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뵈었을 때 왕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천리 길을 멀다않고 찾아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 오셨겠지요?” 맹자가 대답하였다. “임금님!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맹자는 인(仁)과 의(義)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만 맹자는 의(義)에 무게를 두고 있는 사상입니다. 인과 의의 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마디로 인(仁)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義)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仁)에 비하여 사회성(社會性)이 많이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예제를 통하여 이 부분을 재론하도록 하지요.
위 예제에서는 너무 길어서 원문을 생략하였습니다만 이 첫 장은 맹자는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설파합니다.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大夫)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領地)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士人)이나 서민(庶民)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논어(論語)’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예부터 ‘맹자’로서 문리(文理)를 틔운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문(漢文)의 문학적(文學的) 모범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첫 장의 내용을 끝까지 읽어보도록 하지요.
“만승(萬乘)의 천자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천승(千乘)의 제후일 것이고, 천승의 제후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백승(百乘)의 대부(大夫) 중에서 나올 것입니다. 일만(一萬)의 십분의 일인 일천(一千)을 가졌거나, 일천(一千)의 십분의 일인 일백(一百)을 가졌다면 결코 적게 가졌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義)를 경시하고 이(利)를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진(仁) 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義)로운 자로서 그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리(利)를 말씀하십니까?”
맹자와 이 대화를 나눈 임금은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입니다. 당시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겼었기 때문에 흔히 양왕(梁王) 또는 양혜왕이라고 하였다고 전합니다.
주자주(朱子註)에서는 양혜왕은 위나라 제후 앵(罃)으로서 대량(大梁)에 도읍하여 왕을 참칭(僭稱)하여 예를 갖추고 패백을 후히 하여 여러 어진 사람을 초청하여 맹자도 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연고로 양혜왕과 대면하여 대화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맹자의 태도는 단연 의연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잘 아는 동문의 한 사람으로서 최고 수준의 ‘맹자’ 역주서(譯註書)를 출간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맹자론(孟子論)을 잠시 소개하지요.
맹자는 학자와 사상가로서뿐만 아니라 문장가와 문학가로서도 최고의 경지라는 것이지요. 어떠한 고전도 ‘맹자’만큼 힘차고, 유려하고, 논리 정연하고, 심오한 뜻을 지니고, 현재에도 그 내용이 여전히 타당하며, 사람의 정신을 분발시키는 문장들로 가득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입니다. 사실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文句)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고 예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의문(疑問), 감탄(感歎), 부정구(否定句)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재(自由自在)하여 한문(漢文)의 문법(文法)과 예문(例文)의 교범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숙어들의 출전으로서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이 ‘맹자’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농단(壟斷), 호연지기(浩然之氣), 인자무적(仁者無敵), 항산항심(恒産恒心) 등 이루 다 지적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맹자는 조금 전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공자 사후 1백년경에 활동한 사상가로서 맹자 당시에는 유가(儒家)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쇠미하여 오히려 묵자(墨子)와 양자(楊子)사상이 크게 떨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맹자는 당시 세상에 크게 떨치고 있던 다른 사상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갑니다. 따라서 맹자에는 농가(農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등 당시의 다른 많은 사상이 소개되고, 또 비판되고 있기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 한 권의 고전을 택하려고 하는 경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연 ‘맹자’가 천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 제1장의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지요. 결국 양혜왕은 기대하는 해답을 결국 맹자로부터 얻지 못하고 만 셈이지요.
맹자의 사상과 정책은 결국 당시 패권(覇權)을 추구하던 군주들에게 채용되지 못하였습니다. 맹자 사상이 공자의 인(仁)을 사회화하였다고 하지만 당장의 부국강병을 국가적 목표로 하고 있던 군주들에게 사회적 정의는 너무나 우원(迂遠)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활적 경쟁에 내몰리고 있었던 군주들에게 정의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혜왕이 말했던 이(利)란 오로지 부국강병의 류(類)였던 것이지요.(王所謂利 蓋富國强兵之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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