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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의 문턱에서 멈춘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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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의 문턱에서 멈춘 범작

[최광희의 휘뚜루마뚜루 리뷰] <궁녀>

궁녀 월령(서영희)의 석연치 않은 자살, 시체에서 발견된 출산의 흔적, 종실과의 치정과 관련된 타살로 심증을 굳히는 내의녀 천령(박진희), 단서를 쥐고 있는 듯한 벙어리 궁녀 옥진(임정은), 사건을 덮으려는 감찰상궁(김성령), 원자 책봉에 집착하는 희빈(윤세아). 요소만으로도 <궁녀>는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 얼개를 갖추고 있다. 각본을 쓴 김미정 감독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일단 기대 이상이다. 왕조 중심의 시대극 매너리즘에서 탈피했다든가, 조선시대 또 다른 억압의 대상이었던 궁녀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잠재된 욕망이 금기의 벽에 부딪히는 상황을 역사적 핍진성을 잃지 않으며 솜씨 좋게 담아냈다든가, 하는 의미 부여는 둘째 문제다. 우선 중요한 건 미스터리적인 쾌감이라는 측면에서 <궁녀>가 꽤 밀도 높은 퍼즐링을 선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궁녀
그런데 그 잠재력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감독은 숱한 한국형 호러의 관습에 슬쩍 편승해 버리며 그 탁월할 뻔한 모티브를 대강대충 수습해 버리고 만다. 미스터리로 출발해 심령 스릴러로 좌회전하더니, 슬래셔 호러로 유턴하고, 종국엔 관객들이 좋아라 할 게 분명하다고 판단한 듯 다시 우회전하며 귀신을 영접한다. 그러니 김 샌 나로선 앞서 말했던 의미부여를 끝까지 밀어 붙일 의욕이 시나브로 꺾여 버렸다. 아귀가 착착 맞아 떨어지는, 그래서 퍼즐이 마침내 완성됐을 때의 그 쾌감을 향해 달려 왔는데, 일순간 힘이 빠져 버린 셈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미스터리는 뻔하고도 익숙한 한(恨)의 정서로 수렴되고, CSI보다 더 영민한 천령의 수사는 무기력에 빠진다. 궁녀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간 거대한 억압의 상(像)은 흥미진진할 것으로 어렵지 않게 계산됐을 결론으로 치달으며 맥 없이 휘발된다. 금기와 억압의 굴레 안에서 서로를 미워하던 여성들은 끝까지 피해자로 남지만, 가해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우리가 발견해 낼 수 있는 미덕은 없지 않다. 미리 말했듯 만만치 않게 탄탄한 시나리오에서 데뷔 감독의 녹록치 않은 공력이 느껴진다. 사운드 믹싱 과정에서의 하자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을 등장시킨 가운데 설계된 꽤 유려한 미장센은 그가 이준익 감독의 시대극 연출부를 거치며 적지 않은 걸 배웠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영화를 보려 한 나에게 다른 미덕에 감동 받을 여지는 크지 않았다.
궁녀
영화가 끝나고 애써 머리를 써보니, (직접 상궁으로 출연까지 한) 감독 김미정이 굉장히 많은 영화적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게 성과다. 그래서 그가 한국의 장르 영화에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게 됐다. 다만, 잔뜩 쌓아 놓은 레퍼런스를 얼마나 일관성 있게 엮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궁녀>에선 딱 거기까지만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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