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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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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44>

제6강 논어(論語)-3

***1)경제적 토대의 변화**

이것은 한 마디로 철기시대(鐵器時代)의 광범한 혁명적 변화입니다. 경제적 토대의 변화는 생산력의 발전과 직결되는 것이며 생산력은 기술 즉 노동생산성의 개념입니다.

노동생산성은 노동용구의 발명에 의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철기의 발명으로 특징지어지는 BC 5세기 제2의 ‘농업혁명기’에 해당됩니다.

철기 이전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청동기는 생산용구가 아니었습니다. 지배계급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고조선 시기가 바로 청동기시기입니다.

고조선에 대하여는 그처럼 광대한 영토를 통일할 수 있는 군사력과 통일된 영토를 경영할 수 있는 행정역량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고조선사(古朝鮮史)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식민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음은 물론입니다.

청동기기(靑銅器機)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용구로는 부적합하고 산출량도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신분을 표시하는 무기나 장식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청동기와 청동무기 특히 고조선 시대의 상징인 비파형 동검(琵琶型 銅劍)이 보여주는 위력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보는 녹슨 청동기와는 달리 번쩍번쩍 빛나는 청동제 기기를 상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대륙간 탄도탄을 보유하고 있거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정도의 위력을 과시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전쟁없이도 평화적으로 복속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고조선의 지방자치형태인 거수국(渠帥國)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 진척되면서 고조선의 강역(彊域)과 역사는 물론이며 단군사화(檀君史話)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새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청동기와 철기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고조선이야기로 잠시 본론에서 벗어났습니다.

상주(商周)시대의 청동기문명에서부터 춘추중기 철제무기 및 철제농기구가 보급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齊)나라 수도 임치(臨淄)에서는 발굴된 야금유적지(冶金遺蹟地)의 넓이가 10여만 평방m에 이르고. 철제농기구도 다량 발견되었습니다. 철이 출토된 산이 무려 3천6백9개소에 달합니다.

우경(牛耕)으로 황무지가 개간되고 심경(深耕)으로 단위면적 당 생산량이 급증하는 등 토지생산력이 높아지면서 토지에 대한 관념이 변화합니다. 대규모 수리사업도 그 일환으로 행하여지게 됩니다.

요컨대 기계화 이전의 농업의 기본 틀이 확립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수공업, 상업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여불위(呂不韋)와 같은 대상인이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전쟁방식도 변화하였습니다. 4, 5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청동창칼로 무장한 귀족들이 싸우는 차전(車戰)에서 강남(江南)의 오월전(吳越戰)에서 보듯이 평민병사의 보병전(步兵戰) 중심으로 변화하였습니다.

부국강병에 의한 패권경쟁(覇權競爭)이 국가경영의 목표가 되고 침략과 병합이 자행되고 사회의 모든 가치가 붕괴되고 오직 부국강병이란 하나의 가치로 획일화되는 시기입니다. 신자유주의와 무한경쟁으로 질주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사활적 경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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