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정아 사태를 겪으면서, 나온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5년 전,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줄곧 했던 이야기다.
하지만 예일대 박사라는 '간판'을 내세워 주변인들을 현혹했던 신정아 사태와 일련의 사건들은 대통령의 5년 전 약속을 무색하게 한다.
실제로 최근 KDI(한국개발연구원)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칭 명문대라 불리는 학교 출신과 그렇지 않은 학교 출신 사이의 임금 격차는 현 정부 출범 이후 계속 확대돼 왔다. 또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 실린 대학에 관한 기사에는 대학 서열을 놓고 논쟁하는 소위 '대학 훌리건'들의 댓글이 항상 따라 붙는다. 이렇게 보면, 학벌 사회의 폐해는 지난 5년 간 더 심각해진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해서 "간판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던 노 대통령의 약속에 담긴 진정성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이런 상황을 노 대통령이 바라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안타까운 점은 5년 전, 노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금 드러난 것과 같은 '학벌 사회의 폐해'에 깊이 공감한 이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노 대통령과 맞붙었던 후보는 경기고, 서울법대를 나와 법조계의 주류로 지냈던 이회창 씨였다. 상고 출신으로 사법시험을 통과하여 법조계의 비주류로 지냈던 노무현 후보가 "간판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순간, '학벌 사회의 폐해'에 먼저 눈 떴던 이들은 진한 진정성을 느꼈다. 그래서 노 후보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은 여전히 "간판이 곧 실력으로 통하는 현실"을 보여준 신정아 사건을 지켜보며 착잡해하고 있다.
'노무현 당선'만 바라보는 동안, 학벌 구조는 더 공고해졌다
5년 전, 상고 출신 비주류가 경기고·서울법대 출신 주류를 꺾는 장면을 목격했던 한국 사회는 왜 아직도 실력보다 간판에 주목할까. 이유는 간단치 않다.
하지만 다른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학벌 사회의 폐해'에 노출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만큼은 이제 분명해졌다. 요컨대 특정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그에게 투영된 대중의 답답함이 풀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특정한 면모에만 주목하여 열광하는 행태는 위험하다. 단지 상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벌 사회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특정 정치인의 당선을 통해 문제가 풀릴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기대는 이미 존재하는 기득권 구조에서 피해를 입은 대중으로 하여금 오직 후보의 당선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학벌 사회의 폐해'에 대한 진지한 공론화를 오히려 방해했다.
실제로 학벌 문제를 고민했던 이들의 활동이 2002년 대선을 거치며 오히려 위축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언론 기득권을 쥔 <조선일보>에게 피해를 입은 대통령이 등장했음에도 오히려 '안티 조선' 운동은 시들해진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대중은 '실물 경제' 담론을 원한다"…'기업인 대통령'에 대한 기대
그런데 최근 바람을 타고 있는 기업인 대통령에 대한 기대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기업 경영자 출신이면 당연히 기업이 겪는 어려움을 잘 풀어내리라고 보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보수 세력은 "기업 현실을 아는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옳고 그름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 배경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공적 담론장에서 '기업'은 항상 '암흑상자'(Black box)였다. 내부의 작동 원리에는 다들 관심이 없었다.
과거 군사정권은 그저 협박하면 돈이 튀어나오는 장치쯤으로 기업을 이해했다. 절차적 민주화 이후 들어선 정권은 '기업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무조건 떠받들기만 했다.
이 과정에서 보수 세력의 관심사인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 했다. "기업하기 힘들다"라는 불평만 잔뜩 쏟아졌을 뿐,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콕 짚어서 지적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진보 세력의 관심사인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도 마찬가지였다. 일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일터의 담장을 벗어나지 못 했다. 꼼꼼한 실태 조사도 없었고, 정교한 정책 대안도 드물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토론도 이뤄질 수 없었다.
'기업인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대중은 경제학 이론에는 별 관심이 없다. 대중의 진지한 관심이 쏠린 곳은 일터와 시장에서 경험한 실물 경제다. 그런데 공적 담론을 주도하는 언론인과 학자들은 이에 대해 무지하거나 전혀 엉뚱한 이야기만 쏟아냈다.
기존 공공 부문에 대한 대중의 불신
이런 괴리에 실망한 대중은 실물 경제의 담당자였던 사기업 경영자에게 공적인 역할까지 기대하게 됐다. 게다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대중이 이런 시련에서 한발 비켜서 있던 공공 부문 종사자보다 험한 위기를 이겨낸 기업인들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게 된 것도 이런 기대의 한 원인이다. 이명박 후보의 높은 인기의 배경에는 이런 기대감이 있다.
이런 해석대로라면 사기업 경영자 출신이 공적 역할 담당자로 떠오르는 상황은 기존 공공 부문의 무능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학계, 언론계, 정치권, 정부 기관, 시민사회단체 등 전통적인 공공 부문의 위기 징후다.
그런데 조금만 냉정하게 살펴보면, '기업인 대통령'이 반드시 대중이 체감하는 실물 경제의 문제를 더 잘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학벌 사회의 폐해'를 겪었던 상고 출신 대통령이 학벌 기득권 구조를 허물지 못 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다.
개혁 세력 일각에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문국현 후보 역시 마찬가지다. 문 후보 역시 기업 경영자가 아니었다면, 어떤 주장을 해도 지금과 같은 기대를 받지는 못 했을 게다. "기업인이되, 이명박 후보와는 다른 종류의 기업인이다"라는 점이 그를 '이명박 대항마'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대기업의 횡포, 고용 불안…담론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사회경제적 의제들
물론 문 후보에게 거는 기대는 단지 '실물 경제에 대한 이해' 때문만은 아니다. 문 후보의 지지자들이 흔히 '시대정신'을 이야기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 번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화가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서 사회경제적 의제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에 공감한 지식인이 늘면서, 대안적인 기업 모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두 번째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확산된 극심한 고용 불안이다. 대기업 직원들조차 "미래가 불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젊은이들이 전공과 관계없이 공무원 시험으로 쏠리는 '공시족 현상'이 나타난 배경이기도 하다. 또 상당한 지적 노력을 쏟아야 하지만, 안정적인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 인문학 및 과학기술 연구를 젊은이들이 기피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중소기업 및 중소 자영업자 문제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일부 재벌은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경영환경은 더 악화됐다. 그런데 대기업과 협력업체 사이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은 여전했다. 당연히 중소기업의 피해가 쌓여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기업을 주요 광고주로 삼고 있는 언론은 이런 문제를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중소기업 종사자들의 분노가 누적된 상황이다.
그리고 대기업이 유통업 및 요식업 등에까지 진출하면서 중소 자영업자의 위기가 깊어졌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언론과 정부가 제대로 된 해법을 내놓지 못 하고 있다.
"딸이 비정규직이라면서요"…'문국현 현상', 사회경제 의제에 대한 갈증의 반영
문국현 후보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이야깃거리를 준비했다. 게다가 자신의 두 딸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연까지 곁들였다. 개혁 진영 일각에서 기대를 품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온라인 공간에서의 여론만 놓고 보면, 문 후보의 주장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실제로 문 후보 관련 기사에는 "문 후보의 두 딸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자기 이익만 챙기는 탐욕스러운 기업인만 봤는데, 공익 활동에 적극적인 기업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인력 감축을 만능 해법으로 여기는 세태에서 문 후보가 경영한 유한킴벌리는 IMF 외환위기 당시 감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접하고 감동받았다"라는 등의 댓글이 빼곡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이는 문 후보에 대한 대중의 감동이나 지지라기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용 불안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또 대안적인 기업 모델, 고용 안정 대책, 비정규직 대책에 대한 대중의 갈증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사회의 공적 담론을 주도하는 이들이 평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확인시켜준 사례로 볼 수도 있다.
고용 문제 들고 나온 후보는 고용 문제를 더 잘 해결할까?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질문이 나온다. 문국현 후보는 사회경제적 의제에 목마른 대중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런데 문 후보는 대중의 이런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는 인물인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간판이 곧 실력으로 통하는 현실"을 타파할 인물로 꼽혔던 노무현 대통령의 기득권 해체 실패 사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외환위기 당시 감원을 하지 않았던 경영자가 대통령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심각한 고용 불안이 해소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미리부터 이런 문제를 고민했던 이들이 순간순간의 정치적 공방에만 관심을 쏟게 하는 결과만 낳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고용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공론화는 어려워진다. 당연히 합리적인 해법도 나오기 힘들다. 자칫하면 대중이 일터에서 느끼는 문제는 누가 대통령이 되도 풀 수 없다는 좌절감만 번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고용 문제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의제가 정치적 쟁점이 되지 말아야한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오히려 보다 치열한 쟁점이 돼야 한다.
문제는 일의 순서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후보가 먼저 의제를 제기하고, 여기에 호응하는 대중의 반응을 언론이 소개하는 방식은 잘못이다. 이런 식으로는 "의제를 제기한 후보가 당선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만 심게 된다. 또 의제 설정 자체가 정치적 의도에 따라 왜곡될 가능성도 있다.
대중의 갈증에 무책임한 언론
정상적인 방식대로라면, 사회의 공적 담론을 주도하는 이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즉 대중이 답답함을 느끼지만,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은 문제를 찾아 제대로 의제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입장을 각 후보에게 묻는 게 바른 순서다.
하지만 공적 담론을 주도해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언론의 행태는 이와 많이 달랐다. 평소 일터와 시장에서 대중이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실물 경제에 대한 관심도 '재테크 요령'을 소개하는 수준에 그쳤다.
보수 세력의 관심사인 경영자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진보 세력의 관심사인 노동자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언론은 제대로 파헤치지 못 했다.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만 늘어놓을 따름이었다.
이랬던 언론이 갑자기 기업인 후보를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기업을 경영해본 후보이므로 대중의 진짜 관심사인 일터와 시장의 문제들을 잘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부추긴다.
대통령은 '구원의 메시아'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제2의 노무현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은 '구원의 메시아'가 아니다. 제대로 된 담론조차 형성돼 있지 않은 문제를 풀 수 있는 대통령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집권도, 범여권 후보의 집권도, 그밖의 후보의 집권도 아니다. 진정 두려운 것은 학벌 기득권, 언론 기득권을 허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결국 실패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가 고용 문제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의제에 대해서까지 다시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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