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된 비판이 나왔다. 특검의 수사가 삼성에 주는 '면죄부'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원래 수사 의지가 없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삼성 그룹의 비리를 내부고발한 김용철 변호사는 18일 기자회견에서 "이씨 일가 수사하랬더니 왜 나를 수사하냐"며 특검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성공한 재벌은 처벌할 수 없는 현실'을 비꼬는 만평이 나왔다.
삼성 그룹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 1987년 이후 삼성은 주력 업종을 전문화한다는 취지로 식료품의 CJ, 제지업의 한솔, 유통업의 신세계 등으로 계열분리를 단행했다. 이들은 '위성재벌'이 돼, 주력업종 외 계열사를 늘려가면서 '삼성 일가'의 영향력을 더욱 키웠다. 2005년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의 삼성 경영진 정‧관계 불법로비 고발에도, 특검 조사에도 삼성은 살아남았다. 지난 십여 년간 재벌개혁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졌음에도 삼성은 이를 비웃듯, 더욱 강력한 재벌로 진화했다.
'재벌개혁'을 통해 더 강력해진 재벌
<재벌개혁의 현실과 대안 찾기>(후마니타스 펴냄)에서 송원근 진주산업대 교수는 "결과적으로 재벌개혁을 통해 재벌이 더 강력해졌다"고 진단한다. 외환금융위기 이후 계속된 재벌개혁정책이 '실패했다'는 말이다. 얼핏 보기에는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가 과거보다 개선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벌 집중화 현상의 '진화'였을 뿐이라는 얘기다. 범삼성 그룹의 출자총액제한집단 대비 자본총액이 2005년 기준으로 84.9%에 달한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경제력의 일부 재벌 집중 현상이 강화된 것이다.
재벌 '개혁'은 기대와는 다른 방향에서 뚜렷한 영향력을 보였다. 인력 감축이다. 30대 대기업의 종업원 수가 외환금융위기 직후인 1997년 88만 명에서 2004년 67만 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재벌개혁 과정에서 국내 최대의 그룹 집단으로 떠오른 삼성 그룹의 경우, 1997년 말 총 피고용자 수는 16만7000명에서 2년 만에 11만3000명으로 줄었다. 갈수록 노동자의 재취업이 어려워지는 현실을 감안하면, 재벌의 성장이 이제 사회 문제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송 교수는 이 밖에도 기업 구조조정이 재벌 그룹에 미친 긍정적 영향, 내부감시장치 강화 노력이 결국은 이사회의 지배주주 견제 기능 '약화'로 이어진 과정 등을 꼼꼼한 자료 분석으로 고증했다. 이 책에서 인용된 자료의 방대함과 적합성은 기존 재벌 문제에서 '말'에 주로 의존하던 한계를 말끔히 극복했다.
"경제가 어려우니…" 재벌 문제를 덮어두자?
한편에서는 제2금융권의 급성장으로 외국자본의 경영권 침해 의도가 높아졌으니 재벌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출자총액제한제도, 금산법 등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재벌 규제 정책은 모두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정부에서 하고 있다. 특검 발표의 내용에도 이런 논리가 상당 부분 섞여 있었다.
심지어 일정 부분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된다. 사회적 대타협을 위해 재벌의 지배력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장하준 교수가 대표적이다.
송 교수는 이를 '사이비 민족주의'라고 비판한다. '사회적 대타협'은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도 지적한다. 다음은 이에 대한 송 교수의 말이다.
"스웨덴 등 강소국의 사민주의적 경제모델의 핵심적 제도는 전국이나 산업 수준에서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잘 조정된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 시스템이다. …(중략)… 그런데 외환금융위기 이후 세계 자본시장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깊숙이 편입된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퇴조 현상이나 사회 파트너들 사이의 낮은 신뢰는 초보적인 수준에서의 사회적 타협 가능성조차도 의심스럽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재벌개혁은 대안 찾기를 위한 첫걸음
결국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재벌은 개혁돼야 한다는 게 송 교수의 주장이다. 그가 생각하는 우리 경제 대안의 방향은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기업모델과 제도적으로 조응하는 대안적 경제 체제, 발전모델의 모색'이다. 이를 위해서는 재벌가뿐만 아니라 주주, 채권자, 거래당사자, 종업원, 고객 등 기업의 이해관계자 모두에게 정당한 권익이 보장되는 지배구조가 필요하다. 결국, 재벌의 권력을 제어하지 않고서는 우리 경제의 발전은 어렵다는 얘기다.
재벌개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총수 중심의 기업 지배구조 지양이다. 재벌 문제의 본질이 '총수가 멋대로 계열사 간 자금 흐름을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주주 이익을 침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송 교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개혁의 방향은 다수 독립 계열사들의 정상적인 경영권 유지에 맞춰질 필요가 있다. 또 재벌의 금융계열사 내부화를 제도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송 교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 목표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언급은 원론적으로는 정부의 재벌 정책이 부분적이지만 이해당사자주의 기업모델을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합리적 의사 결정 체계'의 형성은 기존 재벌들의 총수 지배력의 약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의 재벌개혁을 통한 지배구조 개혁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송 교수는 '총수의 지배력 약화'를 위한 방안으로 출자총액제한제도 강화, 순환출자 금지 등을 정부에 요구한다. 금산분리 원칙 강화, 불공정 하도급 바로잡기 등도 필요하다. 국가적 차원의 노동시장 규율도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개혁이 과거에도 물론 있었다. 재벌 키우기가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정부의 명확한 의지와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총수 지배력 약화'라는 목표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책은 꼼꼼하고 성실하다. 거침없는 주장보다는 차분하고 냉철한 노력이 저자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재벌 체제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나름의 성과를 찾아주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대안 찾기를 위해 들인 공도 돋보인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서도 희망을 품기란 어렵다. 삼성 그룹을 비롯한 몇몇 재벌의 시장 지배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책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정부 정책의 변화가 눈에 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순방에서 자신의 친재벌 정책의 비판을 의식한 듯 "더욱 친기업적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은 '규제 완화'다. 금산분리 완화,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등이 속속 실현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의 표현대로 '잃어버린 십년'을 찾기 위한 움직임의 일환인 듯하다.
지난 십년은 재벌 가문과 정반대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기간이다. 재벌은 급속한 신자유주의의 세례 속에서 더욱 커졌다. 이건희 회장 일가에 내려진 특검의 면죄부는 그 상징이자 결과다.
많은 사람이 이에 반발하고 있다. 경제 투명성을 강화하고 경제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이에 못지 않게 삼성을 응원하는 목소리도 높다. 안 그래도 힘든 우리 경제가 더 휘청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는 미래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지금을 논한다. 재별개혁은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개혁의 부작용이 '지금' 생길 수도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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