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헌법적 규정으로는 '제6공화국 4기 노무현 정부'가 공식명칭이다. 87년 이후 헌법이 바뀐 적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름만큼이나 큰 차이를 갖는다. 아니 슬로건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큰 시대적 변화를 상징한다. 21세기 첫 대통령이며, 해방후 세대 첫 대통령이고, '3김정치' 이후 첫 대통령이다.
이렇게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모든 국민이 안다. 지난해 1년에 걸친 대선과정의 드라마틱함을 경험한 우리 모두가 노무현 정부는 이전 어떤 정권과도 뚜렷이 다를 것임을 예감한다.
***反개혁적 상황에서 출범하는 개혁정부**
노무현 정부는 자타가 공인하는 개혁정권이다. 4.19 혁명 직후를 제외한다면 우리 헌정사에서 가장 개혁적 정권이라 할 만하다. 아니 그렇게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노 정권이 출발하는 오늘의 상황은 개혁의 앞날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다소 과장을 무릅쓴다면 역사상 가장 개혁적 정권이 역사상 가장 반(反)개혁적인 상황에서 출범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전을 감행하려는 미국의 보수 매파 부시정권, 이는 전통적인 한미 안보관계를 고려할 때 개혁을 내세운 새 정부에게 여러 가지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북핵문제라는 현안을 두고 미국과 북한은 첨예한 벼랑끝 대치상황이다.
또한 미국에 대항할 떠오르는 경쟁자 중국의 이상한 침묵, 동북아시아와 유럽 양쪽 모두에서 권한 강화를 꾀하는 러시아의 적극적 개입, 그 한복판에서 새 정부가 출범한다. 새 정부가 남북관계에서 뭔가 도모해 보기도 전에 국제적 흐름에 따라 한반도정세가 좌지우지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경제면을 보자. 미국경제가 언제 되살아날지 미지수이며, 일본의 장기침체 역시 회복 기미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은 우리에게 기회이지만 동시에 무서운 도전이다. 단기적으로 전쟁 위기로 인한 원유가 등 원자재 가격앙등은 이미 직접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
국내 경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IMF 극복을 위한 과도한 경기부양의 후유증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반도체ㆍ자동차 등 최근 한국경제의 급성장을 이끌어 왔던 주력 상품을 대체할 선도산업의 윤곽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개혁 등 과감한 개혁 추진은 경제위기 극복 내지 안정과 성장을 앞세운 기득권의 저항논리에 번번이 부딪칠 수밖에 없다.
또한 노무현 정권은 역사상 가장 힘이 약한 정권으로 출범하고 있다. 보수적 야당이 압도적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고, 소수 여당도 당 전체가 노 대통령의 개혁이념에 동조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그뿐 아니라 언론, 재계, 관료, 지식층, 전문직 등 이른바 사회주도층 내에 권력의 병풍막이도 극히 취약하다. 아니 병풍막이는커녕 호시탐탐 실수와 빈틈을 노리는 맹수들과도 같다.
이처럼 상황이 너무도 어렵다. 지난 대선은 개혁 대 안정이 대립이었고, 분명 다수 국민이 개혁을 지지했다. 하지만 정작 그 개혁을 실천할 힘은 지금부터 새롭게 만들어야 하며, 당장 눈앞의 상황은 첩첩산중이다.
***대통령이 짊어져야 할 '가장 무거운 돌 한 개'**
수년 전 얘기다. 노 대통령이 통추를 할 때인지, 아니면 '꼬마 민주당'을 할 때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다. 어쨌든 그때 노 대통령은 상황이 어려웠다. 비록 소수지만 각자 개성이 강한 몇몇 정치인들과 어떻게든 힘을 합해 뭔가 이뤄야만 할 때였다.
그때 지금은 노 정권의 핵심실세로 불리는 한 측근이 이런 비유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엄청나게 무거운 돌 한 개를 짊어지고 옮기는 것과 고만고만한 작은 돌 여러 개를 들고 옮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힘들까?" 답은 '작은 돌 여러 개 들고 옮기기'였다.
지금 노 대통령은 똑같은 고민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대선과정 역시 험난한 고비가 많았지만 어쨌든 지난 1년은 '무거운 돌 한 개 짊어지고 옮기는 일'이었다. 당선이란 단일 목표를 향해 웬만한 일들은 제쳐두면서 성큼성큼 큰 걸음을 떼었고, 그래서 승리했다.
하지만 당선된 직후부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것도 숱한 장애를 넘어야만 한다. 대통령으로서 국정의 어느 한 부분 소홀히 할 수 없기에 이건 아마도 '작은 돌 여러 개', 아니 '무거운 돌 여러 개'를 한꺼번에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일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여기서 답은 명확하다. 대통령 혼자서, 청와대 혼자서 '무거운 돌 여러 개를 한꺼번에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대통령은 무거운 돌 딱 한 개만 짊어지고 가기 바란다. 나머지 돌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들어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여건과 상황을 만들어 주는 일, 그것이 대통령이 짊어지고 가야 할 '가장 무거운 돌 한 개'이다.
노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활동, 인수위의 활동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의욕 과잉'이었다. 너무 많은 분야에 너무 많은 개혁구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통령이 젊어서 힘이 넘친다"는 비아냥도 많았다. 개혁에 동의하는 사람까지도 함께 걱정한 대목이 바로 여기다.
이제는 구상이 아닌 실천단계다. 그것도 잠깐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되돌릴 수 없도록 착근시켜야 한다. 이 일들은 개혁이 필요한 바로 그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해야 가능한 일이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모든 현장을 찾아 개혁을 실천할 수는 없다. 초기엔 대통령이 무서워 잠깐 하는 척 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될 위험이 크다.
사회 각계에서 개혁의 힘이 처음엔 조그맣게, 하지만 점점 크게 솟구쳐 나와 여러 사람이 각자 나름의 돌을 들고 옮길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는 일을 최우선하기 바란다. 대통령이 마땅히 짊어지고 가야 할 이 '무거운 돌 한 개'를 함부로 내려놓고, 눈앞에 보인다고 아무 돌이나 집었다 놨다 하지 말기를 바란다.
***5년후 개혁의 힘이 조금이라도 커진다면 성공**
대선이 치러진 지난 1년을 '집단적 흥분상태'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봄부터 시작된 민주당 경선의 대역전극, 이어 불어 닥친 노풍(盧風), 월드컵 바람, 정풍(鄭風)과 단일화의 극적 반전, 그리고 촛불시위. 이 모든 것이 연달아 터지면서 '집단적 흥분'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노 대통령이 이것을 의도했든 안 했든 결과적으로 승리에 기여했다. 이 사회 변화와 개혁의 동력이 최고조에 달한 그 꼭대기에 노 대통령이 자리 잡은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5년을 계속 그러한 흥분의 분위기로 만들 수는 없다. 노 대통령 스스로 취임 직전 한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다.
"크게 내다봐서 결국 한국 정치는 개혁돼야 하고, 나가게 되어 있다. 적어도 지난번 대통령 선거 때 있었던 수준, 다음 총선에서는 그 수준에 조금 못 미치고 약간 후퇴할 것이지만, 내 임기 5년 동안에는 지난 대선 때보다 훨씬 더 앞으로 나간 개혁적인 정치 환경이 만들어 질 것이다. 아마 다음 총선은 지난번 대선만한 대중적 분위기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어떻든 가까이 가까이 가게 되어 있다."
그렇다. 욕심 같아서는 앞으로 5년 내내 질풍노도의 시기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큰 성과를 이루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김대중 정부도 김영삼 정부도, 심지어 노태우 정부도 모두 개혁을 내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개혁은 우리의 과제다. 개혁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아니 개혁의 성공, 완성이란 아예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5년 후 노 대통령이 퇴임할 때 작년 대선과 같은,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강화된 변화와 개혁의 동력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노 대통령은 성공한 것이다.
***아집과 독선에 빠지지 말고, '참여'의 初心 지켜가길**
여기서 노 대통령 스스로 내세운 '참여정부'가 힘을 발휘해야 한다. 진정한 참여의 동력을 일구고 키워가길 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혼자 하는 개혁이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범국민적 참여의 개혁이 일어나도록 인내하고 유도하는 뒷심을 발휘해 주길 바란다.
참여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아집과 독선이다.
누가 뭐래든 양김씨는 지난 수십 년 이 나라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그 둘이 차례로 집권해서 개혁을 외쳤다. 이룬 것도 많다. 하지만 동시에 '개혁 피로감', '개혁 거부감'을 확산시킨 과정이기도 했다.
그 핵심 이유가 바로 양김씨의 아집과 독선이다.
개혁은 참여 없이 불가능하다. 참여는 아집과 독선이 시작되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다.
노 대통령이 집권 5년을 질풍노도의 시기로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대통령 스스로 아집과 독선에 빠질 위험성이 커진다. 자신의 뜻대로 이뤄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반(反)개혁이라 칭하며 몰아붙이게 될 우려가 커진다. 그만큼 참여의 동력은 떨어지고 개혁은 실패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다.
인수위 활동을 마감하면서 인수위원들은 노 대통령에게 초심을 잃지 말자고 함께 다짐했다 한다.
똑같은 마음이다. 참여정부는 앞으로 5년 내내 스스로 내세운 '참여'의 진정한 초심을 잃지 말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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