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문정현 신부.'
필리핀 빈민운동의 대부이자 아시아 민주화 운동의 선각자인 데니스 머피(76)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주는 건 어떤가? 문정현 신부가 노동자, 농민, 빈민들과 함께 싸우며 그들을 위해 머리띠를 묶고 거리에 서 왔듯이 데니스 머피도 미국인 신부로서 1967년 필리핀과 인연을 맺은 후 아시아 곳곳에서 빈민들을 위한 삶을 살아 왔다.
지난 2003년 '한국 시민사회 아시아센터(Korean NGO's Asian Center)'를 공동 설립해 한국 시민운동의 경험을 아시아 각국의 시민사회와 나누기 위해 노력해 온 데니스 머피가 한국을 찾았다.
8일 서울 시내의 한 아담한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정부의 사우스 레일 사업으로 필리핀 주민들은 고통받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한국을 찾은 바 있는 머피가 이번에 또 한국을 방문한 목적은 한국 정부가 자금을 대고 대우인터내셔널이 공사를 하고 있는 '마닐라 남부 통근열차 프로젝트(사우스 레일 사업)'의 문제점을 한국 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사진 1〉
사우스 레일 사업은 총 6486만 달러의 자금을 투자해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36km 길이의 통근용 철도를 새로 놓는 사업이다. 필리핀 정부는 이 사업의 추진을 위한 자금 지원을 여러 나라에 요청했으나, 현지 주민들이 생존권 문제를 들어 반대활동을 벌이는 바람에 자금 유치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가 한국 정부가 이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자금 지원을 결정하고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에서 유상원조(열차 및 기타 자재를 한국에서 수입하는 조건)를 하기로 함에 따라 대우인터내셔널을 시공사로 해서 이 사업이 착수되게 된 것이다. 정부는 2003년 국회 승인을 거쳐 2004년 5월 EDCF 차관 공여계약을 필리핀과 체결했다.
물론 한국 정부가 사우스 레일 사업에 유상원조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나라의 해외원조(ODA)가 경제수준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문제에 대한 지적이 여러 차례 나왔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작 새 철도가 건설될 지역에 살고 있는 필리핀인들은 삶의 터전에 위협을 받고 있다. 재개발을 위해 원래 살던 사람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았던 장면이다. 주민들에게 말로 위협도 하고, 이사갈 비용도 안 되는 돈으로 구슬러도 보고, 용역깡패를 동원해 폭력도 행사하는 익숙한 풍경. 필리핀에서도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주민들의 이주를 위한 대책을 전혀 수립하지 않고 "주민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강제철거를 위협하는" 필리핀 정부에 있다. 필리핀 정부는 이 사업으로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된 총 4만 가구의 필리핀 사람들에게 "먼저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면 나중에 보상을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머피는 이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못박았다.
"필리핀 정부는 주민들에게 자발적인 퇴거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한다. 일단 살던 곳에서 퇴거하면 나중에 보상해주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들은 옮겨갈 곳도 없다. 정부가 지정해준 새로운 주거 지역에는 아직 집이 지어져 있지도 않다."
〈스캔한 사진 2, 3 : 한국 정부의 유상원조 지원으로 추진되고 있는 사우스 레일 사업으로 인해 철로변의 주민들은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좌) 한 필리핀 여성이 한 손에 칼을 들고 담벼락에 붙은 벽보를 보며 싸움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벽보에 "우리는 우리가 옮겨갈 새로운 지역이 완성되지 않는 한 이사갈 수 없다"고 씌여 있다.(우)〉
그러나 머피는 필리핀 사람들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이 사업이 정작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에 눈감고 있는 한국 정부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원조가 도리어 철로변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터전을 빼앗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한국 정부는 철도 건설을 위한 돈만 지원할 뿐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주 대책에 대해서는 어떤 고려도 하지 않고 있다."
머피는 한국 정부가 '너희들의 생존권 문제는 우리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한국 정부는 '우리는 필리핀 정부가 요구한 것을 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삶의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저항하는 필리핀 주민들에게 한국 정부는 이것이 너희들이 원했던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다."
게다가 필리핀 정부는 도로와 철도 등 국가 인프라 건설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다른 나라에서 돈을 빌려 사업을 추진할 용의가 있지만 정작 자국 민중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머피는 빈민들에 대한 교육이나 보건과 같은 사회보장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시각이 이번 사태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필리핀 정부의 이같은 시각에 한국이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고 주장했다.
***"한국인 자신이 해야 할 말 아닌가?"**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의 국제금융기구들은 주민의 주거에 대한 대책이 없으면 아예 돈을 대주지 않는다"고 머피는 설명했다. 피해를 보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개발사업에 대해서는 국제금융기구에서 지원하지 않는 것이 최근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데는 수많은 사람들의 저항이 있었다. 한국도 이번 사업과 관련된 주민들의 문제를 고민해보는 것을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외원조를 성숙시킬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한국에 "좋은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으로 인해 주민들이 입고 있는 피해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정부는 '너희들이 알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되지 않느냐'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머피에게 한국의 정부 당국에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직접 한국 정부에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누군가 말을 해야 한다면, 한국인 자신이 말하는 게 가장 좋은 것 아니냐."
투표권을 행사해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국 국민들 자신이 나서는 게 자신과 같은 외국의 운동가가 나서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그는 아시아의 몇몇 나라에서 유권자들과 함께 해당국 정부로 하여금 문제가 있는 개발사업의 시행방식을 변경하게 한 경험이 있다.
기자는 "정작 한국인들은 별반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사우스 레일 사업의 경우 국내 언론 중 유일하게 〈프레시안〉만이 보도했을 뿐, 실제로 한국 정부가 필리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다.
"그래서 한국에 왔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이 필리핀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한국 정부도 정확하게 사실 파악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필리핀 정부로 하여금 이 사업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주민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한국 정부가 요구해야 한다.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려고 하는 필리핀 정부의 불법적 행위를 한국 정부가 나서서 못 하게 해야 한다"
***한국과 맺은 30년 인연…"전태일은 1970년대 한국의 상징"**
그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여러 번, 아니 아주 많이 한국을 찾았다"고 말했다. 30년이 넘는 인연인 셈이다.
"한국의 군부독재 시절에 우리는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었다. 강변을 따라 살고 있던 빈민들, 산동네 사람들, 철거민들, 공장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한국을 여러 번 찾았다.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좋아졌다. 그래서 옛날처럼 자주 오지는 않는다."
한국을 자주 찾았다는 그에게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1970년대에는 한국을 찾아올 때마다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국의 활동가들이 내게 개인 전화기를 사용하지 말고 공중전화만 이용하라고 했다. 그들은 '이 번호로 전화를 걸면 한 여자가 답할 것이다. 다른 질문은 하지 말라' 하는 식으로 연락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마치 첩보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우리의 어두웠던 과거를 외국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다소 생경했지만 오히려 구체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는 한국의 관료들을 만나던 순간도 회상했다.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했다.
"한번은 한국의 철거민 문제와 관련해 나와 같이 일하던 여러 나라 친구들과 함께 한국의 고위 공무원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은 굉장히 놀라웠다. 당신들이 몇 명이나 철거를 시켰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40만 명이라고 대답했다. '철거'라는 것은 그 당시에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40만 명을 철거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의 질문에 당당하게 수치를 제시하는 그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전태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1970년대 한국은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 젊은이는 자신이 일하던 곳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의 삶과 죽음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당시 한국의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없었다."
***아시아 민중 "도대체 언제 삶이 좋아지나?"**
한국은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바람과 함께 찾아온 1997년 금융위기 이후 빈곤의 양극화는 가속되었고, 없는 사람들의 박탈감은 더욱 커져 갔다. 그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한 친구에게 사람들의 삶이 안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경제개발이 노동자들을 더 힘들게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노동조합들이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 대기업 노조들이 나이든 노동자들, 교육수준이 낮은 노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머피는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면 노동자들 내부에 분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노동자'이지만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가 생기고, 그 사이에 차별과 갈등이 생기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그는 안타까워했다. 자신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기를 바라는 그의 목소리는 그가 왜 '빈민들의 아버지'로 불리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사진 4〉
여전히 빈곤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단 파이를 키우면 나중에 분배할 몫이 커진다'는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머피는 아시아의 빈민들이 "도대체 언제? 도대체 언제 삶이 좋아지냐?"고 비통해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위아래를 뒤흔드는 일이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떻게 위아래를 뒤흔들 수 있을까? 그에게 방법을 물어봤다. 그는 일단 "글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필리핀에서 빈민운동을 하고 아시아 각국의 민주화운동에 힘을 보태 온 그다. 그가 설립 과정에 참여하고 공동소장 직도 맡고 있는 아시아센터도 바로 그런 위아래를 뒤흔들기 위한 노력의 하나일 것이다.
"빈민들에게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는 사실 상관이 없다. 대통령이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그들의 삶은 항상 처참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위해 일해줄 수 있는 사람을 뽑고,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위아래를 뒤집는 것 아니겠는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 '아시아센터'의 창립목적이자 활동방향이다. 이를 위해 아시아센터는 아시아 각국 활동가들에게 체험연수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시아 각국의 시민운동 경험을 서로 공유하도록 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데니스 머피 역시 "매우 어려운 싸움"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미국인으로서 한 평생을 아시아의 빈민들을 위한 싸움에 바쳐 온 '파란 눈의 문정현 신부'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싸움만은 아닌 듯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