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내 일부 정파의 폐쇄성과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이념에 대한 의구심과 불신은 2012년 총선 과정에서 계속해서 불거져 나왔다. 물론 이석기 의원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법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는 대다수의 눈초리를 무시하면서 저잣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반의지(general will)를 간파해낸 루소의 입법자와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러기에 그는 진보진영의 다수가 이번 사태에서도 "당신은 아니다"라고 하는데 "틀린 것은 당신들이지 나는 맞다"라고 주장했다.
우선 이석기 의원에게 묻고 싶다. 합법정당과 입법자라는 공적인 신분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상의 제약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닐 텐데 어째서 입법부에 진입했는가? 북한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계속해서 회피하면서 입법자로서의 행동반경 제약을 자초한 바 입법부 진입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결국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공안기관에게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국면의 열기를 교란시킬 수 있는 빌미를 주고만 것 아닌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지난 2일 본회의 시작 전 기자들과 만나 체포동의안에 대한 입장을 얘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통합진보당 김선동 의원, 이 의원, 오병윤·이상규 의원. ⓒ연합뉴스 |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한국의 진보진영도 최대 위기를 맞았다. 무엇보다도 진보진영 패러다임이 설득력을 잃으면서 무력해졌다. 최소한 자유민주주의가 혁명적 사회주의 실현의 수단이었다면 이젠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와 자유민주주의와 타협한 사회민주주의의 실체에 눈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것은 곧 경제적으로는 자본을, 정치적으로는 미국을 절대악으로 간주한 기존 패러다임에 더 이상 안주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20세기 중후반 미국과 가장 치열한 전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를 거둔 베트남 사회주의 지도부 역시 1980년대 중반부터 개혁-개방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적대 국가였던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외국자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북한은 베트남과는 달리 사회주의권의 지각변동에 대해 보다 더 폐쇄적이고 억압적으로 대응했다. 설사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자본과 미국을 절대악으로 간주하는 '자력갱생 모델'의 틀 안에서였다. 그리고 이러한 북한체제의 보수성과 경직성은 사회주의체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권력세습'이라는 극단적 양태로 이어졌다.
과거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동기 중 하나는 자유민주주의를 문명의 축으로 자랑하면서도 그것을 그들 영토 내에 한정시켰던 서구국가들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불신이었다. 항영(抗英) 투쟁을 경험한 버마 군부 지도자가 주도한 '버마식 사회주의' 역시 북한체제 못지않게 폐쇄적이었다. '버마식 사회주의'의 고립주의는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이간질 정책의 후유증인 종족간 불신과 대립에서 야기된 정치무질서에 대한 극단의 반작용이었다. 광주에서 무수히 많은 양민을 학살한 군부세력을 묵인한 미국을 보면서 반미자주를 절대가치로 하는 북한체제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것도 또 다른 극단의 반작용이었다.
그렇지만 중국,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폭 수정하고, 남한에서의 '일반민주주의 불가능 테제'가 무너진 지 오래된 현재의 시점에서 제3세계 사회주의 일반 형태로서의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의 폐쇄성의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어도 반미자주가 한 인간의 자기결정권과 존엄성을 구속할 수 있는 정당성까지는 용인할 수 없다. 먼 예로는 최악의 폐쇄형 사회주의 실험을 했던 캄보디아의 폴 포트 체제가, 가까운 예로는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만 리비아의 가다피 체제가 준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석기 의원과 그를 지지하는 구성원이 공적인 입법자로서의 지위와 합법적인 공당으로서의 발전을 기대한다면 북한체제에 대한 투명하고 공개적인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의 억압성을 비판했던 그 잣대를 북한체제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과 북한체제의 점진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평화전략의 유효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군사정권 시기를 넘어서 한국사회가 민주화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여전히 부족하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군사정권이나 보수정권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역시 자유민주주의의 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그렇지만 새누리당이 국정원의 대선개입 문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과연 이들이 자유민주주의 옹호세력인지 의심스럽다. 공정한 선거절차가 자유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핵심 덕목임을 모르지 않을 텐데 지난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새누리당은 국정원을 일관되게 옹호하고, 모처럼 독립적인 최고 수사기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는 검찰을 일관되게 비난했다. 이러한 점에서 과연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석기 의원을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질타할만한 입법자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자신들의 치부는 감추려고 무리수를 두면서 정치적 경쟁자의 흠결에 대해서는 눈을 부라리는 전형적인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 아닌가.
과학적 지식의 혁명적 진화와 절대지(絶對知)를 부정한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 이행 시기에 연구자들은 정신적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연구자 자신이 신뢰하고 있던 패러다임의 설명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패러다임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과거 패러다임에 집착하는 것도 정신병리 현상의 한 유형이다.
극도로 고립적이고 억압적이었던 버마식 사회주의 체제나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 모두 어떻게 보면 서구 제국주의 경험에서 비롯된 '식민주의 트라우마 증후군'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들 체제를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인권을 유린하는 이들의 억압성을 용인할 수는 없다.
'이석기 사태'는 통합진보당 내 일부 정파의 전형적인 이중 잣대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중 잣대는 국민의 동의를 얻기 힘들다. 이중 잣대는 시대착오적이고 그러기에 더 이상 진보가 아니라 보수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이석기 의원과 일부 통합진보당 구성원들은 진보진영 내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패러다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상식과 대면하기를 기대한다. 이것만이 지금의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국면에서 겉만 자유민주주의자인 것으로 드러난 입법자들의 위세를 꺾고 최소 민주주의로서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공정성을 지켜내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진보의 대장정에 동참하는 길이다. 역사의 정방향은 바로 이러한 것 아니겠는가.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