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걱정이 앞섰다. 반(半)백년 교편을 잡았다고는 하나 어느새 팔순을 넘긴 노(老) 시인에게 아무래도 대중 강연은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허나 괜한 걱정이었다. 논리는 간명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변함없는 힘이 느껴졌다.
26일 원주 토지문화관 주최 ‘토요 문학이야기’의 마지막 순서는 시단(詩壇)의 원로 김춘수 시인이 장식했다. 김 시인은 이날 ‘시의 두가지 유형’이라는 주제로 ‘시 읽기’의 방법론을 정돈된 언어로 풀어냈다.
강연을 통해 김 시인은 소위 ‘민중문학’이라고 하는 참여시 경향과 모든 가치판단을 유보한 이미지즘 계열의 시 경향을 소개했다. 그저 두 가지 흐름을 소개했을 뿐, 어느 편에도 개인적 호불호를 개입시키지 않은 짧은 강연이었으나,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온 노 시인의 탐구열만큼은 좌중에게 충분히 전달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짤막한 강연에 이은 독자들과의 대화. 김 시인이 청중들에게 얘기하고자 했던 바는 그 안에서 더욱 풍성했다. 제도의 벽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주입식 교육을 담당해야 하는 일선 교사의 고충을 함께 이해했고, 시인으로서의 삶과 현실을 사는 생활인으로서의 자기괴리를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 뒤에 던진 한마디.
“시는 지식이 아닙니다. 인생을 통해 터득해 가는 것이 시입니다.”
실로 모처럼 대중 앞에 선 김 시인의 이날 강연을 소개한다.
***시의 두가지 유형**
이런 자리는 거북해지기 쉽습니다. 어떤 내용을 어느정도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 학교를 선택해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다든가 같은 학생들이라도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는 얘기하기가 수월합니다. 내용이나 방법을 수월하게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여러 관심을 가지고 있고 여러 직종을 가진 분들이 계신 자리에서는 가늠하기가 거북해서 얘기하기가 조금 어려울 때가 있어요. 오늘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제 나름대로 짐작한 대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여러분들이 알고 왔겠습니다만 얘기할 제목은 ‘시의 두가지 유형’ 입니다. 그런 제목으로 평소 내 생각을 나름대로 가능하면 알기 쉽게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러분과 문학과 시를 좋아하는 분들이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원주까지 와서 같이 문학을 얘기하게 돼서 대단히 기쁩니다.
2천5백년 전 공자가 엮은 ‘서경’이라는 책에 ‘시는 뜻을 말한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뜻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에 해당하겠지요. 사상을 말한다는 뜻인데요, 사상과 같은 현학적인 말을 피하고 하면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메시지에 해당합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남에게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말합니다. 시도 메시지 전달을 하는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말이 벌써 2천5백년 전 공자가 엮었다고 하는 서경에 나와있다고 합니다. 나는 서경을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일은 있습니다.
이것은 2천5백년 전의 중국에서만 시를 대한 방식이 아니고 서양사람들도 오래전부터 시를 그렇게 대해왔던 것 같아요. 시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써 내려온 시를 보면, 생각을 토로하고 있거나 철학이나 사상을 진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학교에서도 시를 얘기할 때는 어떤 구절을 떼 가지고 이 구절은 어떤 내용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선생이 묻기도 하고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시라고 하면 으레 그런 것으로 서양에서도 생각해 왔고 그렇게 써 온 것 같습니다. 지금도 물론 시를 그렇게 보고 있는 경향이 많이 있죠. 그것이 시의 한 경향이고 유형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간 얘기를 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뜻을 얘기하고 남에게 알릴 적에는 그 속에 은연중에 강요하려는 의지가 깃들여있습니다. 내 생각을 남에게 알림으로서 내 생각에 대해서 공감을 얻고 싶다, 남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싶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생각을 강요하고 동의를 강요하는 뜻이 메시지 전달 속에 은연중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지라고 할 수 없어요. 전달할 때에는 전달하는 내용에 대해서 남의 공감을 얻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얘기를 한다면 남의 생각을 강요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남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남의 생각과 자유를 구속하고 내 생각 쪽으로 남의 생각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학의 유파, 한 경향에 빗대어 얘기한다면 우리식으로는 20년대-30년대의 카프라는 유파와 비슷합니다. 카프는 단체의 약칭인데, 우리말로는 무산계급을 위한 문학 동맹으로 옮겨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20년대 일본에서 생긴 문학단체인 나프 즉, 일본의 무산계급을 위한 문학동맹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그 문학의 경향은 무산계급의 혁명에 도움이 되는 문학을 한다는 것이었죠. 나프나 카프 모두 문학적 입지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니까 혁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시로 쓰는 겁니다. 그것의 공감을 얻으려고 했죠. 심지어 이 사람들은 극단적으로는 ‘문학은 선전이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알리고 공감을 얻는 것이라는 말이죠. 문학은 그렇게 돼도 좋다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돼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더라도 최근의 문학 중에는 70년대, 80년대, 혹은 군사정권 시절의 민중문학의 성향들이 유행한 일이 있습니다. 민중문학의 이름으로 유행한 것이 대체로 이런 경향입니다.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자기사상을 남에게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그래서 남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남의 자유를 구속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성질의 문학이 있습니다. 좋은 경우에는 유익하고 훌륭한 사상을 남에게 알린다는 면에서 좋은 일입니다. 인간에게 도움이되는 사상, 생활에 보탬이 되는 사상 말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뒤로 미루더라도 그런 유형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2천5백년 전 서경에 그런 말이 나온다 하니 서경이 나오기 이전부터 그랬다는 말입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학의 한 경향입니다.
***“현대, ‘회의의 시대’에 나타난 시 경향**
여기에 대비해서 극히 최근에 생긴 문학, 시가 있습니다. 정 반대되는 경향입니다. 이 경향은 그 이전에도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극히 드문 예였고 자각적으로 이런 경향이 생긴 것은 현대에 와서입니다. 20세기, 극히 최근에 일어난 경향의 시입니다. 시에서 생각을 배제하고 메시지를 없애는 경향입니다.
내가 무엇을 말한다는 뜻과 철학, 사상, 메시지를 없앤다는 얘기입니다. 자각적으로 생긴 것은 서양 쪽에서였습니다. 서양에서는 20세기 초기에 이런 경향의 문학을 스스로 이름붙여 이미지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로는 사상파라고 하겠죠.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옮긴다는 뜻입니다. 사물의 모양을 좋다 나쁘다, 아름답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코멘트를 말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는 뜻입니다. 현학적인 말을 쓰면 리얼리스틱하다고 볼 수 있죠. 극도의 리얼리즘입니다. 사실을 그대로 옮기는 극도의 리얼리즘입니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가치판단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풀어주고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판단 중지’라는 말을 씁니다. 대단히 회의적이죠. 사물을 회의하고 성급하게 판단 내리지 않습니다.
훗설이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정신현상학이라는 철학하는 방법론을 말했습니다. 훗설의 현상학이라는 철학에서 이런 태도를 취했습니다. 모든 것을 일단 판단하지 말아라 하는 판단 중지상태에 두라고 말이죠. 모든 것을 괄호안에 넣고 예쁘다, 추하다, 아름답다 하는 판단을 보류하라는 얘기입니다. 메시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물의 모양을 자기가 본 각도대로, 자기 개성에 비친대로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문학으로서 이미지즘을 얘기했는데, 이미지즘 계통으로 문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사람들이 반드시 훗설의 현상학을 염두에 두거나 의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을 하자니 그렇다는 말이죠.
이 계통에 속하는 시인들은 30년대 이후의 현대시에 들어선 이후, 세계적인 경향으로서의 모더니즘 경향 이후에 우리 시단에도 나타나게 됐습니다. 가장 처음 이런 경향을 쓴 사람들 중에서 지금까지 있어서도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시를 쓴 사람이라면 역시 정지용을 들 수 있습니다. 이미지즘으로 볼 수 있죠 이 사람도.
또 전형적인 한 사람이자 그 사람 시 중에서 전형적인 시라고 하면 박목월의 불국사라는 시가 있습니다. 불국사라는 시는 모두 명사로 이어져있습니다. 설명어가 하나도 없습니다. 설명어를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용어라고 합니다만 동사나 부사, 형용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동사나 형용사는 판단입니다. 이를테면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아름답다고 하는 판단인데 그런 것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불국사라는 시는 그렇게 돼 있어요. 명사로 끝나지요. 판단이 없습니다. 그냥 제시만 하고 있습니다. 구름, 안개, 바람… 이런 식입니다. 바람이 분다든가 산이 아름답다던가 하는 말이 일체 없어요. 한때 우리 청년시절, 그러니까 30년대, 내가 학생 때 유행했던 것 중의 하나가 시네포엠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풀어말하자면 시네마 포엠이라는 것인데 영화 시나리오 쓰듯이 시를 쓴다는 것입니다. 시나리오라는 것은 촬영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아닙니까. 시나리오는 설명이라기보다는 제시뿐입니다. 카메라가 찍는 것이니까 거기에 맡기는 것이고 감독이 자기의 콘티로서 조절을 하는 것이죠. 미리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하는 말이 없어요. 장면 제시에 그칠 뿐입니다. 이미지즘 시와 비슷해서 시네포엠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그것이 없어졌습니다만 이미지즘이라는 시가 극단적으로 가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좋다 안좋다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자유롭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향의 시가 나타난 것은 현대가 회의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훗설의 시대, 현상학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판단을 잘하는 사람을 대단히 지적이라고 말하지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지적이지 않은 사람이 가장 빨리 판단해버립니다. 쉽고 단순하게 생각해버리니까 판단이 빨리나오는 겁니다. 조금 사태를 복잡하게, 조금 더 예리하고 섬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쉽게 판단을 못합니다. 사물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책 한번 읽으면 세상을 다 알아버린 것처럼 행동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좋다 안좋다, 나쁘다 그르다하는 흑백논리로 금방 판단을 해버립니다. 세상에 절대라고 하는 것은 그리 쉽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적인 사람일수록 회의적입니다. 철학은 의심하고 회의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쉽게 판단하는 사람은 철학이 대단히 빈곤한 사람입니다. 철학 능력이 풍부한 사람은 쉽게 판단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햄릿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옛날부터 지성인을 햄릿형으로 불렀습니다. 반대는 동키호테형이겠죠. 그러니까 이런 경향의 시는 햄릿형의 시죠. 제가볼 때 이런 경향은 매우 현대적입니다.
20세기에 여러가지를 겪어오는 동안에도 쉽게 판단이 난 것은 없습니다. 세상이 참 어렵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죠. 뭐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 나타난 문학이 그런 경향입니다. 얼핏보면 단순하고 아무런 철학도 없는 것 같죠. 사물의 껍데기만 나타내고 감각 세계만 나타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천천히 뜯어보면 지금 말씀드린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각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유행에 따라서 하는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자각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지적인 사람들입니다. 서양에서도 대단히 지적인 사람들은 대개 이미지즘에서 출발합니다. T.S. 엘리엇이 그렇습니다. 20세기 초에 그런 경향으로부터 시를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판단을 하고 있는 시중에서도 아주 복잡하고 심각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시들이 분명히 있고 두 경향을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의 시를 찬동하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해서 오늘 자리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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