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는 사회 양극화의 핵심 원인으로 꼽히며 지난해 11월 비정규직 관련법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비정규직 관련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걱정거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우리은행 노사가 '분리직군제 도입'을 통해 3100명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이 발표는 무엇보다 대기업이 거대 규모의 인원을 한꺼번에 정규직화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줬다. 단계적으로 정규직화하는 사례는 드물게나마 찾아볼 수 있었지만 한 번에 3000여 명의 인원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면 우리은행의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만은 없다는 목소리도 노동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고용만을 보장하고 승진 및 임금에서 차이를 둔 분리직군제가 "결과적으로 '제2의 정규직'을 만들어낼 것이며 비정규직 법을 무색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분리직군제는 현 연공급 중심의 임금체계를 성과급 체계로 전환하는 임금체계와도 연관된 것이라는 점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 오는 7월 비정규직 법 시행을 앞두고 대안을 마련해야할 기업들도 우리은행 합의를 검토하고는 있지만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
금융, 유통 등 특정 산업에서 비정규직 관련 대안 마련의 전기로 여겨졌던 이번 합의를 둘러싼 논란은 노동계와 경영계 모두에서 좀처럼 가닥을 잡아가기 힘든 분위기다. '우리은행 모델'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내며 비정규직을 둘러싼 쟁점으로 떠오른 이 합의가 지금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프레시안>은 3회에 걸쳐 우리은행 합의 이후 논란에 대해 살펴본다.
<양날의 칼 '분리직군 정규직화'> 첫 번째 기사에서는 우리은행 합의가 도출된 배경과 이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두 번째 기사에서는 이를 둘러싼 여러 가지 우려의 시선들을 다룰 예정이다. 마지막 기사에서는 이같은 방식의 정규직화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책은 무엇인지, 그 고민에 대한 현주소를 담고자 한다. <편집자>
"정규직이 되다니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을 기대했던 기자에게 우리은행 종로3가 지점에서 일하는 A 씨는 "글쎄요, 뭔가 바뀐다고는 하는데 몸에 와 닿는 것은 없어요"라고 말했다.
A 씨는 지난 2004년 3월에 우리은행에 들어와 3년 째 '빠른창구' 업무를 보며 일하는 비정규직이지만 오는 3월 1일부터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지난해 12월 우리은행 노사가 3100명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A 씨는 "정규직이라고 해도 고용이 보장되는 것 외에는 달라지는 것이 크게 없다"고 말했다.
A 씨가 이처럼 느끼는 것은 우리은행이 발표한 정규직화의 조건이 기존의 정규직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분리직군제 도입을 통한 정규직화였기 때문이다. 59세까지 정년을 보장해주고 복지혜택을 일부 주는 대신 승진의 기회나 임금에서는 기존의 정규직과 차이를 둔 것.
우리은행에 쏟아지는 찬사…"우리은행이 큰 일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비정규직들은 A 씨와 같은 우리은행의 비정규직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은행 텔러로 2년 여 동안 일한 타 은행의 B 씨는 "일단 고용안정이 된다는 점에서 주변의 동료들이 우리은행을 부러워한다"고 설명했다.
우리은행의 전격적인 발표는 사회에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다. 오는 7월 비정규직 관련법의 시행을 앞두고 나온 대규모 정규직 전환 뉴스였기 때문.
그 이후 분리직군제 도입을 통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우리은행 모델'이라고 불리며 어느덧 비정규직 해법 가운데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언론은 "우리은행이 큰 일을 했다"고 보도했고, 일부 학자들도 "현실적인 대안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라고 평가했다. 3100명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수의 비정규직을 한꺼번에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고용불안을 해소시켜줬기 때문이다. 한 취업사이트의 설문조사에서 구직자들이 비정규직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로 고용 불안이 꼽혔을 만큼 불안정한 계약관계에서 느끼는 불안감은 크다.
우리은행이 이같은 합의를 한 것은 비정규직법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금지하고 2년 이상 비정규직을 같은 업무에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 기업으로서는 차별금지 조항과 사용기간 제한 조항을 모두 피해갈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비정규직 관련법에 대한 기업의 선택은 크게 네 가지 정도로 꼽힌다. 완전한 정규직으로의 흡수, 분리직군화, 외주화, 계약해지가 그것이다.
노동계는 정규직으로의 흡수를 요구하고 있지만 기업은 주로 외주화 혹은 계약해지를 선택하고 있어 비정규직 관련법의 역효과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당장 철도공사에서도 직접고용 비정규직이던 새마을호 승무원들이 외주화됐고, 법원에서도 계약해지 사태가 잇따랐다.
"비정규 해법이면서 기업 홍보 효과까지…'일석이조'"
이 가운데 우리은행 모델은 외주화나 계약해지와 같이 비정규직의 처지를 악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정규직 전환으로 인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급작스럽게 늘리지도 않는 '적절한 차선책'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은행 모델이 노사 모두에게 최선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냐는 것.
유길상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는 최근 한 토론회에서 우리은행의 노사합의와 관련해 "분리직군제 도입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사측은 노동유연성을 다소 포기하는 대신 어느 정도 임금유연성을 확보하고, 비정규직은 상대적으로 조금 낮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고용안정을 취하는 상호 '윈-윈(win-win)' 전략을 구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 마디로 기업이나 비정규직 모두에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대안이라는 것이다. 또 유 교수는 "이번 결정은 비정규직 보호법의 취지와 '기업단위'에서의 비정규직 배려 노력을 확산하려는 정부의 정책과도 부합하는 결정"이라고 칭찬했다.
실제 은행의 텔러와 같이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비정규직을 2년마다 계약해지 하기에는 기업의 부담이 너무 크다. 교육비용이나 생산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 한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비정규직 법에 대한 대응책 마련은 절실한데 비정규직을 한꺼번에 정규직으로 전환하기에는 인건비 부담이 심각하고 외주화하기에는 생산성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비정규직을 별도의 직군으로 분리시켜 정규직으로 흡수할 경우 기업으로서는 차별금지 조항을 피해나갈 수 있는 통로 또한 확보하는 셈이 된다. 동일한 노동을 하는 다른 정규직과 비교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기업들은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사회 양극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규직 전환을 결정하면 기업 이미지 제고에도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은행의 남기명 HR(인력자원)전략팀 팀장은 분리직군제 도입을 통한 정규직 전환에 대해 "기업 홍보 효과도 분명히 있었다"고 말했다.
"노조로서도 가장 현실적 대안이다"
한꺼번에 정규직화를 얻어낼 수는 없다는 노조의 현실적 판단도 이번 합의를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한 노동계 인사는 "비정규직 철폐는 '아름다운 말'이긴 하지만 하루 아침에 이룰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어쨌든 비정규직의 고통 가운데 고용불안 부분을 해소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비정규직이 일단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노조 가입의 대상이 된다. 현재 산업별, 기업별로 비정규직 노조가 있는 곳도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률은 4.6% 수준에 불과하다. 이들이 노조에 가입하게 되면 이들의 처우 문제도 차후 임단협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 한 마디로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한 '단계적 해결론'인 것이다.
이승민 금융노조 정책실장은 "우리은행이 내놓은 비정규직 해법이 최선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적 대안인 것은 분명하다"며 "금융노조의 최종 목적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지만 여러 대안을 가지고 올해 산별교섭에서 이 문제를 강력히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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