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한나라당이 국회에 제출된 1조2천9백억원 규모의 KBS 결산승인안을 부결시켜 정가와 방송계에 큰 파문이 일고 있다.
KBS의 '공룡병'을 지적한 것이라면 설득이 있으나, 이면에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KBS가 주먹구구식 운영을 하고 있다"**
국회는 1일 본회의에서 문화관광위원회를 합의 통과한 ‘2002년도 한국방송공사(KBS) 결산 승인안’을 처리하려 했으나 재적의원 2백72명중 1백55명이 투표한 가운데 찬성72, 반대 69, 기권 14표로, 찬성이 재석의원 과반수를 넘지 못해 부결됐다.
결산승인이 이미 사용한 예산에 대한 형식적인 추인절차라는 점에서 그동안 무난하게 본회의를 통과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이번 부결을 한나라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KBS와 신임 정연주 사장에 대한 ‘길들이기’에 나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특히 소관상임위인 문화관광위에 한나라당 소속의원이 더 많은 상태에서 여야간 합의로 처리된 안건을 본회의에서 부결시켰다는 점에서 이 같은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날 찬반토론에서 한나라당 이경재의원은 "KBS의 공영성 지수가 SBS와 MBC보다 낮다"고 지적하면서 동시에 "정연주 사장의 임명 배경에 문제가 있고 ‘노사모’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한 사람(문성근)을 토론사회자로 하는 등 이념방향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같은 속내의 일단을 드러냈다.
같은 당 김정부 의원은 KBS 내부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KBS가 주목구구식 운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예비비 사용문제와 퇴직급여 충담금 문제를 지적했다. 김의원은“KBS의 부채 총액 중 58.1%가 임직원들의 퇴직금을 지급하기 위한 준비금인 ‘퇴직급여 충당금’인데 이는 타 방송사보다 훨씬 높은 수치”라며 “국민정서상 승인안을 절대 통과시켜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소속인 박관용 의장은 표결 직전 "결산심의안이 통과돼야 지적사항에 대한 조치가 이뤄질 수 있다"며 "통과되는 것이 좋은 방향이고 통과시켜야 여러분들 요구사항이 관철될 것"이라며 가결을 당부하기도 했다.
***민주당, "부결은 방송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려는 한나라당 책임"**
민주당 소속의 배기선 문화관광위원장은 결산승인안이 본회의에서 부결된 데 대해 성명을 내고 "문광위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결산안이 한나라당의 정치적인 반대에 부딪혀 부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결산상의 문제점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조차 상실하게 됐다"며 유감을 표했다.
배 위원장은 "2002년도 결산은 박권상 전 KBS사장 시절의 예산 집행사항에 대한 것이므로 현 정연주 사장에 대한 불만으로 결산안을 부결시킨 한나라당의 처사는 설득력이 없다"며 “KBS 결산승인 부결은 전적으로 방송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려는 한나라당 책임"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부결에 대해 문광위의 한나라당 간사인 고흥길 의원의 측근인사는 “지금은 고 의원이 직접 말을 하기 곤란한 상황”이라며 “고 의원도 황당하고 난감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KBS출신의 한나라당 의원들도 이번 부결에 대해 “고 의원과 같은 입장”이라거나 “할 말이 없다”고 짧게 답했다.
결산안 부결은 이미 쓰고 난 예산이라 부결이 돼도 별다른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수는 없는 상황이라 국회관계자도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상세하게 검토를 해봐야 알 것같다"고 말했다.
***KBS노조, "한나라당의 선전포고로 본다"**
결산승인안이 본회의에서 부결된 데 대해 KBS측은 공식적으로 '유감스럽다'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KBS는 퇴직금 문제에 대해서는 “퇴직금 누진제 폐지에 따른 퇴직금 중간정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차입운영이 불가피했다”고 해명했다.
또 성과금의 예비지지출에 대해서는 “성과급을 인건비 예산에 편성하지 않고 예비비에서 집행하는 것은 예산편성시 정확한 경영성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과, 인건비 예산에 편성할 경우 성과급 지급사유가 발생했을 경우에만 집행토록 되어 있는 성과급 예산을 임금인상 재원으로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획예산처에서 정하고 있는 사항” 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KBS는 2001회계연도에도 예비비를 인건비 인상재원으로 사용했으나 결산이 국회에서 부결되지는 않았다.
KBS 고위간부는 이번 부결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경영에 힘쓰고 공영성, 형평성 강화를 위해 노력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KBS 노조의 한 핵심인사는 “이번 한나라당의 행위를 내부에서는 KBS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본다”이라며 “한나라당이 먼저 이 전쟁을 걸어온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론노조, "재벌과 족벌 신문에 공영방송을 불하하려는 음모**
전국언론노조,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등 언론관련 단체들과 민주노동당은 이번 부결과 관련해 성명을 내고 한나라당을 일제히 비난했다.
민언련은 "한나라당 의원이 다수인 문화관광위에서 통과된 안을 한나라당이 부결시킨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한나라당이 결산안 부결을 통해 KBS 길들이기를 적극 시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언론노조는 “지난 19일에는 KBS 2TV와 MBC등 양대 공영방송을 민영화하기 위해 올해 안에 법 제도를 정비하겠다고 밝히며 재벌과 족벌 신문에 공영방송을 불하하려는 음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고 비판했다.
민노당은 “방송은 대선패배의 한풀이 대상이 아니라 공공자산“이라며 ”원내1당의 지위를 악용한 정치적 행포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KBS의 체질개선도 필요**
하지만 이번 부결에 대해 KBS가 반성할 점도 적지 않다는 의견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한 미디어 담당기자는 “이번 부결은 정연주 사장과 KBS에 대한 길들이기에 목적이 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KBS가 신설한 언론비평 프로그램인 ‘미디어포커스’에 한나라당 의원들의 실명이 거명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한 언론인도 이번 문제에 대해 “KBS가 그동안 방만하고 무사안일한 경영으로 인해 타 방송사보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서울시가 예전에 가졌던 ‘복마전’이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까지 물려받은 상태”라며 “KBS가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기정체성을 찾는 일 못지않게 내부의 체질개선도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KBS 측이 제시한 해명자료에도 국악, 교향악단 운영과 송출시설 지원 등 공익비용을 부담하고 있다고 설명하긴 했으나 부가가치 노동생산성이 타 방송사에 비해 높고 광고의존도가 심화되는 등 불안정한 상태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이번에 KBS문제를 제기한 이면에는 '정치적 동기'도 분명히 내재돼 있다는 지적이 압도적인 만큼 앞으로 KBS 구조조정을 둘러싼 논란은 부단히 계속될 전망이다. '정연주 KBS호'가 우리 사회의 개혁선도를 위해 선행해야 할 내부 과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반격'에서 자유롭기 위해선 스스로가 반격의 빌미를 제거하기 위한 자체개혁을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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