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려스럽게도 균형이 없어져가는 과정입니다. 역사는 발전한 것 같지만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의 댓가가 큰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새해 첫날 프레시안과 가진 인터뷰에서 소설가 박경리씨는 세상과는 담쌓은 듯 자신을 '구멍지기'라고 했다. 아무 연고도 없던 원주에 터를 잡고 20년 넘게 바깥출입을 꺼려온 촌로의 모습다운 표현이었다.
그러나 "생명 가꾸는 일이 일상"이라는 노작가의 겸손이었는지, '삶과 문학'을 주제로 모처럼 대중 앞에 나선 그는 '구멍 밖 세상'의 발전과 속도에 가만히 제동을 걸었다.
27일 강원도 원주 소재 토지문화관에서 열린 문학강좌 '토요일의 문학 이야기' 첫날. 박 작가는 '균형에 대하여'라는 소주제를 통해 문학과 예술은 물론 생명의 존재방식인 상생의 원리를 담담히 풀어냈다.
1백여석 남짓 준비된 강연장에는 강연시작 1시간 전부터 많은 청중이 자리를 메워 주최측이 추가로 마련한 보조의자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아이를 품에 안은 주부에서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노부부, 춘천과 충주 등 인근 도시에서 온 직장인과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취재를 위한 각 언론의 부산함을 제외하면 이날 강연은 '소박한 성황'이었다.
강연이 끝난 후 '예술과 생존의 관계',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균형잡힌 정책에 대한 작가의 견해', '원주에 정착한 동기' 등 자유로운 서면질문이 청중들로부터 쏟아져 나왔으며 박 작가는 세심하게 각 질문에 대답했다.
또한 건강이 나빠진 탓인지 박 작가는 강연 도중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잔기침이 심했으나 강연 후 청중들의 사인 공세에는 환한 얼굴로 응해주었다.
***'모순과 균형의 질서'**
이날 강연에서는 '창조에 대한 상상과 자유로움,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생명에 대한 정열적인 추구'를 그리워하는 박 작가의 식지 않는 열정이 차분한 목소리 속에서도 엿보였다.
"모든 우주적인 존재구조 자체가 모순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모순을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박 작가가 보기에 '균형'은 원심력과 구심력, 탄생과 죽음처럼 '모순'되는 가치 속에서 존재한다. 생명 또한 그러하다. 예술과 문학은 인간과 생명에 대한 전체적인 탐구를 통해 균형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두개를 용납 못하는 서양적 가치는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거쳐오며 인간은 '생명의 숭고함'을 상실했다는 게 박 작가의 지적이다.
그러하기에 '엽기'로 대변되는 젊은 작가들의 비상식이 작가는 개탄스럽다. '능동적인 힘'으로 균형을 추구하는 창조의 본질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엽기적이라는 것은 작품 속에서 어떤 유니크한 부분은 돼요. 그러나 인생이라는 큰 부분에서는 한쪽 귀퉁이의 어떤 부분입니다. 오히려 엽기적인 것이 없으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없어도 인간의 삶은 존재하거든요.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그것은 어떤 기호입니다. 반면 쌀이나 식량이 없으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커피같은 잉여적인 것을 마치 삶의 본질인 양 여기저기서 부산하게 다루는 것을 보면 정말로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어요."
'인간성의 상실', '규명될 수 없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력'을 상실한 우리 시대 '무한경쟁' 논리 역시 박 작가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서구적인 발상입니다. 무한경쟁은 궁극적으로 얘기하자면 하나가 남자는 얘기입니다. 하나가 남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종(種)이 없어집니다. 적어도 둘이라야 종이 생깁니다. 그런데 거침없이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이날 강연에서 박 작가는 과학적인 규명과는 별개로 인간과 생명의 존재 원리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을 그리워하며 "누가 만들어냈는지 모르지만 모순과 균형의 질서를 배워나가야 한다"고 나직이 강조했다.
50여분간 진행된 박 작가의 이날 강연을 싣는다.
***'균형에 대하여'**
더운데 이렇게 많이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강의를 제대로 하려고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아서 밖의 일도 안 하고 쉬고 오늘 나왔습니다.
'균형의 대하여'라는 제목을 여러분들이 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문학과 균형이 어떤 관계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요즘 세태를 볼 것 같으면 명확하고 확실한 어떤 진실에 대해서 거의 망각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떤 전체에 대한 망각이지요. 역사적으로 샤머니즘시대는 과학적인 규명은 없었지만 생명에 대한 상상과 자유로움과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인간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생명에 대한 아주 정열적인 추구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 당시에는 어떻게 영혼과의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접신을 간절히 바랬습니다. 또 어떤 생명을 막론하고 생명의 위대함에 대한 숭배가 있었습니다. 천년, 오백년 된 나무에 대해 목신제를 지낸다던가, 나무에 절을 하는 풍습은 아직도 시골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오백년, 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경험하고 누릴수 있었다는 나무가 지닌 생명에 대한 숭배이고 그와 교신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인간은 백년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나무가 그렇게 누렸다면 거기에는 어떤 우리에게 가르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에는 능동성이 있습니다. 나무에도 능동성이 있으니까 자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생명은 풀잎이든, 하루살이라고 하더라도 능동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능동적인 힘으로 볼 때는 모든 생명은 동일하고 공평한 것입니다. 다만 오래 살았다면 어떤 지혜로움이 있을까 하는 숭배감이 나무에 대한 숭배로 변하는 것이지요.
그 다음 세대, 불교시대에 와서는 한 생명이 어째서 존재하며 그 생명의 위대함은 어떤 것이며, 또 영원함에 대한 추구의 방식 등으로서 어떤 면에서 틀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생명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유교시대에 와서는 이것이 아주 크게 축소가 돼서 인간의 기본,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 등 인간에 대한 것으로 아주 축소됐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그 자리가 아주 좁아졌습니다. 인간이라는 공동체적인 것마저 전혀 없어지고, 그것이 자유라고 오인이 되고 있어요. 오늘날은 모든 것이 자유같지만 사실 자유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 기계화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자리는 너무나 좁아져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역사적으로 긴 세월동안 추구한 자유인가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오히려 옛날 군주시대보다 더한 감시와 압박속에 한 순간도 조직이라는 것에서 도망갈 구멍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진정한 자유로 볼 수가 없지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극도로 분업화된 것입니다. 한 인간의 인격이라는 것이 없고 하나의 기계부품처럼 분업화 됐습니다. 사람들의 사고도, 직업도 전체를 볼 수가 없어요. 한 부분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인간성이 필연적으로 상실돼가는 것이고 우주라든지 모르는 것, 도저히 규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력이 없어요. 다만 자기앞에 주어진 조그만 세계에 얽매여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이것이 창조력에 어떻게 기여하고 어떤 결과로 나타나겠습니까. 이걸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순은 인간 근본에 대한 열렬한 열망"**
균형을 말하기에 앞서 모순이라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균형과 모순은 상당히 상통된 것도 있고 자리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의 사조나 모든 것이 들어와 있어서 모순에 대해서 대단히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동양은 모순을 인식함과 동시에 받아들이는데 서양에서는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모순이라는 것은 반드시 두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생각에서는 두개는 용납이 안됩니다. 어쨌든 모순을 극복하려 합니다.
모순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 이것이 모순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영원히 두개가 있다는 뜻입니다. 모순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지구를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있습니다. 원심력은 밖으로 잡아끌고 구심력은 안으로 잡아들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원심력이 더하다면 지구는 터집니다. 구심력이 더하다면 우주의 온갖 잡동사니가 붙을 것입니다. 그러면 두가지 경우 모두 지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지구가 떠있는 것입니다.
바로 모순이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인간과 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났는데 왜 죽느냐. 그것이 모순입니다. 태어남과 죽는다는 것은 원심력과 구심력 같이 정 반대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없다면 삶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삶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모순이라는 것을 서양처럼 규명하고 없애고 그럴 성질이 아닙니다. 명확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모순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알 수 없는, 통속적으로는 운명적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고 하고 모르면 생략해 버립니다. 사사오입해버립니다.
적어도 생명이 존중된 시대에는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샤머니즘 시대에는 저승과 대화할 수 없을까, 다른 세계 즉 저승에는 죽은 우리의 형제나 친구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은 미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열렬한 열망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미신이 아니라 열망입니다.
오늘날 과학적으로 볼 때는 과학도 생명의 신비를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옛날에는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추구하는 열망은 다른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모순은 모든 우주적인 존재 구조 자체가 모순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 모순을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은 과학만능주의가 돼서 그런 것을 한칼에 잘라버립니다. 모른다는 것, 알 수 없다는 것, 좀 미화하자면 신비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과학적으로 규명되지 않는 이상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오류입니다. 현대인들은 조그마한 틀 속에서 눈에 보이는 숫자적인 것, 통계적인 것, 분석되는 것만을 인정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아는 것이 동해 모래알만하다면 모르는 것은 우주적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래알만한 지식이 인생의 전부라면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예술은 균형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
모순이라는 얘기가 균형과 약간 흡사한 데가 있습니다. 모순은 인위적인 것이라기보다도 알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의 차원에서 볼 수 있고 균형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순도 균형에 의해서 이루어졌겠지만 균형을 수학적이거나 물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돌이 산에서 굴러내려오는 것은 균형을 찾지 못해서 구르는 것입니다. 어느 자리에 와서 균형을 잡았을 때 돌이 멈춥니다. 이것이 균형입니다.
인간의 능동적인 능력에 의해서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모든 예술이나 창조되는 것도 균형에 의해서 창조되고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균형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어요. 문학에 있어서도 요즘 작가들이 쓴 작품 보면 이 세태를 그냥 따라가고 있어요.
백년이나 70~80년 전에는 어떤 실험소설이라고 해서 그런 방향을 했지만 이것이 문학의 본질은 아니거든요. 특히 한심스러운 것은 이 본질적인 문제에서 얼마나 문학이 벗어나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요즘 '엽기'라는 문제를 어디서 취급도 하고 그런다던데, 그것을 보면서 제가 한심스럽다고 했어요. 엽기적이라는 것은 작품 속에서 어떤 유니크한 부분은 돼요. 그러나 인생이라는 큰 부분에서는 한쪽 귀퉁이의 어떤 부분입니다. 오히려 엽기적인 것이 없으면 좋을 수도 있습니다. 없어도 인간의 삶은 존재하거든요.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그것은 어떤 기호입니다. 반면 쌀이나 식량이 없으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커피같은 잉여적인 것을 마치 삶의 본질인 양 여기저기서 부산하게 다루는 것을 보면 정말로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어요.
엽기적이라는 것의 연유는 일본에 있는 것입니다. 엽기적인 것은 그로테스크 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로테스크 또는 에로티즘, 이 두가지가 항상 붙어다닙니다. 그로테스크 하다는 것은 피를 얘기하는 겁니다. 일본의 군국주의, 칼바람에는 에로티즘이 붙게 돼 있어요. 그 많은 사람이 살상이 돼면 그만큼 인간이 생산이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칼바람과 에로티즘과는 삶의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넌센스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1928년 무렵, 일본 언론에서 유행한 말이 '에로=넌센스' 였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 와서 어떤 잡지에서는 '엽기' 특집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항상 하는 얘기가 '예술이란 이차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존하는 것, 존재하는 것이 첫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환경문제에 열을 올리는 것은 모든 부분이 생존과 관계 없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든, 법률, 의학이든 모든 것이. 문학이라는 것은 인생의 추상적이지만 전반적인 전체를 다루는 것이고, 의학은 어떤 부분을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 전체가 의학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학은 의학도 아니고 법률도 아닙니다. 인생의 재현입니다. 인간 전체를 다루어야 합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하는 얘기가 '엉성해도 전체를 파악한 뒤에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짓말이 됩니다. 정확하고 정교하다고 해서 참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꿈입니다. 전체적인 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 삶이나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없고 해석될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균형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면 선 하나를 그어도 그것이 균형이 맞는 선을 그리면 살아있는 선이 됩니다. 그것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문학도 그 소재가 무엇이든간에 균형이 잡히면 어떤 소재이든 설득력과 진실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해도 전체를 망각한 부분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창조는 균형을 거치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림이나 조각이나 영화 이런 예술을 볼 때 우리는 일일이 '저게 균형인가'하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을 때는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날은 균형이 깨진 시대"***
오늘 저는 반드시 균형을 문학과 결부시켜서 얘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인생 자체에 대한 균형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균형은 어떤 사물에도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체적으로 볼 때 예전에는 못 먹어서 영양결핍에 걸려서 죽는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어릴 때도 부황이 걸렸다든가 해서요. 오늘날에는 성인병이 그렇답니다. 옛날에는 못먹어서 그랬는데 오늘날에는 영양과다에서 옵니다. 균형을 못잡아서 그런 것입니다. 과다하지도 결핍도 없는 그 중심에 생명이 존재합니다.
우스운 얘기로 세상을 살다 보면 시험에 패스를 하거나 부유한 사람들은 몸이 뒤로 나자빠집니다. 그러나 어렵고 남의 덕을 봐야 하는 사람들은 항상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지요. 하나는 비굴하고 하나는 교만합니다.
상당히 힘을 가졌던 사람이 어느날 졸지에 힘을 잃었을 때, 앞으로 넘어졌을 때, 반동이 큽니다. 뒤로 나자빠졌기 때문에 앞으로 넘어지는 겁니다. 만일 그 사람이 똑바로 서있었으면 조금 흔들리다가 그 자리로 되돌아옵니다. 가난했던 사람이 어느날 우연히 힘이 굴러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균형이라는 게 무슨 실제 물체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인격에도 나타납니다. 우리가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존재하게 하는 겁니다. 창조라는 것은 처음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균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의 육체, 인격, 정신적 현상이 모두 해당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우려스럽게도 균형이 없어져가는 과정입니다. 지구 자체가 균형이 깨졌어요. 인간의 역사를 보면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끝없는 혁명을 되풀이해왔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성공을 못했습니다. 어느 시기가 지나면 또 새로운 것이 등장합니다. 역사는 발전한 것 같지만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소품들은 발전을 했습니다. 발전을 한 것이 댓가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의 댓가가 큰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요즘 제가 생각한 것은 역사상의 위대한 혁명가, 사상가들에 대해서 어떤 경멸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네들은 인간이라는 집단을 위해서 혁명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요. 평등이라는 것은 생명의 평등으로 넓혀지지 않으면 지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양식이나 능동성의 문제에서 풀잎이나 하루살이나 세계는 똑같습니다. 다 능동적입니다. 사람이 어느 코부분, 입부분으로만 얘기가 안되듯이 하루살이도 어느 한 부분으로 생명이 구성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한주먹의 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상론이라고 반박을 합니다. 약육강식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복잡한 문제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지식인들의 생략법입니다. 생명은 당연한 것인데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소위 생태계지요. 우리가 쉽게 말하자면 땅이라는 생명의 잔해를 먹고 식물들도 삽니다.
경제제일주의를 떠들지만 극단적으로 땅이 다 죽어서 생산해 낼 수 없을 때 여러분들이 벌어들인 화폐와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한주먹의 쌀이 우리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완전히 균형이 깨지고 있습니다.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서구적인 발상입니다. 무한경쟁은 궁극적으로 얘기하자면 하나가 남자는 얘기입니다. 하나가 남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종(種)이 없어집니다. 적어도 둘이라야 종이 생깁니다. 그런데 거침없이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서구에서는 모순을 깨려고 합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모순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현실이 아직은 염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만, 백년, 오십년은 무서운 세월입니다. 얼마나 지구가 파괴되고 얼마나 많은 종들이 없어지고 했습니까. 그래서 과거의 혁명가들이 경멸스럽다고 한 것입니다. 생명의 평등을 위한 혁명이, 사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인간도 생명의 일종으로서, 생명이 평등하지 않은 이상 인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인간을 위해서 환경운동을 하는 분들은 실패합니다. 인간을 위해서 환경운동을 하고 종을 살리고 방법을 강구하면 한계점에 달합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생명이 평등해야 합니다. 생명이 생명을 먹고 산다는 것은 순환이고 균형이 필요합니다. 생존할 만큼 먹는 것. 인간이 생존할 만큼 먹는다면 질서가 유지됩니다. 인간도 자연의 질서를 세워야 합니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운명같다고 말한 것이 모순입니다. 부조리합니다만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삶을 인식할 수 없어요. 말하자면 밤이 있기 때문에 낮을 인식하는 겁니다. 누가 존재하기 위한 모순이라는 질서를 만들어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배워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실정을 보세요. 정치계나 교육계나 모든 분야에서 완전히 균형이 파괴돼 있습니다. 어떤 가치와 존재에 의해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시적으로 욕망이 얼마나 존재를 파괴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욕망과 다릅니다. 뭐든 내맘대로 하는 욕망은 자유와 다릅니다.
내마음 대로 하기 위한 욕망을 얻기 위해서 역사가 투쟁을 한 것은 아니거든요. 생존을 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남에게 내 정신을 침해받지 않기 위한 자유입니다. 욕망 때문에 남을 죽이고 자기 욕망을 채우는 자유라면 역사상 자유를 위한 투쟁의 이유가 없습니다.
강의를 위해서 노트를 준비하지 않는 버릇이 있고 제가 건강도 좋지 않아서 두서가 없었지만 오늘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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