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과대학에는 여학생이 드물까?" 당연한 일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여학생들은 문과로 쏠렸으니까. 그럼 왜 여학생들은 이과보다 문과를 선호할까. 스웨덴의 여성주의자들도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답을 구하기 위해 그들이 찾아간 곳은 학교.
학교에서 남자 아이들은 공놀이 등 야외 활동을 권장받는 데 비해 여자 아이들은 주로 음악, 미술 등 실내 활동을 권유받았던 탓에 이공 계열 학습에 필수적인 공간지각 능력을 훈련할 기회가 적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학이나 과학 교과서에서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이 남성의 인지과정에 더 적합하도록 구성돼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뿐 아니라 학내 활동이나 교과서의 서술도 남성이 지도자 역할을 맡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
물론 교육과정을 설계한 이들이 처음부터 여학생을 차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남성과 여성의 미묘한 차이를 무시한 채, 남성적인 특징을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으로 설정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이처럼 학교가 남학생에게 좀 더 다양한 능력 계발의 기회를 제공한 까닭에 남학생들은 이공 계열과 인문 사회 계열 등으로 폭넓게 진출하는 반면, 여학생들은 인문 사회 계열로 몰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가 다시 직장 및 직업 선택 폭의 차이로 이어진다.
1999년 스웨덴의 여성학자 구닐라 퓌어스트(Gunilla Fürst)가 발표한 <스웨덴, 평등의 길>의 내용 중 일부다.
외국 학자의 설명이지만 한국 상황에 비추어도 어색하지 않다. 서울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박정준 씨는 최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의 가정통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고교 2학년에 올라가면 남학생은 무조건 '체육'을, 여학생은 '음악'이나 '미술'을 택하게 돼 있는 것이다.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표방하며 학생의 교과 선택권을 확대한 7차 교육과정이 도입됐음에도 학생들의 교과 선택 자유가 제한되고 있는 것에 대해 우선 놀랐다.
하지만 박 씨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여전히 학교를 지배하는 "남학생은 무조건 체육"이라는 통념이었다. 박 씨는 이런 통념이 반영된 교육을 '몰성인지(沒性認知)적 성별분리교육'이라고 칭했다. 생물학적 성(性)에 따른 분리 교육을 기정사실화하여 기존의 성 역할에서 벗어나는 교육 내용에 대한 접근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는 '몰성인지적 성별분리교육'의 부작용에 대해 왜 이리 둔감한 것일까. 박 씨는 이런 답답함을 담은 글을 <인권오름>에 보냈다.
이 글에서 박 씨는 "'성별 이데올로기'를 고정화하며 인습에 따라서 특정 성(젠더)의 문화를 사회화하는 것은, 성인기 이후에 직업선택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수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안이다"며 "학생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그리고 전사회적인 성인지적 교육 정책에 따라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선택 교과목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인권의 가치"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인권오름> 최근호에 실린 박 씨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1980년대 중반 스웨덴에서는 특정 직업군에 여성들이 몰리며 이른바 '여성직종'이 생겨나고, 그러한 직종이 곧바로 비정규직, 미숙련 저임금 노동으로 귀결되는 현상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정규직, 고임금, 숙련노동으로 채워진 소위 '남성직종'에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투입하며 양성이 노동시장에서 평등하게 일하도록 고취했다. 적극적인 국가개입으로 평등을 이루려고 힘썼던 시도는 10년 이후 상당부분 좌절된 결과를 나타냈다. 10년 전 다른 직종에 비해 전도유망했던 일이, 1990년대 중반에는 또 다시 '여성직종'이 되면서 비정규직화와 저임금, 미숙련노동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기치 않은 결과 앞에서 스웨덴의 여성주의자들은 망연자실했다. 이들이 찾아낸 실패의 원인 중 하나는 공교육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성차별적 관행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공놀이를 비롯한 야외활동을 권장받는 소년들은 공간지각능력을 훈련하며, 그 이후 수학을 비롯한 과학 과목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반면 자신이 쉽사리 통제할 수 있는 인형을 갖고 놀던 소녀들은 수학과 과학을 싫어하게 되며, 취학 후에도 이공계 과목을 기피하게 된다.
또한 수학이나 과학 교과에서 증명하는 방식이 여학생들에게 걸맞지 않게 구성된 것도 여학생들이 이러한 과목을 꺼리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은연 중에 성별이데올로기로 훈련된 교육의 결과, 여학생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갖는 직종에 내몰린다는 것이었다.
노동시장에서 평등을 이루기 위한 선행적인 과제는 학교교육을 통해서 양성에게 자신이 갖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능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여전한 몰성인지적 성별분리교육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 한국 학교는 어떨까. 문득 스웨덴의 여성학자 구닐라 퓌어스트(Gunilla Fürst)가 1999년에 발표한 <스웨덴, 평등의 길>이 떠오른 것은 동생의 가정통신문을 무심코 읽어본 후였다.
내년에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 학생들의 선택과목 교과서 대금을 알리는 문서에서, 학생들은 생물학적인 성에 따라서 예체능 과목을 일방적으로 결정'당해야' 했다. 남학생들은 모조리 체육 교과를 택해야 했고 여학생들은 음악과 미술만을 택해야 했다.
일반 공립학교에서 이러한 성별분리교육이 아직도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학교에 전화를 해보았다. 교과 담당 교사는 이미 지난 여름에 결정된 일이며, 지금은 단지 대금 청구를 위해 발급된 공문이라고만 알려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 학교에서 예체능 과목을 성별에 따라 구분지은 이유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성별에 따라 선호과목이 확연히 갈린다는 점 △교사 수급문제에서 체육교사가 훨씬 많기 때문에 자유선택에 맡길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 △일반선택과목은 교육인적자원부가 인정한 학교의 자율재량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성별분리교육에 대한 문제제기에 학교당국은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한 반응은 한 교원단체에 문의해 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원단체에서는 성별분리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했으나,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별다른 해결방안도 갖고 있지 못한 듯했다.
양성평등을 위한 교육에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학교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양성평등 실현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성별에 따라서 선호하는 예체능 과목이 나뉜다고 하더라도 교육현장에서 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학교당국은 예체능과목이 청소년/청소녀들의 성장에서 무궁무진하게 가져다줄 수 있는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설령 학생들의 선호가 뚜렷이 구분된다고 할지라도, 이를 골고루 발달시킬 수 있도록 권장해야 하는 게 교육의 역할 아닐까.
그뿐만 아니라 과연 모든 여학생들이 체육 대신 음악과 미술을 배우고 싶어 하며, 남학생들은 그 반대인지도 전적으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해당 학교가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교육의 3주체 중의 하나인 학생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했는지 또한 의아하다.
교사 수급 문제로 인해 학생들의 교과 선택이 제한되는 것 역시 수요자 중심 교육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대변한다. 만일 학생들의 바람보다 해당 교과목의 교사가 부족하다면 이는 교육인적자원부의 교원 수급 조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또한 교사수급 문제는 짧은 시일 안에 풀기 어렵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문제가 돌출되더라도, 학생들을 아예 분리시키기 보다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쪽으로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교육인적자원부의 일반선택교과의 자율권이 현실에서 취지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또한 점검해봐야 한다. 사실상 '자율'이라는 미명 하에 듣고 싶은 과목조차 듣지 못하는 배제를 가하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공교육의 빈틈이 사교육으로 학생들을 내몰며 공교육의 실추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볼 시점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현재 적잖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탐구과목 중에서 일부 과목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여러 학생들은 불가피하게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 사교육을 받아야 한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강요하는 학교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학교에 만연한 몰성인지적인 시각을 개선해야 한다. 교과 선택에서 원하는 과목을 듣게 해주는 것은 어떤 시각에서 보면 양성의 특성을 배려하는 방안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별이데올로기를 고정화하며 인습에 따라서 특정 성(젠더)의 문화를 사회화하는 것은, 성인기 이후에 직업선택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 수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안이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의식적으로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성인지적 태도가 필요하다.
또 다른 한 가지 예로, 동생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학부형들의 비상연락망을 짜면서 명시적으로 어머니의 이름만을 적게끔 만들었다.
이는 최근 급증하고 있는 한부모 가정이나 어머니 없는 가구의 학생들에게 부담감과 소외감을 줄 소지가 다분하다. 학교에서 가족의 다양한 형태를 수용하지 못한 채 획일적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만으로 학생들을 상대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자율적 선택교과 결정은 당연한 인권
학교는 학생들을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 인간으로 육성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지적이지 못한 학교교육을 받으며 사회에 나간 이들이 과연 얼마만큼 양성평등의식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부터라도 학교 당국과 교육인적자원부는 학생과 학부형들과 지속적인 토론을 거치며, 바람직한 양성평등교육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그리고 전사회적인 성인지적 교육 정책에 따라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선택교과목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골고루 향유해야 하는 인권의 가치임이 분명하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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