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한국노동연구원 주최로 열린 토론회의 발제자로 나선 박호환 아주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지난해 말 우리은행 노사가 3000여 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합의한 이후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으로서 분리직군제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정규직 전환과 직무 중심형 임금체계관련 토론회'에는 각 기업의 인사팀 관계자들과 노조 관계자들 350여 명이 참석했다.
우리은행 모델에 대해 노사 각기 서로 다른 이유로 우려의 시선을 갖고 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모범적인 해법이 아니냐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이날 토론회에서 박호환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노사가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 만큼 향후 새로운 노사갈등의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우리은행 모델'에 대한 노사의 각기 다른 꿈은?
박 교수는 "노조는 '일단 사인하고 내년에 투쟁을 열심히 해서 임금을 올리면 된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반면 회사는 고용의 연속성 보장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기존의 비정규직을 임금인상의 틀에서 제외시키거나 인상 폭을 줄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계는 우리은행 모델이 비록 완벽한 차별 해소는 못 되더라도 점진적으로 임금과 복지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회사는 전혀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
박 교수는 "이런 상태에서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이후 오히려 노사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나아가 기존의 정규직 직원과 전환된 정규직 사이의 노노 갈등도 생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발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온 남기명 우리은행 HR(인적자원)전략팀 부장도 박 교수가 지적한 문제점을 인정했다. 그는 △노조가 직군에 관계없이 동일한 임금 수준을 요구할 가능성 △ 정규직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전제로 올해 동결에 합의한 임금인상분을 내년에 다시 요구할 가능성 △정규직 전환으로 업무태만자의 퇴출이 어려운 점 등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후 예상되는 문제점으로 꼽았다.
"직무간 이동 가능하게 해야" vs "정당한 해고의 법적 기반 마련해줘야"
이같은 우려는 이날 노동계와 경영계를 대표해 나온 토론자들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종각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이번에 정규직 전환을 가능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인 '정규직의 희생과 양보'는 한두 번뿐이지 계속 가능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우리은행이 이미 정규직까지 도입하고 있는 직군분리제는 언젠가 노사관계 불안의 심각한 원인이 될 것"이라며 "10년 전 금융노조의 핵심 투쟁과제가 '여행원제 철폐'였던 것을 기억하고 직군별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경영계를 대표해 나온 김환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연구위원은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람들의 생산성이 얼마나 뒷받침해주느냐가 중요하다"며 "임금 및 복지 수준은 올라가는데 경쟁력이 안 따라주면 기업의 경쟁력도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그런 면에서 우리은행 모델을 적용할 때 인적자원 관리에 대한 운영시스템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정규직의 임금체계로서의 직무급 확산 조건에 대해서도 김종각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직무간 이동이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한 반면 우리은행의 남기명 부장은 "정규직 전환자의 업무태만을 방지하기 위해 정규직에 대한 정당한 해고의 법제화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직무급에 대한 환상도 깨야 한다"
박 교수는 "우리은행 모델이 주목을 받으면서 직무급에 대해 여러 오해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금 인상이 자제될 것이라는 관측과 직무급 계산이 간단하고 운영이 유연할 것이라는 인식은 환상"이라는 것.
박 교수는 "미국의 자동차, 철강, 항공에서 보듯이 직무급체계 아래에서도 엄청난 임금인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면서 "직무급의 도입 또한 직무분석, 직무평가, 직무급구조설계 등에서 노사 간에 모두 무수히 많은 이견이 존재하는 만큼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의 노사합의 이후 직무급이 광범위하게 도입된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직무값'의 계산 자체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이 우리은행 모델의 확산에 걸림돌 중 하나로 지적돼 왔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 일하는 텔러의 직무가치를 얼마로 책정하느냐에 따라 임금 등의 처우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노사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직무값 산정의 토대가 없다는 것.
이날 토론자로 나온 유규창 한양대학교 교수는 직무급 도입을 위한 인프라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정부가 직종별·업종별로 구분이 가능한 직무분석 기법의 매뉴얼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호환 교수도 "미국의 철강기업인 유에스 스틸이 직무급 도입을 위해 직무평가 항목을 만들고 점수 배분 기준을 마련하는 데 3년이 걸렸다"며 "임금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기준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기업별 노사 및 전 사회적 합의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은행 모델' 무엇인가?…"2004년부터 준비해 왔다" 우리은행 노사는 지난해 12월 20일 "정규직 임금을 동결하고 직접고용 비정규직 3100명을 2007년 3월 1일부로 정규직화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노사는 기존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59세까지 정년을 보장하고 기존의 정규직과 동일한 복지혜택을 부여하는 대신 급여에 있어서는 직무가치에 따라 급여를 차등지급하는 직군별 급여체계를 시행하기로 합의했다. 정규직 전환 대상이 된 비정규직은 매스마케팅(창구 텔러), 고객 만족(CS), 사무지원 등 3종류의 직군이다. 이 결정은 오는 7월 시행되는 비정규직 관련 법률에 대한 대응책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비정규법률은 계약기간이 2년 경과할 경우 무기계약근로자로 전환시키고 동종 또는 유사업무에 종사하는 정규직과의 차별을 금지토록 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에서 우리은행 모델에 대해 발제를 맡은 남기명 부장은 "숙련된 노하우와 기술을 필요로 하는 직무가 대부분인 은행업무의 특성상 2년 마다 새로운 인력으로 대체하기는 곤란하다"며 정규직 전환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남 부장은 "일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이번 결정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은행은 지난 2004년 12월부터 은행 인사체계를 직군별 체계로 전환하는 등 하나씩 준비를 해 왔다"고 말했다. 남 부장은 또 "현재 3급 이상에만 시행되고 있는 개인연봉제를 향후 4급 이하에까지 확장해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