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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빠'의 진화? '드라마'만큼 끝내주는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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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야빠'의 진화? '드라마'만큼 끝내주는 이것!

[프레시안 books] 정재승 외 <백인천 프로젝트>

얼마 전에 준비하던 책 집필을 위한 인터뷰 때문에 백인천 전 LG 감독을 찾아 뵐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일산의 자택으로 들어섰을 때, 거실 테이블 위에 이 책 <백인천 프로젝트>(정재승·이민호 외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가 놓여 있었다. 읽으신 소감을 묻자 "내 이름을 따서 연구도 하고 책도 내 준 거 자체가 영광이지…" 하면서도 영 말끝이 깔끔하지 않았다. 이유는 조금 뒤, 프로원년인 1982년에 그가 달성했던 4할 타율의 비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문득 테이블 위의 책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4할이라는 건…이렇게 연구한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는 아마도 이 책이 자신의 '4할 타격'을 집중 분석하고 연구해 그 후계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획으로 이해하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분명 이 책은 실망스러웠음직하다.

▲ <백인천 프로젝트>(정재승·이민호 외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내가 이 책 서평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 타격이론에 관심이 많은 어느 지인이 '뭐 특별한 거 있더냐'고 물었을 때, 나 역시 '별 거 없다'고 답했다. 이 책은 우선 타격이론서가 아니다. 아니, 야구이론서 자체가 아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왜 더 이상 4할 타자가 나타나지 않는가?'라는,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주제를 과학적으로 다뤄보기 위해 생면부지의 수십 인이 모여 좌충우돌한 과정과 결과를 기록한 활동보고서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지만 야구기술이 아닌 다른 어떤 의미에서라도, 사실 이 책은 그리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정보를 제공해주거나 새로운 영역으로 시야를 열어주는 책이 아니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최소한 이 책의 전반부는 A4 서너 장으로 충분히 압축할 수 있는 내용을 느슨하게 풀어놓은, 그래서 '밀도'라는 기준으로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이에게라면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백인천 프로젝트'는 스티븐 J. 굴드가 미국 프로야구(메이저리그)에서 1941년에 '4할 6리'를 기록한 테드 윌리엄스 이후 더 이상 4할 타자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던 <풀하우스>(원서 1996년, 국내 번역은 2002년, 이명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가설을 한국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기획이었다. (물론 참가자들도 '그 이상'을 꿈꾸긴 했지만 여러 가지 척박한 여건들과 시간상의 제약 때문에 결국에는 '굴드의 설명을, 한국의 데이터를 통해 재검증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기획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도 지난 30여 년 동안 타자들의 타율 평균은 상승했고, 분산은 줄어들어왔다. '4할 타자'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점점 더 나타나기 어렵게 되어왔다는 점이 통계적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고로 4할 타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은 타자들의 기량이 떨어졌거나 정신력이 약해져서가 아니라, 타자 생태계가 '진화'되고 '안정화'되어왔기 때문이라는 굴드의 설명은 한국에서도 옳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 같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 같은 애매한 결론. 그리고 새로운 연구 설계 없이 '재검증'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된 단순한 작업이었다는 점, 그리고 '집단 지성 프로젝트'라기엔 역할의 분담과 협업의 방식이 그리 다양하거나 체계적이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아쉬움은 곳곳에서 묻어난다.

▲ <풀하우스>(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하지만 그런 '얄팍함'이라는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백인천 프로젝트>가 남기는 여운은 제법 묵직하다. 그것을 채워 넣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동안 한국 야구계, 그리고 아마도 한국 과학계에 신기할 만큼 텅 빈 여백으로 남아있던 영역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환기해주었기 때문이다. 야구로 치자면, 잘 맞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빈 공간에 떨어진 '텍사스 히트'라고나 할까.

우선 굴드의 연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던 이들, 혹은 특히 자부심 넘치는 '원로 야구팬'들이 '4할 타자 백인천'이나 '한국시리즈 4승 투수 최동원' 같은 이름을 거론하며 곧잘 늘어놓는 '오늘날 프로야구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거나 '선수들의 덩치는 커지고 힘은 좋아졌지만, 기술이나 정신력은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한탄에 그리 공감하지는 않으면서도 딱히 반박할 방법도 없어 듣고만 있어야 했던 이들에게는 분명 신선한 자극이 될 만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일각의 통념에 대한 반론이 기록과 사실에 근거한 '과학적 연구' 과정을 통해 검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신선함도 있다.

하지만 더 큰 의미를 부여할 만 한 건 '백인천 프로젝트' 팀의 연구가 한국야구에서 기록이 얼마나 열악하게 만들어지고 정리되고 보관되는가에 대해 확인해줌과 동시에, 그것을 개선하고 결국 야구에 대해 훨씬 쓸 만한 지식과 영감을 전해줄 '야구과학'의 정립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나는 불과 6,7년 전, 흔히 '레전드'라고 불리는 선수들의 예전 활약상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 위해 이런저런 기록들을 조회하다가 몇 차례나 혼란과 좌절에 빠진 경험이 있다. 곳곳에 정리된 기록들이 서로 엇갈리는 경우를 만날 때마다 KBO 홈페이지에서 선수 기록들을 조회해 기준으로 삼곤 했었는데, 어느 날 정명원 선수(전 태평양-현대. 현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가 한 시즌에 무려 41승을 올린 것으로 기재된 것을 보게 됐기 때문이다. 장명부의 시즌 30승만 해도 '다시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사건으로 통하는 마당에 41승이라니.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정명원의 경우가 단순한 한 건의 입력실수인지, 아니면 전반적인 문제의 일단일지 확인하기 위해 무작위로 은퇴선수 수십 명의 기록들을 조회하며 살펴보다가 몇 시즌 연속으로 해마다 수백 이닝씩을 던지며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난 어느 투수와 한 시즌에 8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낸 것으로 나타난 어느 타자의 경우를 발견하면서 KBO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기록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접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저렇게 황당할 정도의 오류들은 대부분 수정되고 정리된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지난 해 어떤 공식사이트보다도 신뢰도 높고 다양한 야구 기록 정보를 제공하던 '스탯티즈'라는 한 개인 사이트가 우여곡절 끝에 문을 닫게 됐을 때 터져 나왔던 야구팬들의 비명은 바로 저런 열악한 환경에 대한 공감대와 광범위한 불만에 바탕을 둔 것이기도 했다.

굴드의 가설이 한국 상황에서도 적용되는지 검증했다는 연구 결과 자체보다도, '58명이 생기는 것 없이 맨땅에 헤딩함으로써 KBO 공식기록의 오류 30개를 잡아냈다는 점이 더 의미 있는 기여'라고 생각한다는, 프로젝트 팀의 일원이기도 한 <시사IN> 천관율 기자의 견해에 나는 진지하게 동의한다. 검증된 하나의 가설은 한 부분의 지식을 제공해주지만, 기초자료의 부실함에 대한 발견과 그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환기는 훨씬 더 의미 있는 수많은 연구들을 위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 백인천 전 LG 감독의 사진은 1979년 일본 올스타전에서 홈런을 치던 모습. ⓒ사진 제공: (주)사이언스북스 / 백인천

더구나 '한국 최초의 집단지성 과학연구 프로젝트'라는 다소 억지스럽게 부여된 의미보다는, 적절한 동기부여가 되고 보람이 제공된다면 '돈도, 경력도, 실적도 되지 않을' 일에 약간씩이라도 수고를 보탤 이들이 수십 명이나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큰 희망을 보게 된다. '한국에서, 야구 데이터는 돈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가 상식으로 통하던 야구팬 커뮤니티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와 제안을 해볼 수 있는 근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백인천 프로젝트>의 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인터뷰 모음도 꽤 읽는 재미가 있다. '4할'의 도전자로 꼽혔거나 꼽히고 있는 전현직 타격 고수들(양준혁, 장성호, 김현수, 김태균 등)과 지도자나 전문가들(김용달, 박흥식, 김정준, 김형준 등)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의 재등장 가능성'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놓고 풀어놓은 타격이론과 한국야구에 대한 진단은, 책의 전반부와 달리 충분히 밀도 있고 유익하다. 다만 그런 흥미로운 탐색들이 연구의 서론이 되지 못하고 '부록'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어쨌든 이번 프로젝트를 출발점 삼아 팀의 수장인 정재승 교수와 58명 연구진이 '한국야구연구학회'를 탄생시켰고, 이번에 포함시키지 못한 다양하고 심층적인 문제의식들을 하나하나 풀어가 보기로 했다는 점에 특히 박수를 보낸다. 이번 연구는 참가자들의 열정과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의 호기심을 '완전연소'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또 다른 열정을 재생산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태워갈 발전소 건설의 밑천이 되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개인적으로, 야구의 본질은 '기록'보다는 '기억'에 있으며 '과학'보다는 '드라마'에 있다고 믿는 편이다. 하지만 기록에 깃들지 않고는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기억이고, 과학의 후광이 없이는 드라마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도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백인천 프로젝트'의 후속 연구와 '한국야구연구학회'의 앞날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나처럼 <백인천 프로젝트>의 필자 58명이 제시한 전망에 대해 지지한다면, 그리고 어수선하나마 그 역사적인 출발의 과정을 멀리서나마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 책으로부터 지식과 정보와 깨달음 못지않게 아쉬움을 발견하는 것 또한 즐거운 독서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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