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막을 내린 제55회 프랑스의 칸 국제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 감독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 영화계는 칸영화제 공식경쟁부분 입상이라는 오랜 숙원을 풀게 됐다.
이번 감독상 수상으로 임권택 감독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영화계에서도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임 감독의 화려한 영광은 지난 20년간 변함없이 한 발자국 뒤에서 많은 제작비 손실을 감수하면서 변함없이 임감독을 지원해준 제작자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64)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영화계의 중론이다.
***이태원 사장, "경상비 포함하면 한 2백억원 까먹었지"**
태흥영화사의 고위 관계자는 28일 “이 사장이 임감독 작품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본 것은 별로 없고 이전에 건설업으로 번 돈과 배급, 극장운영 등으로 얻은 수익을 도리어 쓰는 편”이라고 밝혔다.
그는 “임권택 감독이 이렇게 칸에서도 인정받는 영화를 연출 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흥행상품 이전에 한 나라의 ‘문화대표’라는 이 사장의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태원 사장은 평소 "돈은 벌 만치 벌어봤으니 이제는 영화를 통해 돈벌이를 하기보다는 칸 영화제 등 세계적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영화를 한번 만드는 게 소원"이라고 말해왔다.
실제로 이 사장은 지난 20년간 임감독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면서 많은 돈을 날렸다.
한 예로 현재 상영중인 '취화선'도 60여억원의 제작비를 들였으나 관객은 28일 현재 20만명 정도에 그치고 있다. 제작자에게 돌아오는 흥행수익이 10만명 당 3억5천만원 정도이니, 약 40억원 정도를 날린 셈이다.
지난 2000년 임감독의 '춘향뎐'을 다른 영화사나 투자자들이 흥행여부의 불투명 때문에 꺼릴 때에도 이 사장은 "나 아니면 누가 하겠냐"며 제작을 맡아 30억원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당시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을 정도로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춘향뎐'을 본 관객은 30만명 정도를 간신히 넘었고, 그 결과 이 사장은 20억원 정도를 날렸다.
이태원 사장은 얼마 전 한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업을 하면서 경상비 포함하면 한 2백억 까먹었다" 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임감독 작품이 세계적 영화제에 나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런 노력이 쌓여 이번 수상이 가능했다는 게 충무로 관계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떡 한번 크게 해먹은 셈 치지, 뭐.”**
이태원 사장은 시쳇말로 '노가다' 출신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후 남으로 내려와 64년 태흥상공(주)이라는 건설업체를 설립해 큰 돈을 모았다. 당시 건설업계는 필요할 경우 주먹도 써야 하는 험한 동네였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경우도 60년대 건설공사 수주과정에 두차례나 주먹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풀려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아직도 이태원 사장의 모습에서는 험한 세계에서 살아온 '보스'의 모습이 읽히고 있다.
건설업을 하던 이태원 사장이 영화계와 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75년 경영이 어려워진 친구의 의정부 국도극장을 대신 인수, 흥행업계에 발을 디디면서부터이다. 그후 그는 성남 중앙극장 등 영화관을 사들이며 세를 확장했고, 전국극장연합회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83년 태흥영화사를 설립, 직접 영화 제작업에 뛰어들기에 이르렀다. 이때 만난 인물이 다름아닌 임권택 감독이다.
1983년 ‘비구니’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제작자와 감독 사이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 작품이 불교계의 반발로 인해 촬영이 중단되고 결국 제작이 포기되는 과정에 외부의 압력을 견디면서 서로 돈독한 우애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이때 감독으로서 제작자에게 손해를 끼친 점을 부담스러워 하던 임 감독에게 이태원 사장이 했다는 말이 지금도 충무로에서는 회자되고 있다.
“떡 한번 크게 해먹은 셈 치지, 뭐.”
이사장의 통 큰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다.
***정부압력을 뿌리친 이 사장의 '뚝심'**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그후 제작자와 감독으로 명콤비를 이뤄 수많은 대작을 생산해냈다.
1989년 함께 작업한 첫 작품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국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등을 휩쓴 데 이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수상하는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임 감독이 일방적으로 이태원 사장의 도움만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 사장이 어려울 때에는 임 감독이 도왔다.
이 사장은 90년대초 자신의 영화사가 어려울 때 ‘장군의 아들’같은 상업성 오락영화에 임 감독이 ‘거장’이라는 명성을 접고 연출,위기를 넘게 해 준 데 대해 고마움을 느껴 그후 임 감독과 인간적으로도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그후 두 사람은 93년 '서편제'를 비롯해 94년 '태백산맥', 2000년 '춘향뎐' 같은 작품성 높은 대작을 생산해냈다.
이 사장과 ‘춘향뎐’까지 작업을 계속해 온 한 스텝은 “이 사장의 작품들은 극장 한 곳에서만 영화를 개봉하던 '단관 개봉시절'에 흥행한 작품이 많아 요즘 젊은 제작자들의 영화처럼 영화로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껏 번 돈은 모두 영화에 투자했고 임감독 작품뿐 아니라 다른 감독들의 작품을 제작할 때도 소품이나 촬영장비 같은 실제 제작에 아낌없이 돈을 들이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자신이 제작하는 영화의 촬영장에 매일 직접 나가서 현장을 챙기지만 감독에게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감독을 일단 정한 후에는 연출에 대한 믿음이 영화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사장은 '뚝심'으로도 유명하다. 해방후 좌우익 대립사를 그린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영화로 만들던 지난 94년도 일이다. 작품의 이념성을 우려한 정부가 제작 허가를 안내줬다. 이때 이 사장은 정면에 나서 불같이 화를 내며 정부 관계자들과 세게 맞붙었고, 결국 정부의 외압을 극복하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영화인들은 그 때 이 사장이 보여준 뚝심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런 주먹이라면 '멋진 주먹'이 아닌가**
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많은 인권변호사들이 일선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웠고, '참 변호사'라는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이같은 명예는 이면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들을 도운 동료변호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인권변호사는 "군사독재 시절 인권변호를 하다보면 사건을 맡을 수 없어 사무실 유지비나 인건비조차 조달할 수 없었다"며 "그럼에도 계속 인권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위에서 말없이 자신의 수임료중 일부를 떼내어 도와주던 동료 변호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임권택 감독은 80년대 이래 작품성 있는 영화만을 고집해온 장인이다. 미국 할리웃에도 작품성을 고집하는 영화인들이 적지않다. 그들은 대부분 소자본으로 '인디영화'를 만든다. 임감독은 그러나 흥행에 구애받지 않고 거액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대작들을 만들어왔다. 세계적으로 드문 예이다.
지난 20년간 이같은 장인의 길이 가능했던 것은 임 감독 뒤에 이태원이라는 영화 거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충무로 일각의 젊은 영화인들은 이 사장을 '주먹 출신'이라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젊은 영화인들이 상업성에 매달릴 때, 이 사장은 작품성을 추구했다.
이런 주먹이라면 '멋진 주먹'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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