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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비즈니스 프렌들리? 국제 망신 당할라"

[기고] 필리핀 진출한 한국 기업의 '낯익은' 노조 탄압

불안한 정치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필리핀은 여전히 사회활동가에 대한 납치와 살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지역이자 국제적으로 최악의 노동인권 탄압국가로 꼽히는 나라 중 하나다. 여기엔 한국 기업도 관련돼 있다. 지난 2007년, 한국 기업은 필리핀에서 가장 노동자의 인권을 탄압하는 기업들로 손꼽히는 영광(?)을 누렸다.

필리핀의 가비테 수출자유지역(Cavite Economic Processing Zone)은 필리핀 정부가 외자유치를 위해 조성한 공단이다. 이 공단에 진출한 업체들은 면세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강력한 무노조·무파업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공단 내에서 노조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공단의 약 5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 업체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노조를 결성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 애써왔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해 한국 업체인 청원패션과 필스전이 노동자들을 살해위협하고 납치를 시도한 사건은 국제인권문제로 비화됐다.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한 필리핀 노동자들
▲ 지난해 6월 괴한들에 의해 납치됐던 아로라 씨(왼쪽)와 노멜리타 씨. 이들은 지난해 8월 6일 새벽, 뒤로 보이는 곳에 속옷만 입혀진 채 버려졌다. ⓒ국제민주연대

청원패션과 필스전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에 나선 건 지난 2003년이다. 회사측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2004년 노조를 설립했다. 그러나 회사는 단체협상에 응하지 않은 채 노조원들에게 해고위협을 가하며 탄압을 지속했고, 두 노조는 2006년 9월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에 돌입하자마자 필리핀 당국은 노조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노동자들은 이후 회사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에 돌입했고 필리핀 정부는 농성장을 3개월 동안이나 봉쇄하면서 음식물 공급까지 차단했다. 천막농성장마저 회사에 의해 철거당해, 이들은 비닐을 쳐놓고 3번의 태풍과 찌는 듯한 더위를 견뎌야 했다. 농성장을 이탈하면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여성노동자들은 구덩이를 파서 화장실을 만들고 밥을 지어 먹으면서 약 9개월을 버텼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생활마저 포기해야 했던 농성은 2007년 6월 4일 청원패션 농성장에 난입한 괴한들이 M-16 소총으로 위협하는 사건과 2007년 8월 5일 필스전 농성장에 괴한들이 들어와 여성노동자 2명을 납치해 길가 구덩이에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끝나 버렸다.

이 기간 동안 노조는 필리핀 노동자지원센터(Workers Assistance Center)를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필리핀 노동부와 대법원을 통해 노조가 합법적 노조라는 것을 인정받았고, 노조원들에 대한 폭력사태를 필리핀 검찰에 고발했으며 필리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와 폭력, 그리고 납치 및 살해위협이었다.

한국에서의 대응

필리핀 현지 한국 기업의 노조 탄압이 끔찍한 폭력 사태로까지 치달았다는 소식을 접한 국제민주연대와 민주노총은 작년 9월 두 노조를 한국에 초청했다. 다국적기업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인권기준을 가이드라인으로 만든 'OECD가이드라인'이 이들 노조에게 남은 선택이었다. 두 노조와 필리핀 노동자지원센터, 국제민주연대와 민주노총은 지식경제부 투자정책과 측에서 간사를 맡고 있는 한국 OECD가이드라인 연락사무소에 공동 진정인 자격으로 2007년 9월 3일 이 사건을 제소했다. 사무소는 10월 1일 답변을 통해, 청원패션의 경우 본사가 부도가 났기 때문에 필스전만 다룰 수밖에 없다는 입장과 함께 필스전의 100%지분을 가진 한국 본사 ㈜일경의 답변을 보내왔다.

답변서에서 ㈜일경은 "회사는 폭력사태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며 "필리핀 현지법을 준수하며 기업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민주연대와 민주노총은 이에 반박하기 위해 지난해 11월 직접 필리핀 현지로 떠나 추가로 증거를 수집했다.

뻔히 보이는 회사의 거짓말
▲ 필스전 회사의 변호사가 운영하는 경비업체 ⓒ국제민주연대

현지조사 결과, 약 5㎏에 달하는 문서에서 필스전 노조가 합법적이고 배타적인 단체협상권을 가진 노조임이 입증돼 있었다. 이미 필리핀 대법원은 2006년 11월 20일 판결을 통해 '법적 종지부'를 찍어놓은 상태였다. 우리는 필스전 경영진이 이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현지 대표인 최양선 씨를 만났다.

그의 답변은 한마디로 "나는 대법원 판결을 본적이 없다"였다. 그는 또 "사측 변호사가 주소지를 옮겨 대법원 판결을 전달받지 못했다"며 "나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관해서 소송을 걸려면 얼마든지 걸어보라"고 덧붙였다.

더군다나 최 대표는 폭력사태에 대한 질문을 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폭력사태를 직접 지시한 바는 없으나 필리핀 당국에 회사 앞에 밥을 해먹으면서 냄새를 피우니 치워달라고 했다"고 답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주소를 옮겨 고객에게 판결문을 전달하지 못했던 무능한 변호사'가 운영하는 '선포트(SUNPORT)'라는 경비업체는 판결이 나고서 한참 뒤인 2007년 8월 1일에 필스전 경비업체로 선정됐다는 점이다.

우리는 괴한에게 납치를 당했던 필스전 노조 위원장 직무대행 노멜리타 씨 및 아로라씨와 함께 납치 현장을 방문했다. 그들이 그날 밤 던져진 곳은 바로 이 경비업체에서 불과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필스전과 선포트가 계약을 체결한 지 5일 만에 발생한 이 사건에 회사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던 것일까?

경비업체 건물이 육안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당시 현장에서 두 납치 노동자는 여전히 그날의 악몽으로 힘겨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악몽은 법을 지키고도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권리였다.

6년만에 노조 대표와 마주한 사장, 그러나…
▲ 2007년 9월 3일 열린 ㈜일경 앞 규탄집회 ⓒ국제민주연대

지난 3월 11일, 제 11회 지학순 정의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필리핀 노동자지원센터의 방한 일정에 맞춰 우리는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다시 한국 OECD 연락사무소와 면담을 가졌다. 진정인들은 연락사무소에 최소한 ㈜일경이 필리핀 대법원까지 인정한 노조와의 단체협상을 시작하도록 권고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너무 명백한 사안이기에 다국적기업의 인권준수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연락사무소로서도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3일, 약 6개월만에 다시 ㈜일경 한국 사무실 앞에서 규탄집회가 열렸다.

지난해 9월 면담에서는 '어디 허락도 없이 노조를 만들어'라며 분개했던 ㈜일경은 웬일인지 이날 면담에서는 민주노총의 중재를 받아들이고 현지에 연락해서 노조와 대화를 하도록 하겠다고 나왔다. 우리는 '노조는 절대 안 된다'던 회사가 갑자기 돌변한 것이 의심스럽긴 했지만 일단 현지에서의 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지난 4월 4일, 최양선 대표는 노조결성 움직임이 시작된 지난 2003년 이후 처음으로 노조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대화 자리에 나왔다. 지루한 법적 공방과 국내외에서의 캠페인이 벌어진 끝에 겨우 대화자리 하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이 자리에서 노조에 △본사 및 현지 경영진에 사과할 것(심지어는 노조가 귀찮게 했으므로 한국인권단체에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해고 상태임을 인정할 것 △절대 노조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사측은 "단 노조가 이를 받아들일 경우,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미 합법을 인정받은 노조를 사측이 인정하지 않고, 이에 반발해 파업에 돌입한 노동자들을 무단이탈로 간주해 이를 이유로 해고한 것을 받아들이라고 한 것은, 납치까지 당하며 인정받으려 했던 노조를 포기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통보였다.

이 시대 노동자의 권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는 정부가 들어섰다. 정부는 아울러 국제기준에 맞춘 선진화를 주장하고 있다.

OECD 가입국가로서 이행해야 하는 가이드라인에 명백히 위반되는 필스전 사건. 이 사건의 향방은 한국사회의 선진화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보여줄 것이다.

한국OECD 연락사무소는 정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로 구성된 외국인투자실무위원회가 맡고 있다. 즉 ㈜일경이 노조를 인정하고 단체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권고할 책임은 한국 정부가 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필리핀 현지 대사관을 비롯해 한국 정부는 이 문제가 필리핀 현지에서 발생한 문제이고 이에 개입하는 것은 주권침해라는 논리를 내세워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강조하는 '자원외교' 정책 아래, 앞으로 세계 곳곳에서 진출할 한국 기업과 연계된 인권침해와 환경파괴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OECD 가이드라인이 있는 이유는 바로 다국적기업과 같이 국경을 넘는 행위자의 활동을 최소한의 인권기준으로 규제하기 위함이다. 힘없는 제3세계 노동자와 주민들이 한국 기업으로 인해 피해를 봤을 때, 현재로서 제도적인 틀에서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것은 OECD가이드라인뿐이다.

필리핀 법에 따라 노조를 만들었고, 파업을 했고, 그러다 납치까지 당한 필스전 노동자에게 기업의 편을 드는 것이 우리 정부가 추구하는 '비즈니스 프렌들리'일까? 노조인정을 거부한 ㈜일경에 대해 한국 OECD연락사무소가 내리는 결정은 국내외에 한국 정부가 OECD 가이드라인과 같은 국제인권기준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필스전이 노조와 단체협상을 시작하기 전까지 결코 이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필스전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인권을 둘러싼 국제적 문제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더 큰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 전에 '글로벌 스탠더드'인 OECD가이드라인을 이 정부가 준수하는 모습을 보이길 기대한다.

* OECD가이드라인을 비롯해 이 사안과 관련된 더 많은 정보는 국제민주연대 홈페이지(http://khis.or.kr)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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