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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규선이, 대우를 도와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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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DJ "규선이, 대우를 도와주게"

<자료> '최규선 제2 녹취록' 전문 긴급입수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대표가 7일 언론을 통해 공개한 '제2차 녹취록'이 일파만파의 거대한 파장을 몰고오고 있다.

최씨는 검찰 출두(4월14일) 이틀전 자신의 선산이 있는 전남 영암으로 가는 차안에서 80분간에 걸쳐 혼자서 이 내용을 3개의 테이프에 나눠 녹음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여기서 해외밀항을 주문한 청와대 비서진의 압박 내용을 비롯해 김홍걸씨에게 3억원을 수표로 건넨 사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간의 정치자금 수수 및 이에 따른 반대급부 의혹, 김대통령 3남 김홍걸씨와 장남 김홍일씨 세력간의 암투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비사를 공개,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뉴스위크 한국판은 최규선씨가 검찰출두 이틀 전에 녹음한 3개의 테이프 외에 최씨가 자서전용으로 작성한 6개의 테이프를 입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뉴스위크는 1차로 검찰출두 직전 녹음한 3개의 테이프 내용을 공개했다.

뉴스위크는 녹취록 전문을 보도하면서 '녹음내용은 검찰 수사가 옥죄어오는 상황에서 이뤄진 최씨의 일방적 주장인만큼 과장됐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뉴스위크의 양해를 얻어 이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뉴스위크 한국어판 '최규선 녹취록' 전문**

오늘 4월 14일, 일요일 아침에도 김현섭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통화를 했다. 그도 걱정을 많이 했다.

"최규선씨 소환을 오늘쯤 해야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검찰 관계자가 묻던데, 검찰도 달리 나온 게 없어 곤혹스러운 것 같습디다. 그런데 제일 문제가 LA의 그 사람(김홍걸씨)에 관한 부분을 최규선씨가 어떻게 진술하느냐를 두고 검찰뿐 아니라 청와대, 그리고 모두가 떨고 있습니다."

김현섭씨의 말에 나는 "1백만원짜리 수표 3백장을 건넸는데 ,그건 수표였기 때문에 추적을 피하기 위해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소환을 좀 늦춰주십시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김현섭씨는 "아무튼 박사님, 나라를 살려주십시오. 나라를 살리셔야 됩니다. 박사님이 세우신 우리 국민의 정부 아닙니까" 하면서 나를 달랬다.

내 017-98**-70**의 전화 내역을 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김현섭 비서관의 핸드폰 번호는 017-7**-71**인데, 지금까지 수차례 통화를 했고, 오늘 오전 10시 쯤에는 내 비서였던 박모(여)씨의 이름으로 개설한 미래도시환경의 핸드폰 (011-97**-70**)으로 통화를 했습니다.

또 그제(4월 12일)부터 이만영 정무기획비서관과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최성규, 또 2명의 국정원 직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여러 차례 가졌다고, 최성규씨가 나에게 말해왔습니다. "내용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보자, "출국금지가 되기 전에 최규선이가 떠나버렸어야 했는데, 출국금지가 돼서 가지도 못하고, 또 검찰에 출두하면 최규선의 말 한마디에 우리 정권이 잘못되고 대통령이 하야해야 하는데 걱정이다라고 얘기하자 거기서 한 인사가(최성규씨가 누군지 이름은 말 안 했습니다) 부산에서 밀항시켜 가지고 밖으로 보내면 어떻겠느냐는 말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제가 "나는 밀항은 않습니다. 밀항하게 되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밀항하면 미국은 갈 수 있는 겁니까?" 하고 묻자, "미국은 갈 수 있다. 일단 가버리자. 네가 정 혼자 나가기 그러면 내가 널 데리고 나가주마"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오죽하면 이렇게 말할까, 나는 날 생각해서 말한 줄 알았더니 어제(최규선씨 측근들의 심야대책회의가 있던 날)는 최성규씨가(그 분은 나와 친분이 두터운 분입니다) 괴로운 눈빛을 짓더니만(정권이 날 설득하려고 그 사람을 내세운 것 같아요), 이제는 최성규씨의 부인까지 나서서 "꼭 내 남편이랑 같이 떠나달라. 2, 3년이면 된다. 꼭 같이 떠나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내가 광주에 저녁 8시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최성규씨가 김포로 가는 도중에 전화를 했습니다. "옆에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공항에 도착해서 사람이 없을 때 꼭 전화를 주라"고 했습니다.

공항에 내려 전화를 해보니 "다 준비가 돼 있다. 규선아, 떠나버리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랬습니다. "아니, 내가 죄가 없고 혐의가 없는데 왜 자꾸 이러십니까"라고 하자, 그는 "아니다. 네가 들어가면 나라가 뒤집어진다. 지금은 안 된다. 검찰도 지금 시간을 벌고 있는 거다. 지금 청와대도 난리고 나 역시도 괴로워서 못 살겠다. 나는 짐을 싸갖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 대화 내용은 어제 4월 13일 토요일 오후 6시 반에서 7시 사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행기 좌석이 없어서 내가 일찍 공항에 도착했으니까요.

그는 끈질기게 밀항을 권유했는데 나는 "왜 그럴 필요가 있느냐,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건 내가 너무나 피곤해서였고 또 그가 왜 이렇게 밀항을 권유하는지를, 그 배경을 제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주로 가는 한 시간의 비행에서 저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들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 이 사건 무마의 첩경으로 알았던 겁니다. 그게 솔루션(solution, 해결책)으로 알았던 겁니다. 그러면 밀항하면 내가 없어지느냐, 그게 아닙니다. 아, '그렇다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나는 지금 위태로움을 느껴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016-6**-20**이 최성규씨의 핸드폰입니다. 통화내역을 보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형님이신 이창현 형이 지켜본 증인입니다. 증인으로 나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어제도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뵙고 식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북받치는 감정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가족들과 선산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몸이 극도로 피곤하고, 수족 떨림도 심하고, 가슴도 답답함을 느껴 아무래도 병원에서 하루 정도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광주 한국병원에 어렵사리 병실을 구해 응급실을 거쳐 입원했습니다. 그 와중에 저한테 연락이 안 되자 최성규씨는 이창현 형에게 밤늦게까지 수차례 전화를 하면서 "내가 광주로 내려가겠다. 꼭 좀 규선이 보게 해주라"고 애걸복걸한 것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계속해서 밀항을 권유하는 것도 나는 이러한 각본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98 년 9월 9일 사직동팀에 이어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수사를 받을 때, 당시 제 1반 반장으로(그들은 1반 실장으로 부르죠) 최성규 현 특수수사과장이 있었는데요, 그 때 날 직접 조사했던 장본인이 최성규씨이고 김수철 수사관입니다. 그 인연으로, 그때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후로 "널 골인시키라고 위에서 지시가 떨어졌는데도(골인은 구속을 의미한답니다) 제발로 걸어나간 놈은 15년 특수수사를 하면서 내 생애에 너 하나뿐이다. 너 같은 놈은 내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사과에서 나오면서 김수철 수사관은 날 자기 차에 태워주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김수철 수사관과는 몇차례 만나 술도 몇잔 했습니다. 최성규씨는 이무영 경찰청장 시절에 전남도경 수사과장을 거쳐서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저와 만나는 횟수도 빈번하고 자주 어울렸습니다.

최성규씨에겐 김홍일 의원이 후견인입니다. (김 의원의) 국회 보좌관이었던 이만영 비서관과는 아주 막역한 사이입니다. 그래서 이만영 비서관은 권력핵심의 돌아가는 내용도 다른 수석 비서관들보다 잘 파악할 수 있고, 상대하는 사람들 또한 일반 비서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최성규씨는 지난 3, 4일 전부터, 아니 그 전부터 수차례 회합을 가졌다고 저한테 말해줬고, 마침내 내린 결론이 '밀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밀항을 하더라도 최규선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저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은 이 녹음에 남기지 않고… 이런 정황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고 봅니다.

해서 저는 살렵니다. 살고 나는 떳떳하고 또 김홍걸 부분도 내가 줬던 건 줬고, 빌려준 건 빌려주고, 갚아준 건 갚아줬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그 아들인 김홍걸로부터 뭐 하나 덕본 게 없습니다. 이권의 혜택? 아닙니다. 내가 김홍걸에게 돈을 줬던 것도 내가 정당하게 번 돈이었지만 보험들려고 줬던 돈입니다. 워낙 저는 이 정권에 피해망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김홍걸에게 돈을 줬던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이 정권 탄생에 기여를 했습니다. 대통령도 97년 12월 20일 당선 직후에 저를 불러서, "창고가 비었네. 자네하고 나하고 나라를 살리세. 자넨 그런 재주가 있고 능력이 있네. 내가 사람 볼 줄 아는데 자넨 정치적으로 대성할 것이네"라고 말했습니다[그는 인수위 시절 이강래(민주당 의원), 장성민(민주당 전 의원), 고재방(교육부 차관보), 박금옥(청와대 총무비서관) 등과 함께 '비서 5인방'에 꼽혔다].

그 말 한마디에 저는 그야말로 옛날에 유명했던 만화 주인공인 뽀빠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온힘을 다해 대통령 당선을 위해 노력을 했고, 그 후 IMF 극복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극복 열정을 읽었으며 그가 나에게 이러한 말할 수 없는 찬사를, 격려를, 힘을 불어 넣어준 것에 대해 나는 DJ를 존경을 넘어 신처럼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50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대통령이 당선 하루만에 나를 불러서 그런 말을 해준 것에 대해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온힘을 다해서 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를 그해 12월 23일 서울로 데리고 오게 됩니다.

저는 그 사실을 당선자에게 보고하러 갔습니다. 그때 유럽 출장 중이던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알 왈리드 왕자가 오면 꼭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것까지 보고를 했더니 당선자는 저를 삼청동 안가(당시 당선자는 일산의 사저가 멀어서 삼청동의 안가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의 안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는 이미 청와대였습니다. 인수위원회 시절에 DJ는 이미 정권교체기의 당선자가 아니라 국가원수였습니다.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큰 거실이 있고, 왼쪽에 큰 식당이 있었습니다. 오른쪽으로 쭉 들어가면 오른쪽이 안방, 왼쪽이 서재였습니다. 현관은 계단을 타고 올라갑니다. 오른편 계단으로 올라가면 정원이 있고, 왼쪽은 현관이 있습니다. 현관을 지나 마루로 가면 이재만 수행비서, 김정기 현 대통령 수행부장, 김종성 운송부장(현 대통령 차량 운전사)이 있었습니다. 현 대통령 3급비서인 장옥추(광주 출신이며 동신전문대를 졸업한 경찰관의 딸로, 경희대 지질학과에 편입해서 지난해에 졸업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씨의 안내로 안방에 들어섰습니다.

"규선이, 대우를 도와주게.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큰 힘을 발휘했네. 그리고 김우중씨 같은 사람 없네."

"그렇잖아도 저한테 직접 전화까지 했습니다."

"그래.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야. 그 사람을 돕게. 그리고 차기 전경련 회장이 될 것이네. 나, 도움을 많이 받았네. 그리고 이 회사 저 회사 만나게 하지 마. 그냥 대우만 만나서 투자유치를 시키게."

"알겠습니다."

저는 당선자의 그 말을 듣고 "아, 대우를 밀어야겠구나"라고 생각했고 당시 환율이 1천8백원일 때 알 왈리드가 1억5천만달러를 투자해 대우로 봐서는 어마어마한 쾌거를 올린 것입니다. 1달러가 아쉽고, 국가부도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런 큰 액수는 국가로 봐서도 엄청난 것이었지만 (주)대우로 봐서도 엄청난 쾌거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많은 건실하고 잘 나가는 회사를 놔두고 왜 하필 대우일까? 사람들은 의아하고 궁금했을 겁니다. 이러한 뒷이야기를 저는 역사에 남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후 현대도 대통령 당선자가 찍어줬습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에 5천만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노력을 할 당시에 정동영씨도, 한화갑씨도 저를 불러서 저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화갑씨는 당시에 대림의 전무를, 정동영씨는 컨설턴트(외국 금융사와 접촉해 투자를 받아내고 컨설팅 커미션을 받는 사람들)를 만나보라고 해 그렇게 했습니다. 액수가 이렇게 클진대 합법적인 피(fee, 대가)만 해도 당시 한화로 계산하면 3백억~4백억원에 이르는, 그야말로 평생을 두고 만져볼 수 없는 거금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노력을 하면서도 대통령이 저에게 해준 격려의 말씀, 또 공직을 통해 크고 싶어서 돈에 얽매여서는 안되겠다 싶어 김우중씨가 건넸던 7억원도 거절했고, 현대로부터도 한푼의 돈도 받지 않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알 왈리드를 비롯한 투자자로부터도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록을 위해 남기자면, 알 왈리드는 내 생일날 도합 50만달러를 두번에 걸쳐 보내줬습니다. 30만달러는 한국으로 직접 보냈는데 유종근 지사를 통해 알게 된 권아무개씨(이 사람도 컨설턴트입니다)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사람이 한화로 바꿔주었고, 20만달러는 저와 미래도시환경의 동업자인 이호덕씨가 자신의 싱가포르 계좌를 통해 한화로 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오로지 알 왈리드와의 친분 때문에 이 일을 했습니다.

왕자는 당시 "당신처럼 깨끗한 사람을 못 봤다. 당신이 현대 사람들에게 최소 몇백만 달러는 받았을 줄 알았다. 돈 한 푼도 안 받았다는 말을 듣고 아랫사람들에게 직접 확인해봤더니 사실이더라. 당신은 정말 나의 친구다. 히어로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 나는 "제가 부자여서 안 받은 것이 아닙니다. 기업들은 한 푼이 급한데, 그리고 대통령이 직접 저에게 정치적으로 대성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사사로움에 얽매일 수 없다"고 답했고, 이런 말에 왕자는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아마 그런 인상이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맺는데 기여했을 것입니다.

조지 소로스 또한 대통령에 당선되시고 나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만난 인사였습니다. 대통령(당선자)의 친서를 들고 소로스의 휴가처로 달려가서 그를 모셔왔습니다. 그가 1월 3일 방한하기 전에 하루 먼저 귀국해서 대통령으로서의 첫 휴가를 쉐라톤 워커힐에서 보내고 있던 DJ를 만났습니다.

나중에 청와대 부속실장을 했던 김득회씨가 불이 나게 전화를 해도 나와 연락이 잘 안 되자 대통령이 직접 나를 찾았습니다. 그때 제가 핸드폰이 잘 안 되는 지역에 있어서 그랬다고 했더니, 대통령(당선자)은 통화가 되자마자 대뜸 화를 내시면서 "이 사람아, 자네 찾느라고 우리가 난리가 났어. 내가 휴가중인데도 자네 목소리 들어보려고 이렇게 휴가를 보내고 있네. 빨리 오게." 그래서 바로 쉐라톤 워커힐 VIP맨션으로 갔습니다.

대리석 계단을 올라가자 응접실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 김종기씨, 김종성씨, 또 현재 비서관으로 있는 방 아무개 등 몇몇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는 "축하합니다. 당신은 2인자입니다. 대통령께서 휴가 보내시는데 서로 오겠다고 난리인데 다 미루고 최규선이 어디 있냐고 찾고 있습니다. 정권의 2인자 최규선 잘 부탁합니다"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나는 거실 오른쪽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 대통령(당선자)께서는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신이 없어서 세배를 못드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통령께서 나에게 주려고 세뱃돈을 준비했었다고 합니다(몹시 후회스러운 음성이었다).

"오소, 오소, 오소." 대통령(당선자)은 저를 왼쪽으로 안내했습니다. "자네가 나라를 살리네, 소로스 들어오지?" "네 당선자님. 내일 들어옵니다."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됐어. 사람들은 소로스 보고 투기꾼이니 어쩌니 그래요. 모르는 소리, 소로스가 어때서. 세계적인 투자자고 철학자예요. 자네 '오픈 소사이어티'(소로스 재단 소속) 알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지 전쟁과 테러가 없어진다는 간단한 철학을 가지고 소로스가 매년 몇조원씩 복지에 돈을 쓰고 있는 단체야. 그는 세계적인 철학자네." 그렇게 소로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 시장이 세계에 알려져야 하네. 소로스도 한국에 투자한다는 게 알려져야지 세계적인 투자자들이 한국에 몰리네. 자네가 12월에 대우에 MOU(투자양해각서)를 맺게 해준 알 왈리드도 억만장자 맞지? 내가 편지 보고 알았어. 자네는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아는가. 자네는 나보다 더 훌륭하네"라며 말할 수 없는 격찬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장옥추씨가 피자를 가져왔습니다. "자네 피자 좋아하지. 나도 피자 맛있어."그러면서 음료수와 피자를 먹으면서 얘기했습니다.

"이제 자네는 서열이 틀려졌네. 그리고 권력 내 위치가 틀려져부려. 이럴 때일수록 자네는 내 밑에서 커야 하네."

"아이고,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대통령님."(그는 청와대 비서실 상황실장으로 내정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IMF만 극복하면 역사에 남네. 그리고 남북관계 풀어가지고 그렇게 우리 국민이 숙원하는 노벨평화상도 받을 거야. 그때도 자네가 역할을 해줘. 자네 처음에 쓸 때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만류했는가 몰라. 검증이 확실히 됐습니까, 좀 이상한 놈이라고 합니다, 사기꾼 아닐까요. 그러나 다 뿌리치고 내가 사람볼 줄 알아 쓴다고 했더니, 자네가 나 대통령 당선될 때 그 위기 위기마다 다 벗어나게 해주고, 이제 IMF 극복하는 대통령까지 자네가 만들어주고 있는 거네."

"아닙니다, 대통령 당선자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다 일을 보고 있는데, 유박사는 자기가 앞장서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사람들 만나고 인터뷰하고 난리법석이에요. 자기가 공은 다 세우려는 것 같아."

"원래 유 지사님이 미국에서 좀 오래 있어서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 어쩐지 아는가. 나한테 재무장관을 달래요. 내가 막 뭐라고 했네. 그러자 '제가 뭐 어떻습니까. 제가 능력이 안됩니까, 나이가 안 됩니까, 경력이 안됩니까' 그래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 자리는 자민련하고 얘기가 됐고, 김종필 총재와 이야기가 끝난 자리네. 그런데 자네가 이렇게 우기면 되겠나'하고 끝내고 말았네." "대통령님 그러나 유종근은 쓰셔야 합니다. 유종근을 옆에 두실 때 대통령님이 시장경제의 주창자고 추종자라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는 미국 대학교수고 미국통이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질서의 추종자 아닙니까. IMF를 극복할 때까지만이라도 김태동이니 누구니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유종근을 일단 쓰셔야 합니다."

"그런데 경제수석도 안 하겠다고 하고 뭔 자리 하나는 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하나 내주었습니다. "어드바이저가 어떨까요. 자문관, 어드바이저가 한국말로 무얼까요."

"그래 고문, 고문이네. 대통령 경제고문, 어떤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 자리를 주십시오." "그러세. 그러면 내일(1월 3일) 바로 소로스 오자마자 휴가가 끝나니까 일산집에서 첫 공식만찬을 베푸네. 그러니 소로스에게도 그걸 말해주세요. 다섯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인권과 자유민주주의의 기수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건, 김대중 대통령 개인의 영광일 수도 있지만 나라의 영광이기 때문에 IMF 극복도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런 내용의 성명을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기자들에게 발표해야 돼요."

"알겠습니다. 제가 조치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김득회를 불렀습니다.

"이봐, 유박사 연결시켜 봐." 김득회는 나와 같은 수행보좌역이었지만 DJ 옆에 앉지도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전화를 돌렸습니다. 벌써 나와는 엄청난 차이가 났었습니다. 대우에 차이가 나고 내용이 틀렸습니다.

"유박사 나요. 지난번 말은 새겨듣지 마소. 그런데 우리 최규선 보좌역이 큰 일을 하고 있네. 내일 소로스가 들어옵니다. 내가 친서를 전달하라고 했더니 소로스를 데리고 들어와요. 시간이 없는데 끌고 들어온 거요. 아무튼 내일 저녁 만찬을 일산에서 공식적으로 할 테니까 임창렬 부총리도 오기로 했고, 김용환씨는 와야 되겠지? 그때 누구누구 부르면 쓰겠나"하면서 명단을 상의했습니다.

"그러면, 자세한 소로스 일정은 우리 최박사한테 전화해서 알아보소. 그리고 나와 저녁에 만나기 전에 비대위(비상경제대책위원회) 멤버들 하고 신라호텔 찾아가서 김용환 위원장부터 전부 시간을 비워서 (소로스를) 점심에 만나소." 그리고는 김용환 위원장을 전화로 연결했습니다.

"아, 나예요. 우리 최규선이 알죠. 내 비서. 내 대통령 당선뿐 아니라 지금 내 지시받으면서 나와 같이 일하는데, 대단한 일을 지금 했어요. 조지 소로스가 바로 내일 들어옵니다. 소로스도 나의 옥중서신 영문번역문을 다 읽고는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기 때문에 한국에 간다고 했대요."

한시간 넘게 머물다 "전 준비 좀 하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하며 일어서 돌아가려는데 대통령께서 불러서 "잠깐 자네 돈 좀 가져가"했습니다. 전 "괜찮습니다"했지만, "이 사람아 자넨 내가 돈만 주려고 하면 안 받으려고 해."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하며 안 받고 나왔습니다. 그 돈은 세뱃돈으로 준비해놓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보스가 주려는 돈은 꼭 받는 거랍니다. 그걸 내가 안 받고, 그렇게 순진무구했습니다. 컬처(culture, 조직 내부의 정서)도 모르고 그랬던 겁니다.

저는 돌아와서 일에만 매달렸고, 소로스가 들어오자 일정대로 다 진행했고, 한국에 지사를 차리는 데도 나의 지인들 중 사장, 부사장으로 내세운 사람들은 소로스 덕분에 몇백만달러씩 다 벌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돈 한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얏트 건너편에 2백만달러 정도의 독채를 전세로 얻어가지고는 소로스 한국지사를 세웠습니다. 조지 소로스는 급기야 99년 1월에 서울증권을 인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에 충성했는데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의혹'뿐이었습니다.

최규선이가 몇백억을 벌었다더라, 최규선이가 어쨌다더라,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난 대통령을 믿었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나를 아는데 저런 건 과감히 무찔러주시고 혼내주시리라.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급기야 98년 여름부터 내사가 시작됐습니다. 그 당시 최재승 국회 문광위원장의 연락이 와 하얏트 호텔 로비 라운지에서 만났습니다.

"너 이건희 회장 자가용 비행기 타고 사우디 아라비아 갔다 왔지? 너 죽었다. 난리가 나부렸다." "왜요?"

"지금 재벌 때려잡겠다고 버르장머리 고친다는데, 네가 지금 이건희 회장 만나고 그 사람 비행기 타고 사우디아라비아 가서 난리법석을 떨어버리면 위에 있는 사람들은 뭐가 되겠냐. 네가 대통령이냐. 그리고 너 대우,현대로부터 수백억원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벌었으면 빨리빨리 나눠라 나눠."

"아휴, 형님 제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그 알 누구야, 알xx(알 왈리드를 이렇게 불렀다고 했다), 그 알 좀 나눠먹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사해서 돈이 안 나오자 이제는 내가 북한 어린이 돕기 마이클 잭슨 공연을 추진해온 걸 알고 그걸로 구실을 찾았습니다. 거액의 리베이트 수수설에서 벗어나자, 마이클 잭슨 공연 불발로 나를 구속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던 사람이 바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이강래와 당시 국정원장 이종찬이었습니다. 당시 법무비서관이었던 박주선씨를 통하지 않고(본래 사직동팀은 박주선씨 지휘선상에 있었습니다) 바로 김세옥 경찰청장을 불러 노란 봉투를 주면서 "이 안에 내(이강래)가 국정원 기획실장으로 있으면서 가지고 있던 최규선 의혹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는데, 골인시켜라. 의혹만 밝히는 게 아니라 이 정권의 골칫덩어리에게 맛 좀 보여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건 구속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김청장이 최재승 의원을 스위스 그랜드 호텔에서 만났을 때도 그대로 했다고 합니다. 나도 주변 몇사람을 통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1998년 6월에는 외자유치 리베이트설로 내사를 하더니만, 7~8월부터는 마이클 잭슨 공연불발로 내사가 시작된 겁니다. 나로 인해 마이클 잭슨을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청 수사과로 불려가서는 "너 손해 본 것 있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일기획 사람, DJ덕의 프로듀서인 신철씨 등도 불려가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마이클 잭슨의 북한어린이돕기 공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전부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윽박질러 마이클 잭슨 공연이 사기였다고 그렇게 엮어 넣어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이클 잭슨이 북한 어린이를 위해 공연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MOU(공연이행각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이클은 친구인 나에게 어레인지(주선)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전 공연을 주최한 제일기획 사람을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난 구상만 하고 기획만 했지 내가 공연에 참여하거나 그런 적이 없거든요. 내가 직접 참여한 것은 1996년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세계적인 공연 '히스토리 투어' 연장선상에서 한국에 온 것입니다.

98 년 9월 9일 영장이 발부된 것을 계기로 박주선씨가 제 사건을 알고 발끈해 가지고 자기에게 보고도 없이 시작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이 저를 엮어 넣기 위해 그랬던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사람도 베테랑 검사인데, 그걸 몰랐겠습니까. 나는 그때 박주선씨와는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 대검 수사기획관으로 있다가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와가지고 막강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수사과장 최성규씨를 불러 누가 이걸 지시했냐고 묻고 이강래, 이종찬이 그랬다고 하자 "안된다. 구속영장 안된다. 보류하라"고 해서 검찰에서 영장이 기각이 돼 불구속으로 계속 조사를 받았던 것입니다(최규선씨의 아내는 그 당시 홍걸씨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의 구명을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급기야 바로 그 다음해 199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이 잠실 주경기장에서, 내가 MOU를 맺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 공연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무혐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청와대 하명 수사에 대해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것도 정권 초기에 말입니다. 그후로 저는 피해망상증에 걸렸습니다. 아, 이 정권은 나를 죽이려고 한다!

98 년 9월 10일 바로 영장이 기각되고 나온 날(최씨는 사직동팀에서 9월 9일부터 40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나왔다) 이재만 수행비서가 나를 평창동 청와대 경호원 아파트로 불렀습니다.

"미국에 6개월만 가있어라. 대통령께서도 당신 구속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게 거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설령 대통령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몰랐습니다만, 나는 이미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비서는 "권노갑 고문도 나갔으니 미국에 가서 만나보고, 동병상련이 아니냐, 권고문같은 사람도 외국에 나가지 않느냐"면서 "대통령께서는 '만일 경찰에 구속돼버리면 쓰고 싶어도 못쓴다. 최규선이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외국 좀 나가 있으라고 해라'는 말을 차안에서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99년 9월 추석 직전에 미국에 나갔습니다. 이 정권 탄생에 기여한 내가 가슴에 한을 안고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간 겁니다. 그렇게 시작됐던 이 정권에 대한 피해망상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정권으로부터는 어떤 직위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래 돈을 벌자, 그리고 정치를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권고문을 일본에서 만납니다. 권고문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줬습니다. 왜냐면 내가 인수위원회에 있을 때 구속 상태에서 병보석으로 강북삼성병원에 입원해 있던 권고문에게 인사를 간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실은 김대통령이 당선된 후 수시출입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문성민 현 비서가 병실을 지키고 있었고, 특별한 사람에 한해서 들여보내주었습니다.

"TV에서 봤네. 신문에서도 보고, 온통 자네 이야기뿐이더구만, 대통령 잘 모시소. 그러면 난 자네 이뻐해주네."

병실에 와있던 사람들 중 김원기 의원이 "형님, IMF네 뭐네 그런 걸 맞고 이제는 세계화 시대가 돼서 최보좌역 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훨훨 나는 세상이 왔어요. 똑똑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런 덕담을 해줬습니다.

일본 오쿠라 호텔에서 권고문을 만날 때도 문비서가 나왔습니다. 샤브샤브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권고문은 "한국에 들어가면 내가 자네의 보호막이 돼주겠네. 내 우산 속에 있으소. 그럼 자네는 안심이네"라고 했습니다(이 이후 그는 권씨의 비서진에 합류했다).

그렇다. 권고문이 누구인가. 이 사람 밑으로 들어가자, 이 사람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 살자. 죽기는 싫어. 그리고는 저는 달력만 봤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언제나 빨리 지나갈까. 그 일환으로 김홍걸에게도 돈도 줬던 겁니다. 그가 빚진 돈도 갚아줬던 겁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여러분은 의아할 겁니다. 아무리 의형제라 할지라도 아무리 친하다 해도 그 많은 돈을 줬을까. 저는 이런 명목으로 줬던 겁니다. 그를 이용해서, 배경으로 돈 번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도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홍걸이도 형들에게 치여가지고 한국에 나와 있기도 싫다고 했습니다. 홍걸이 말을 듣고 이권을 들어줄 어느 고위 공직자도 없었을 겁니다. 그들도 다 알고 있고, 홍일이, 홍업이 눈치보느라 홍걸이를 도와주겠습니까. 홍걸이도 형에 대한 불만을 많이 얘기했구요. 그리고 내가 홍걸이를 등에 업고 배경으로 삼았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다음 이야기는 다시 남기겠습니다(그는 김홍걸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듯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남겼다).

"잘 들으세요. 이제 검찰의 소환이 임박해가는데요, 내가 이제까지 5년을 기다리면서 김박(김홍걸씨를 이렇게 불렀다)도 알다시피 정치적 재기 그 하나만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고 모든 걸 감내하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내가 홍걸씨는 끌어안고 어떡해서든지 다 보호해줄테니까요. 그 대신 아버지한테 말씀하십시오. 나를 파렴치범으로 몰려고 한다거나, 이 최규선의 재기를 막는 어떤 방법이 시도가 된다면 나는 다 불어버립니다. 나는 죽을 각오가 돼 있어요. 이 말 명심하십시오,

김박, 꼭 말씀하셔야 합니다. 나는 아들도 있고, 내 한 몸 죽어도 내 아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나는 모든 녹음을 남겨서 안전한 사람에게 맡겨놨어요. 나 죽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땅을 치고 후회하지 마세요. 나 지금 이성을 잃었습니다. 어떤 회유도 난 안 받아들입니다. 난 내 길을 갑니다. 그대신 나는 김박이 안쓰럽고, 나도 불쌍한 놈이었고, 김박도 거기서 소외되었던 사람 아닙니까. 우리가 서로 끌어안고 위로하고 위안이 되면서 왔는데, 홍일이 형이 또 서울에 들어옵니다. 어떤 장난을 칠지 몰라요. 만약에 이런 장난이 이루어지면 공개됩니다. 모든 게 공개될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이건 아버님밖에 없습니다. 최규선이에 대해서 나중에 검찰에서 어떤 말이 나오고 변호사가 올 때에도 홍걸씨는 내가 보호해준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를 파렴치범으로 몰지 말라고 해주세요. 나의 재기를 막는 어떤 시도라도 있을 때에는 바로 끝나버립니다. 아시겠죠. 김박 명심하십시오. 빨리 지시해 주세요. 그리고 민정비서관 김현섭씨하고 계속 통화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나에게 계속 전화를 합니다. 됐는지 안됐는지를 민정비서관 김현섭씨를 통해서 나에게 연락이 오게 해주세요. 오늘 아침에도 통화하고 거의 매일 통화합니다. 이 분 참 현명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이 사람하고만 통화를 할 테니까요 김현섭씨에게 됐다 안됐다는 메시지만 전달해 주세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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