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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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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27>

제5강 주역(周易)-7

아직 주역의 경문(經文)을 읽지 않았습니다만 먼저 주역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의 특이한 점을 몇가지 밝혀 두어야 합니다. 이른바 주역 고유의 독법(讀法)입니다.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방법에 있어서 주역 고유의 독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독법으로부터 주역사상의 특징을 찾아내야 합니다. 점(占)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 하는 것은 주역을 올바로 이해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주역을 읽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이해하여야 할 개념이 매우 많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위(位)와 응(應)에 대하여 주로 검토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위(位)**

주역의 독법에 관하여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위(位)입니다. 즉 ‘자리’입니다. 어떤 효(爻)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것은 효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상입니다.

대성괘는 6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각각의 효가 위치하고 있는 1(初), 2, 3, 4, 5, 6(上)의 여섯 개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자리는 1, 3, 5는 양(陽爻)의 자리이고 2, 4, 6은 음효(陰爻)의 자리입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 즉 1, 3, 5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합니다.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 4, 6에 있는 경우도 물론 득위라 합니다.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이를 실위(失位)라 합니다. 양효가 음효의 자리 즉 2, 4, 6에 있는 경우는 실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음효가 양효의 자리인 1, 3, 5에 있는 경우도 실위인 것은 물론입니다.

각 효는 득위하여야 좋은 것입니다. 주역 사상에 있어서 이 ‘위(位)’의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양효라 하여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陽)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음효는 어떤 자리에 있거나 음효일 뿐이라고 하는 고정된 관점은 없습니다.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 처지(處地)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그 운명도 달라진다는 생각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고 하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이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立場)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立場)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處地)입니다. 당파성(黨派性)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길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어쨌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걱정되지요?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가를 아는 비결이 어떤 것이지 궁금하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가 눌립니다.

용적율(容積率)의 개념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기(地氣)가 눌리지 않으려면 용적율이 50% 미만이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빌딩은 지기를 받지 못하는 건축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서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 땅에 너무 많이 쌓아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터와 집의 관계도 그렇습니다만 집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궁금한 ‘자리’의 문제로 돌아가지요.

그 ‘자리’가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傷)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철학’을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30정도의 여유는 놀고 먹자는 것이 아니지요. 30%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는 30을 어떻게 채울 수 있습니까?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일 그 자체도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의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하는 비결입니다.

나는 축구경기에서도 이 70%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대표팀 축구선수 중에 슛을 130%로 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경기를 보는 기회가 있으면 누구인가를 찾아보세요. 거명(擧名)하기가 좀 미안합니다.

반드시 골인시키겠다는 의지가 과잉입니다. 그러한 과잉의지로 슛을 하게 되면 대부분 골을 벗어나기 마련입니다. 슛은 골키퍼가 받아내기에 상당히 불편한 곳으로 공을 보낸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70%의 슛입니다.

여담이었습니다만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딛고 있는 처지와의 동태적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라는 논리가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의 이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이나 사람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得位)와 실위(失位)의 개념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存在論)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關係論)입니다. 주역의 독법은 이처럼 매우 철저한 관계론적 패러다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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