로 역사에 헌신해왔던 운동권과 진보진영의 인사들에 대한 오해와 배격을 철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권력의 분리통치전술은 이로써 약발을 잃어갔다. 비폭력을 끝까지 견지했던 것은 시민 민주주의의 정치적 도덕성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었다.
실로, 시민들은 옳은 주장이면 그것이 누구의 주장이든 받아들였고, 시민 민주주의의 큰 틀에서 이 모두를 아울러 용해해나가는데 솜씨를 보였다. 시민 민주주의가 어느 한 중심을 기본으로 해서 여타의 것에 대한 배타적 일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운동권이든 진보진영이든 시민단체이든 또는 기성의 정치권이든 이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다양성의 축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민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서로 배우고 익히며 새로운 정치와 문화를 창출하는데 마술처럼 이바지했다.
내면의 성찰 시간 속으로
이후의 정치적 대안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일은 바로 이 시민과 운동, 그리고 진보진영이 어떻게 서로 대안의 집결처를 만들어 가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제 앞으로는, 얼마나 모일 수 있는가가 관건이 아니다. 그건 이 시민 민주주의의 힘을 물리적으로만 파악하는 단견에 불과하다.
이미 시민 민주주의의 영혼은 모두의 가슴에 내면화되어갔으며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스며들어갔다. 직접 민주주의의 맛을 본 시민들은 정부와 대의 민주주주의가 누려왔던 권위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권력은 직접 민주주의의 수행자에 불과한 것이지 그걸 지휘하거나 그 위에서 힘을 누리는 존재는 더 이상 될 수 없게 되었다.
주체는 등장했다. 광장이 개방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2008년 5월과 6월의 열기가 새로운 차원으로 내면화하고 성찰의 재료가 되어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걸친 혁명의 시작이다. 역사와 철학이, 문학과 예술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동아시아 전체에 줄 장래의 충격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정치의 5일 장을 위해
그래서 말인데, 광화문 광장에는 정기적인 5일 장이 서야 한다. 정치문화의 축제가 벌어지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차 없는 거리가 인사동에만 국한 될 이유가 없다. 광화문 광장은 개방되어야 한다. 집단 지성의 아크로폴리스는 이제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통의 힘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건 고대 그리스의 역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주체들이 출현하지 않았는가?
불신의 대상이 되고만 대의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능은 속히 복구되어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의 위력을 대표하는 현장이 되어야 함과 동시에, 시민 민주주의의 직접행동의 장이 그렇다고 소멸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모든 것의 종료가 아니다. 대의 민주주의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역동성이 지속되어야 하는 독자적인 장의 존재는 당연히 필요하다.
광화문 촛불의 혁명은 단지 대의민주주의가 가진 한계를 돌파하는 데에만 그 의미가 멈추어 있지 않았다. 시민 민주주의의 직접 행동이 창출할 수 있는 독자적인 에너지가 있음을 우리는 모두 발견했고 또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의 5일장이 있어야 또한 대의 민주주의의 생명력이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광화문 광장을 개방하라
나오라, 시민들이여. 언론과 방송은 물론이고, 출판사와 문화 패거리, 정당과 시민운동 단체는 물론이고 장애인들과 이주 노동자들을 비롯해서 그동안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은 이 광화문 아크로폴리스를 자신의 무대로 삼으라. 거리에서 노래와 연극이 펼쳐질 것이고 설치미술과 춤이 또한 있게 될 것이다. 새로운 놀이 문화 역시 탄생할 것이다. 외국인들도 오라.
카메라의 조명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디지털 언론은 이미 그 위력을 입증했다. 치열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각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광장은 날이 갈수록 뿌듯해져갈 것이다.
실로, 세계적인 순례의 장이 될 것이다. 모두의 교육현장이 될 것이다. 시와 춤과 음악과 드라마가 펼쳐질 것이다. 보고 싶었던 배우와 가수, 그리고 명사들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나게 될 것이다. 훌륭한 연설가도 만들어질 것이며, 뛰어난 조직가도 나타날 것이다.
새로운 대안은 그곳에서
이러면서 새로운 지도자도 태어날 것이다. 새로운 대안의 세력도 시민들에 의해 그 존재가치가 승인되는 현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광화문(光化門), 이름 그대로 빛으로 가득한 미래의 문을 여는 그곳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오랫동안 소수에게 독점되었던 <광장>은 이제 비로소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다. 역사는 이렇게 진전한다. 우리는 그 격동의 시간을 온 몸으로 기록하는 승자가 되고 있다. 이 승리는 그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다.
+이글은 [진보정치]에도 동시게재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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