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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 뺨치는 연백평야 미스터리를 아십니까?

[해방일기] 1948년 7월 5일

1948년 7월 5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직선 하나로 남북을 갈라놓았으니 38선에 걸려 온갖 곤란을 겪게 된 곳이 수없이 많은 중에도 대표적인 곳이 연백, 옹진 등 황해도 남쪽의 해안 지대였다. 조선 최대의 곡창으로 꼽히는 연백평야의 경우 경작지 대부분이 38선 남쪽에 있는 반면 저수지 대부분은 북쪽에 있어서, 수세(水稅)의 합의가 안 될 경우 농사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1947년 11월 7일자 일기에서 이 문제를 설명한 일이 있다. 북측에서는 수확고 2퍼센트 가량의 수세를 요구했는데, 남측에서는 저수지 관리비만을 지급하겠다든가, 저수지 면적의 수확량(저수지를 만들지 않고 논으로 놔두었을 경우 그 면적의 수확량) 중 절반만을 지급하겠다든가 하는 우스운 주장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절박한 문제인지라 북측 요구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 고문 앤더슨이 나서서 북측 인민위원회와 담판을 벌였으니,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미군정 입장으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모내기철에 이런 합의가 이뤄져 물을 공급받았는데, 막상 수확 철이 되자 남측의 얘기가 달라졌다.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의 마음은 다른 법인가보다.

"문제의 연안수조 북조선의 과대 요구로 양측 협의 또 결렬"

[연안에서 김호진 본사특파원 발] 곡창 황해도의 연백수리조합 수세 문제는 해방 이후 3개년 동안 남북 간에 수차의 회합이 있었으나 해결을 못 보고 있던 중 지난 19일 하오 0시40분부터 연안군 수리조합 회의실에 북조선 측에서는 깨지쓰 소련군 소좌 외 1명 이순근 북조선인민위원회 농림부장 외 2명 그리고 남조선 측에서는 경기도 미인 군정관 앤더슨 소좌 옴스테드 고문관 이용근 농림국장 외 수 명의 남북 대표가 모여 토의한 결과 1년분 수세로 소련 측에서 백미 1500톤(약 1만 석)을 요구한 데 대하여 남조선 측에서는 관리비로 150톤(약 1000석)을 주겠다고 하다가 200톤까지 남조선 측에서 제의하였으나 끝끝내 북조선 측의 고집으로 회의는 하오 7시 합의를 보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1947년 9월 23일)


모내기철의 합의는 이남 신문에도 보도된 것이었다. (<경향신문> 1947년 6월 6일) 이 합의에 따라 농사철 내내 물을 공급받고 나서 수확 철에 와서 딴 소리 하다니, 이듬해 농사는 어떻게 지을 작정인가? 반년 후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해도 된다는 배짱이었을까? "군대는 그때뿐이야~" 대한민국 군대의 더러운 풍조 역시 미군에게 배워온 것이었을까?

반년이 지나 송전이 중단될 때 연백평야 물도 당연히 끊겼다. 모내기철이 다 지나갈 무렵 연백평야의 '참상'이 이렇게 보도되고 있었다.

논 3만5000정보와 우리나라와 3대 염전인 해남 염전을 가진 연백군은 38선으로 인하여 군민의 생명수인 연백수조 저수지가 원만 타협이 안되어 금년에는 한 방울의 물도 오지 않아 연 100만 석을 산출하는 연백평야는 황폐지로 되고 있다. 지난번 비로 2할의 논모(畓苗)가 되었으나 나머지 8할은 암담하다. 그리고 단전 후 염전 작업도 중지되고 양수와 정미도 안 되어 물가는 날로 오르는 형편이어서 이농자가 속출하고 민생은 극도로 도탄 속에 빠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8년 6월 20일)

그런데 이게 웬 일? 위 기사가 나온 며칠 후부터 북측이 물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어떤 교섭 덕분에 취해진 조치인지 기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몽리 면적 2만4700여 정보를 자랑하는 연백수리조합에 대한 북조선 측으로부터 단수 문제는 단전 문제와 아울러 남북 조선 간에 해결지어야 할 긴급한 문제로 되어 있던 바 지난 24일 밤부터 북조선으로부터 물이 오기 시작하고 있다. 즉 작년 8월 22일 남북 현지 회담이 결렬한 이후 여전히 북조선측으로부터 물이 안 내려와 연백 주민은 비상책으로 곳곳마다 못을 파서 저수한 물을 고이고 간신히 모를 내고 있는 현상인데 아무 통지도 없이 지난 24일 밤부터 갑자기 물이 내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간 남북 간에 별 교섭도 없은 것으로 미루어 연백 주민들은 도리어 의아심을 가지고 있는데 작 26일 경기도 농무국장 이용근은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5일 오후에 미인 군정장관 앤더슨으로부터 24일 이후 물이 내려온다는 말을 들었을 뿐으로 앤더슨도 단지 물이 오고 있다는 정보 이외에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였는데 북조선에서 무조건으로 물을 보내준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아마 미군이나 교섭이 있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27일)


어찌된 사정인지 며칠 후에야 밝혀졌다.

"이남 농민 대표 직접 담판-연백수리조합 문제 해결"

23만 연백군민의 생명수인 연백수리조합 문제가 38선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말썽거리가 되어 그 동안 수차 남북 행정 당국자 사이에 회합이 있었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오던 것이 이남 농민 대표의 직접 담판으로 마침내 물이 오게 되었다고 한다. 즉 연백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구수회의를 거듭한 결과 그들의 대표 두 명 최의수 김동근 양씨를 뽑아 양씨는 김구 씨의 신임장을 가지고 지난 6월 24일 월경하여 평양으로 가서 27일 북조선인민위원회 농림국장과 직접 면담을 하게 되어 북조선에서는 우선 조건 없이 물을 보낼 것을 약속하였다 한다. 양씨는 임무를 마치고 서울로 향하여 29일 김구 씨를 방문하고 보고를 하고 있는 석상에 "통수 개시"의 전보가 연백수리조합으로부터 날아 들어왔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1일)


6월 24일 월경 전에 월경의 뜻을 북측 어디론가 알려놓았을 것이고, 북측은 이 뜻을 존중하는 표시로 월경과 동시에 잠정적으로 송수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연백 농민들에게 김구를 띄워줄 정치적 동기가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단수 문제도 단전 문제도 조선인끼리 해결할 수 있다는 김구의 주장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북측에서는 김구가 이름을 내놓은 일에 호응해 주는 것이 선전에 유리한 일이었다.


이남의 협상파를 부추기려는 북측의 의도도 작용했겠지만, 이 통수 조치의 본질은 민생을 살리는 데 있었다. 전 해에 경기도 고문(군정관) 앤더슨이 나서서 맺은 합의를 번복한 데서 단수 조치를 취한 것인데, 이제 조선인끼리 협약을 맺음으로써 광대한 옥토의 농사를 망치는 말도 안 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는 북측 주장의 타당성을 적어도 이 일에서는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에 어떻게든 재를 뿌리려 하는 조선 신문이 있었다.

"일부 정치인 모략 분쇄-연백저수지 통수비화(通水秘話)"

38선을 가로놓고 물싸움을 거듭하던 연백저수지 통수 문제는 기보한 바와 같이 조선인 간의 교섭으로 배수가 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구암 예성 양 수리조합 구내의 2만4000여 정보에 배수가 되기까지의 내막과 또한 전기를 끊은 북조선당국이 남조선에 농사를 지으라고 물을 보내준 그 의도가 나변에 있나 하고 그 진상을 믿을 만한 소식에 탐문한바 다음과 같은 흑막이 아롱거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북조선 측에서는 동 지대에 물을 아니 보내도 금년의 농사는 충분하게 지을 것을 이미 알게 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당국에서는 비상 조치로 9만여 포의 금비와 양수용으로 거액의 석유 중유 등을 동 지대에 배급하고 또한 물을 잡아놓은 것을 북조선 측에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연백 지대에서 금년 농형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을 안 북조선에서는 부근 농민을 초청하여 솔선해서 조선 사람끼리 물을 보내주는 것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는 농민들에게 다량의 양곡을 가지고 오라 하여 이를 받고 이번 물이 내려오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연막 속에서 자기네들이 물을 보내게 한 듯이 가장하는 것은 가장 우스운 사실의 하나이다. (<동아일보> 1948년 7월 1일)


참 해도 해도 너무한다. 위에 인용한 6월 20일자 <서울신문> 기사에서 연백평야 모내기가 2할밖에 안 됐다는 것은 허위 보도였단 말인가? 수십만 농민의 생계뿐만 아니라 온 나라 식량 사정이 걸린 일을 정략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물을 아니 보내도 금년의 농사는 충분하게 지을 것"이라 우기다니, 65년 후 개성공단을 폐쇄로 몰고 갈 자들과 똑같은 자들이 그때도 있었던 것이다.

"흑막이 아롱거리는 것"을 동아일보 기자에게 알게 해줬다는 믿을 만한 소식통이란 앤더슨 경기도 고문이었던 모양이다. 7월 9일자 <동아일보> "단수해도 별 도리 없어 이북 측에서 통수해 왔을 뿐-연백수조 문제" 기사에 "이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앤더슨의 말이 인용되어 나왔다.

"연백수리조합의 통수는 38 이북에서 물을 보내왔는데 그 진상은 다음과 같다. 북조선당국은 연백수리조합의 수세로 최초에 쌀 2만5000석을 요구하였고 그 다음은 또 25만 석을 요구하였다. 그래 남조선에서는 먼저 약속대로 2만5000석이라면 줄 아량이 있으나 25만 석이라면 못 주겠다는 데서 물이 단수되고 만 것이다. 그래 금년에는 경기도에서 비상조치로 다량의 중유 경유 등 양수용 펌프 비료 등을 저수지 구내 농지에 특별배급을 하였다. 그래 금년 농사에는 별 지장이 없도록 되었는데 또한 '비'로서 충분한 물을 얻게 되어 북조선에서 물이 아니 오더라도 농사를 지을 것을 안 북조선당국에서는 그러다가는 2만5000석도 받아올 수 없게 되고 단수를 하여도 별 도리가 없음을 알고 물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조선의 정객들이 통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거짓 선전이다."

이건 정말 대화록을 까봐야겠다. 북측의 "25만 석" 요구란 지금까지 언론 보도에 나타난 일이 없다. 연백평야 전체 수확량이 80만 석인데(북측 저수지의 몽리 지역 아닌 곳까지) 수세 25만 석이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1947년 봄 합의 수세는 1만2000석이었고, 그 전에 북측 요구로 3만2000석 또는 4만5000석이 보도된 일이 있는데, 그것은 1945년 이후 누적된 수세를 말한 것이었다.

앤더슨은 소설을 쓰고 있었다. 두 개의 허구를 중심으로 한 소설이다. 하나는 북측이 황당무계한 요구를 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허구이고, 또 하나는 연백평야의 금년 농사를 위한 만전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허구다. 그렇게 준비가 잘 되어 있다면 농민들이 힘들여 협상에 나설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앤더슨의 주장 뒤에 붙어 있는 경기도 직원의 보고 내용만 봐도 빤히 드러나는 허구다.

조사원의 보고 : " 연백수리조합 도수로 제1호 지선은 몽리지 농민이 화양천(38선에서 평균 70간 이북 지점)에서 수로를 만들고자 작업 중이던 바 이북 경비대의 습격을 받아 그중 21명이 잡혀 유치당하였다. 이북 보안대의 수리 관계자가 말하기를 이남 농민을 위하여 배수를 할 터이니 농민 관계자가 전부 와서 진정하면 급수하겠다 하기에 제1차에 15명, 제2차에 30명이 갔더니 이남 농민이 수백 명인데 소수밖에 아니 오느냐 하여 그 다음에는 277명이 월북하여 진정하였더니 1정보에 쌀 1두1승을 소위 수세라는 명목으로 이북에 가져가기로 약속하고 6월 18일부터 전기 지선인 추화면 향산 약현 월학 순명 등 4개동 내 297.5정보에 통수를 개시하여 6월 20일에는 농민 관계자 자신이 수집한 백미 30가마를 이북 관헌에게 인도하였다. 그리하여 완전 통수는 28일 상오 8시경에야 겨우 되었던 것이다."

7월 1일자 <경향신문> 기사에서 농민 대표 두 명이 평양까지 갔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아마 두 가지 일이 나란히 벌어진 것이 아닐까싶다. 농민들에게는 워낙 절박한 일이니 온갖 시도를 다했을 것이다.

경기도 조사원의 보고 내용은 38선 100여 미터 북쪽의 물이 철철 넘치는 수로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수십 명 농부가 삽을 들고 넘어갔다가 붙잡힌 데서 시작된다. 빤한 사정인데 이걸 시설 파괴 죄로 잡아넣기도 그렇고. 그래서 수로 하나로 닿는 범위의 농민들이 수세를 현물로 선불하면 물을 대주기로 길을 열어준 모양이다.

지난 3년간 작업에서 제일 아쉬운 일의 하나가 미군정이 남조선 경제를 어떻게 망쳤는지 충분히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연백평야 물 얘기를 살펴보면 패턴은 알아볼 수 있다. 북측과 무슨 협상이든 협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미군정 당국자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원만한 수세 협상이 북측도 바라는 것이고 '이남' 농민들도 필요로 하는 것이었지만, 미군정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쌀 생산은 남조선 경제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고 연백평야는 남조선 전체 생산량의 5퍼센트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그곳의 생산조건 확보에 미군정이 얼마나 무성의하고 무책임했는지 앤더슨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소설을 열심히 받아 적는 <동아일보>가 조선인을 위한 신문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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