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 재·보선이 과열 혼탁선거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재·보선 지역구에서 온갖 흑색선전과 비방이 난무하는 것도 모자라 정기국회마저 선거전에 휘말려 정쟁으로 뒤덮였다.
게다가 각 당은 수뇌부들까지 재·보선 지역구에 총출동하다시피 해 서울의 선거구 2곳은 온통 ‘금배지’ 투성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15일 현재 여야가 선거사무원으로 신고한 현역의원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박근혜 부총재, 민주당 이인제 김근태 한화갑 최고위원 등 모두 171명으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각 80명, 자민련 11명이다. 선거사무원 신고는 매일매일 달라지지만 선거 기간 내내 대동소이했다.
<표 - 국회의원 등이 선거사무원으로 신고된 현황>
각 당의 내노라하는 의원들이 거의 다 동원된 셈이다. 이들은 선거운동기간 내내 합동연설회와 정당연설회에 나서는 것은 물론 선거구를 동단위로 나누어 현역의원이 직접 동책을 맡아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다.
선거운동기간 동안 정기국회가 열리고 있는 국회 본회의장에는 50명도 안되는 의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국회의장이 국회 본회의장 출석 부르는 촌극**
이러다 보니 지난 1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이만섭 국회의장이 의원들의 출석을 부른 것이다.
이날 국회 본회의의 안건은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이었다. 닷새동안의 국회공전 끝에 정상화된 본회의였다. 그러나 폐회시간인 저녁 8시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회의원은 고작 40여명.
하루 종일 텅빈 자리를 보다 못한 이만섭 의장이 일일이 출석을 부른 뒤 “오늘 자리를 끝까지 지킨 분들에게는 내가 다음 선거에서 증인을 서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고, 국회의장의 비슷한 발언이 이어졌다.
재·보선 운동기간이 시작되면서 여야의 총력전이 벌어지자 여의도의 금배지들이 철새이동하듯이 동대문을과 구로을 지역으로 대거 이동해 버렸다.
그리고 민생문제와 당면한 정책현안 등 처리해야 할 안건이 산적한 정기국회는 텅 비어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금배지’를 보려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아닌 구로나 동대문에 가야 한다는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렇게 재·보선 선거운동이 과열되자 보다 못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까지 직접 나섰다. 지난 16일 여야 정당 대표에게 공명선거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것이다.
선관위는 “여야가 다수의 국회의원과 중앙당 당직자 등을 선거사무원으로 신고하여 선거현장을 방문하는 등 선거지원만 몰입하는 분위기가 엿보이며, 후보자에 대한 자질 검증 차원을 넘어 비방에 이르는 논평을 하여 점차 선거를 과열시키는 양상을 보인다”고 경고했다.
***정기국회도 재·보선 선거운동장으로**
재·보선의 과열행태는 단순히 인력지원뿐만 아니다. 정기 국회 자체가 안건처리보다는 재·보선을 지원하는 선거운동장으로 변해버렸다.
지난 16일에는 국회 대정부 질문을 통해 여야의원들이 재·보선 후보자들에 대한 원색적인 인신 공격을 퍼부었다.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재·보선 선거운동기간 내내 국회는 보수와 개혁 논쟁, 분당 신도시 개발비리 의혹, 야당의 벤처기업 자금 수수설, 그리고 김홍일 의원 실명 거론과 경찰 정보보고서의 한나라당 유출에 이은 한나라당 제주지부 압수 수색 등 그야말로 민생보다는 비리와 의혹을 둘러싼 난타전이 벌어졌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이러한 야당의 의혹 제기와 여당의 의혹에 대한 맞불작전이 모두 이번 재·보선을 겨냥하는 의도적인 선거전략의 일환이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실제 각 당의 선거 관계자들은 재·보선 승리를 위해 자신들의 고정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선거전략을 숨기지 않고 있다.
재·보선은 투표율이 낮아 어느 정당의 지지 세력이 더 많이 실제 투표장으로 향하느냐가 당락의 관건이 된다. 따라서 각 당은 자기 당의 지지 세력이 더 많이 투표하도록 온갖 선거전략을 짜내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탁월한 효과가 입증된 것이 바로 위기의식을 조장하여 자파 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이다.
민주당은 DJP공조 붕괴 이후 줄곧 소수당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위기를 강조해 왔다. 중앙당 차원에서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여당 프리미엄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은 여론조사 결과 자신들이 ‘열세’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공개하면서, 확인되지 않든 확인되든 조그만 불씨라도 지피기 위해 이른바 ‘의혹’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혹이야 당연히 제기해야 하지만, 선거를 위해 섣불리 의혹을 터뜨리는 바람에 오히려 진실을 제대로 파헤치지 못하고 면죄부만 주는 꼴이 되어버렸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내년 지방선거와 대선 혼탁상 예고**
사실 선거에 위기를 이용하는 전략은 해방 이후 독재정권이 애용해 왔던 것이다. 선거국면에 접어들면 이른바 안보위기를 조장하여 선거국면을 전환시켜 왔다.
그러한 선거전략이 이후 지역대립을 기반으로 지역감정을 결집시키는 데 이용돼 왔고, 지난 92년 대통령선거 당시 초원복집 사건 이래 가장 효과적인 합법적 선거전략처럼 애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니 선거구에서 난무하는 흑색비방전은 안중에도 없다.
학력이나 철새시비는 점잖은 편이고, 지역표가 급하게 되니 후보의 출신지 문제가 공방 대상이 되고, 가정사까지 도마 위에 오른다. 향응과 금품 제공은 물론 고소·고발도 난무한다. 중앙선관위의 집계에 따르면 23일 현재 적발된 선거법위반 행위는 위장전입 6건등 55건에 달한다.
이번 재·보선에는 불과 3석의 의석이 걸려 있다. 정치판을 뒤바꿀 만큼 엄청난 의석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당은 대선의 전초전처럼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 과열선거를 스스로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선거운동을 했으면 투표율이 적어도 절반은 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예상되는 투표율은 고작 30%대다.
결국 민심과 정치는 이미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혼탁해지고 선거가 과열될수록 민심은 정치 바로 그 자체를 떠나고 있다.
온갖 난장판을 일으키는 선거전략, 그리고 국민의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가로막는 혼탁 선거가 일시적인 술책이 아닌 고도의 선거전략으로 당당히 인정받는 세태야말로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뜻있는 정치분석가들의 견해다.
내년에는 한국정치를 뒤흔들 지방선거와 대선이 치러진다. 겨우 3석을 건 재·보선이 이렇다면 내년 선거가 어떻게 될지 명약관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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