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스폰지를 운영하는 조성규 대표를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매번 좋은 영화를 수입해 소개하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가 7년째 운영하며 10월 하순쯤 개최하고 있는 '서울유럽영화제'의 올 나잇 상영회에 앉아 있으면 문득 그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마이클 윈터바텀의 <나인 송스>를 볼 수 있었던 곳, 존 카메론 미쳴의 <숏 버스>를 볼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그의 영화제였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얼굴 전체를 덮는 그의 긴 더벅머리를 가리키며 헤어스타일만큼은 '어쨌든 비호감'이라고 말한다. 그 말도 맞다. 그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진정으로 가위를 들고 삭둑삭둑 자르고 싶어진다. 아무리 얘기해도 그는 머리를 정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항간에는 그 이유가 자신의 '빅 헤드'를 가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행한 건, 그렇다고 해서 그게 감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가 모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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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규 대표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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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그가 무슨 재주로 그렇게 뛰어난 작가영화들을 내리 수입할 수 있는지 그 재주가 궁금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건 그가 그냥 뒷걸음질 치다가 우연히 횡재하듯 된 일들이라고 깎아 내린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돈을 많이 '땃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여전히 많은 빚에 허덕이고 있거나, 성공했다는 건 여전히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콧바람을 세차게 불어댄다. 성격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솔직하고 담백하다고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충무로에서 가장 음흉한데다 속좁은 인간이라고 말하며 미간을 좁힌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듣고 있으면 한가지만큼은 분명해진다. 조성규가 이제는 분명히 성공했다는 것, 그의 영화사 스폰지가 언제부턴가 국내 영화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언제 스폰지를 신경이라도 썼던가. 조성규란 이름이 지금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언론에 대서특필될지 그 누가 확신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조성규 스스로가 확신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성공 오랜 시간 조성규와 알고 지냈다고 자부한 탓에 이번 글을 쓰기 위해 특별히 인터뷰를 하지는 않았다. 매번 그러듯이 최근 들어 술자리에서 한 두번 어울렸고 이런저런 일 때문에 몇번 전화를 했을 뿐이다. 굳이 인터뷰를 하자며 마주 앉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거니와 결정적이었던 것은, 원고를 쓰기로 하고 그 사실을 통보했을 때 조성규로부터 이미 자신에 대해 경쟁매체에서 10페이지짜리 기획물이 진행중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타매체에서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하는 일, 나는 보란 듯이 손쉽게 그를 추적하고 탐구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그런 나를 두고 조성규는 언젠가 좀 오래된 기자라는 이유로 요즘 기사를 너무 함부로 쓴다고 비난한 적 있다. 난 그때 함부로 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막상 백지 스크린을 마주하고 앉으니 나 역시 그에 대해 딱 떨어지는 멘트가 떠오르지 않았다. 조성규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는 어떤 인물이었나. 이건 내가 그를 알면서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는 얘기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요 최근 2~3년 사이 조성규의 주변이 많이 변했다는 것, 그래서 그 역시 굉장히 많이 변했으며, 더불어 굉장히 많이 성장·발전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에 대해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던 건 그때문이었다. 보란 듯이 그에 대해 손쉽게 쓰고 싶었지만 하루 시간을 온전히 날리면서, 그래서 원고 마감 기일을 지키지 못하면서까지 끙끙댔던 건 그때문이다. 윤곽이 잘 잡히지 않았다. 이건, 원시적으로 만나서 녹음기 틀고 메모를 해가며 정통의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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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규 대표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가장 현실적인 영화인 그런데 그 와중에 자꾸 떠오르는 말은 '현실적(pratical)'이라는 단어였다. '조성규는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구문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그 점이야말로 지금의 조성규를 있게 한 요소, 지금의 스폰지를 성공시키게 한 요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양가적인 단어다. 일순, 처세술이 뛰어나다는 느낌도 갖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 합리적이고 심지어 현명하다는 느낌도 준다. 그 중의적인 의미가 조성규에게는 딱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당신은 처세에 능해, 라고 말하면 분명 그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겠지만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엄혹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마이클 윈터바텀과 기타노 다케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페드로 알모도바르, 이누도 잇신 등의 영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현명하고 합리적인 성정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선의 의도가 최선의 결과만을 가져 오지 않듯이 지금의 세상살이는 종종 최선을 의도하지 않았으나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최선의 결과를 보지 최선이지 않은 의도를 간파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최선의 의도를 일부러 가져가지 않으려는 건 일종의, 세상을 돌파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조성규는 바로 그걸 잘 아는 인물이다. 조성규는 그렇게, 여우같이 영리한 측면이 있다. 아, 지금에서야 시작할 말이 떠올랐다. '조성규는 여우다!'
<조제,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성공 처음엔 그 누구도 그의 성공, 스폰지의 '신화창조'를 쉽게 예견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성공할지도 몰라, 라며 질투 반 부러움 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누도 잇신의 일본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선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 그리 오래된 얘기는 아니다. 2004년 하반기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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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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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몇 개 안되는 스크린에서 상영되면서 7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한 영화에 1300만이 넘는 관객이 몰리는 요즘, 7만이라는 숫자는 초라한 것이라는 말같지도 않은 얘기는 이 지면에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관객수의 의미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7만은 다른 영화의 700만과 맞먹는 수치다. 그러니 그런 촌스런 얘기는 정말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전에는 조성규도 나름대로 엄청 고생을 했다. 자신의 영화사 이름을 '스폰지'로 바꾼 것이 2002년이었다. 영화판에서조차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 전에 그는 '디지털 네가'라는 영화사를 운영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의 얘기다. '디지털 네가' 시절에 그가 수입했던 영화 가운데 대표격 작품이 바로 왕가위의 <화양연화>였다. 그때 그는 그 영화를 비교적 크게 '풀어서' 비교적 크게 '망했다'. 그 당시 조성규는 지금처럼 영화 수입외에도 제작에도 욕심을 내고 있었는데 프룻 챈 감독을 기용해 제작한 <화장실, 어디에요>는 결국 회사 문을 닫게 만들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의미해서 회사 문을 닫은 것은 아니었다. 그 실패의 와중에서 그는 새로운 형태의 영화사 구조를 계획했고 바로 그것이 지금의 스폰지가 됐기 때문이다. '디지털 네가'에서 지금의 '스폰지'로 넘어가는 과정, 특히 그 전에 '디지털 네가'가 만들었던 영화주간지 'NeGA'까지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조성규 역시 꽤나 복잡한 인맥을 충무로에 깔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NeGA'는 지금은 많이 보편화돼 있지만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빨랐던, 무가지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 그 '네가'에 모였던 인물들 상당수가 여전히 지금의 '스폰지'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공의 키는 해외 네트워크로부터 '스폰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계속해서 이어져 오는 '맨파워'가 존재했기도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인적 네트워크는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부터 왔다. '스폰지' 설립을 전후해서 그는 해외 인맥들과의 광범위한 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주요 백그라운드가 되는 관계들은 영국(한웨이, 웍스)과 프랑스(셀룰로이드 드림, 카날 플러스, MK2), 일본(쇼치쿠, 도에이, 가도가와, 기타노 오피스), 미국(포커스, 서밋, 뉴라인), 홍콩(제톤)의 예술영화 제작사들이거나 이들을 다루는 판권판매업자들에서부터 나왔다. 생각해 보면 그도 그럴만 했다. 한국에서 온 바이어 가운데 라스 폰 트리에에 열광하고 빔 벤더스나 파트리스 셰로라면 무조건 사고, 자끄 리베트의 영화에 누가 관심을 가지며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오종, 짐 자무쉬라면 일단 사인부터 하는 수입업자는 거의 이 사람밖에는 전무했으니까. 조성규가 이들이 그 누구보다도 1차적으로 컨택하는 포인트가 되고 무엇보다 비교적 낮은 가격에 작품을 들여 올 수 있게 된 것은 한국영화계 내 '이 사람밖에' 없다는 인식을 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가영화들을 들여오기만 한 것으로는 그를 두고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들여오기만 했다면 그는 '이상주의자'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제 이런 영화는 안되니까. 극장에 거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 됐으니까. 그가 '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데는 그런 상황속에서 이들 영화를 꾸준하게 상영할 수 있는 환경, 더 나아가 종종 영화를 흥행시킬 수 있는 여건, 혹은 극장 개봉과정에서는 밑지더라도 이후의 부가판권 시장에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얘기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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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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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런 얘기다. 현재 서울의 메가박스와 스폰지가 운영하는 극장 '스폰지 하우스', 단 두곳에서만 상영중인 일본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BEP를 어떻게 맞추는지 따져 보자. 일단 이런 영화는 들여올 때 돈을 거의 쓰지 말아야 한다. 아까 얘기한 대로 바깥에 광범위한 인맥,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조성규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가지고 올 때 일본 판매업자에게 1000만원 정도를 지불했거나 혹은 개봉 이후 수익이 남으면 그것을 몇대몇으로 나누는 '환상의' 조건으로 국내 개봉을 허락받았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아무리 수입비용이 안든 영화라 하더라도 일단 배급 과정을 타게 되면 돈이 들어가게 돼있다. 마스터 필름이 바다 건너 들어오는데 통관비라는 것을 써야 하며 그 필름을 가지고 극장 스크린 수에 맞춰 프린트를 떠야 하며(프린트 한벌 뜨는데 200만원 이상이 든다. 그래서 전국 10개 스크린에 영화를 개봉할 때 프린트 비용은 2000만원 이상이 들어가게 된다) 무엇보다 개봉이 결정되면 신문과 방송, 인터넷, 전광판, 버스, 지하철 등등을 통해 광고를 하고 마케팅을 해야 한다. 이 비용은 작품 가격과 상관없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든다. 만약에 지금까지의 스폰지 영화들이 평균 1억원의 비용이 들었다면 전국 3만명은 들어야 극장과 매출액을 5:5로 나눈 후 간신히 손익분기를 맞추게 된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이후에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TV 등 부가판권을 팔아 수익을 남기는 것인데, 이런 시장구조가 국내에서는 현실적으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스폰지의 그 우수하고 주옥 같은 영화들이 전국 1만명 이상의 관객을 확보할 수 있는 시장구조가 무너진 것이다. 이런 영화들은 시장을 순회하며 오래 버틸 수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영화시장, 배급구조는 오로지 '와이드 릴리즈' 방식만이 생존할 수 있게 돼버렸다. 스폰지가 올해 초 개봉했던 빔 벤더스의 최고 걸작 <돈 컴 노킹>같은 영화가 달랑 7~800명밖에 모으지 못했던 것은 작품 탓이 아니고, 스폰지 탓이 아니며 조성규 탓이 아니라 철저하게 왜곡돼 버린 이놈의 시장 탓이다. 한국영화 플러스 할리우드 영화가 전체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시장, 상업영화 대 비상업영화의 시장점유율 구조가 95:5인 나라. 바로 그 척박한 문화 탓이다.
예술영화는 돈을 안쓰는 것이 버는 것 어쨌든 각설하고, 그렇기 때문에 조성규는 그런 영화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는 시장에서 끊임없이 얼굴을 내밀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이 바로 돈을 버는 쪽을 생각하지 말고 돈을 안쓰는 쪽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돈을 안쓰는 쪽. 그러니까 조성규와 스폰지는 이 작가영화/예술영화/비상업영화/독립영화를 수입배급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배급비용을 제외하고는 전혀 돈을 쓰지 않는다. 첫째 마케팅비를 전혀 쓰지 않는다. 신문광고 TV광고, 인터넷 광고, 심지어 영화 전문지 광고도 전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광범위한 인맥을 활용한다. 영화가 좋기 때문에 언론이 외면할 수 없다는 '약점'을 그는 활용한다. 기자들로 하여금, 평론가들로 하여금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고, 더 나아가 거품을 물게 만든다. 그의 영화가 전혀 광고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늘 광고 이상의 효과를 가져오는 건 그 때문이다. 그가 여우라는 건 그 때문이다. 둘째 절대 스크린수를 5개 이상으로 늘리지 않는다. 스크린수를 늘리지 않으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단 적은 스크린이나마 고정적인 개봉관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 2주 이상을 그나마 시장에서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별다른 메리트없이 직원들만 '신나게' 고생시키는 일인 '서울유럽영화제'를 오랜 기간 계속해 온데는 대신 그는 메가박스라는 안정된 상영관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손해나는 짓을 자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울유럽영화제'에 객석점유율 99%라는 지지를 보냈고 메가박스는 자연스럽게 대가를 지불하게 됐다. 메가박스와 스폰지는 처음엔 갑을관계였으나 지금은 내용적으로는 그 관계가 뒤바뀐 셈이 됐다. 서울 종로2가의 시네코아가 폐관을 하면서 2개관을 스폰지 측에 '스폰지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위탁운영을 맡긴 것은 조성규측으로 봤을 때는 사업의 커다란 터닝 포인트가 된, 일종의 '쾌거'와 같은 일로 평가된다. 스폰지 하우스를 운영하게 됨으로써 그는 이제는 다른 극장 배급을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소규모나마 직접배급 체제를 구축하게 됐기 때문이다. 돈을 쓰지 않으면서 티끌모아 태산으로 돈을 모으는 마지막 세번째 방법이 바로 부가판권 수익이다. 공중파와 케이블TV 등의 부가시장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계속 영화를 들여오고 거의 돈을 쓰지 않고 배급과 마케팅을 하는데다 적은 수이긴 하더라도 중앙의 극장에서 2주 이상 개봉하는 영화들의 화려한 라인업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부가판권 시장의 활로가 열리게 됐다.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조성규와 스폰지는, 남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니 뭐니 하며 허황된 꿈을 꾸고 있을 때 작품당 500만원 1000만원을 벌어 들이는 전법으로 영화계 내에서 차별화된 시장을 차지하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남들은 95% 시장에 몰려 이전투구를 벌일 때 그는 5% 시장으로 눈길을 돌려 그 5% 시장을 온전히 차지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5%를 10%의 시장점유율로 넓히는 데까지 성공하고 있다. 그의 성공을 두고 '신화창조'에 가깝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비상업영화를 원 스톱 서비스로 구현 이제 그는 규모는 다르지만 메이저 영화사가 갖추고 있는 수직구조를 갖출 만큼 성장했다. 영화사 스폰지로 제작 혹은 수입을 하면서 컨텐츠를 만들어 내고 극장 스폰지 하우스를 통해 이를 배급하며, DVD를 제작하면서 부가시장까지 확장해 내고 있다. 공중파와 케이블TV 시장에 판권을 넘기는 대신 향후 스폰지TV라는 이름의 케이블 PP를 설립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케이블 PP까지 만들어 내면 명실공히 스폰지는 영화계 내에서 완벽한 '원 스톱 서비스'를 구축하게 되는 셈이다. 스폰지 하우스 역시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부산 등지로 확장할 계획도 갖고 있다. 최근엔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40억원짜리인 '다양성 영화펀드'까지 지원받았다. 조성규와 스폰지는 요즘 날개에 날개를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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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타나모로 가는 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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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조성규와 영화사 스폰지는 이제 국내 영화계의 큰 손이다. 큰 손이라고 불러도 큰 이견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됐다. 하지만 스폰지는 흔히 얘기하는 '큰 손'의 개념과는 매우 다른 의미의 존재가 될 것이다. 영화를 '돈'이나 '사업'만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물질적 부자가 되기 보다는 정서적인 부자가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산업이 아니라 미학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한다는 것을, 여전히 '사명'과 '운동'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초심이 계속해서 유지되는 한 조성규와 스폰지가 '큰 손'이 되는 건 진정으로 박수를 쳐줘야 할 일이다. 얼마 전 스폰지가 수입한,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을 보면서 윈터바텀은 정말로 정말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조성규도 그렇다. 조성규와 함께 스폰지를 키운 사람들 조은운, 이지혜, 서은정이 그렇다. 그들 모두에게 진심어린 찬사를 보낸다. (* 이 글은 영화전문 격주간지 '프리미어'에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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