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초부터 조선의 여러 신문에 팔레스타인 관계 기사가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위임 통치가 5월 14일 자정을 기해 끝났는데, 그 뒤 상황에 대한 당사자들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커지고만 있었던 것이다. 초기의 유엔에서 조선 문제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는데, 팔레스타인 문제는 훨씬 더 논란이 큰 문제였다. 조선에서 유엔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에서 유엔의 역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시오니즘 운동가들이 팔레스타인의 지배하는 영국 정부에 로비를 벌여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을 위한 '민족의 터전(national home)'을 만들 방침을 밝힌 발포어 선언(1917년)을 받아냈다. '국가 수립'과는 거리가 먼 방침이었다. 당시 그 지역 인구는 아랍인 70만 명, 유태인 5만6000명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발포어 선언 이후 10여 년간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많지 않았다. 1930년대 들어 나치즘의 유태인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 이주가 활발해졌고, 전쟁 중 수용소와 대학살을 겪으면서 유태인 국가 수립 염원이 강렬해졌다. 전쟁이 끝났을 때 수용소에서 풀려나온 유태인 중에는 박해를 받던 원래 거주지로 돌아가기보다 유태인의 새 나라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전쟁 직전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대한 영국 정책을 집약한 것이 <맥도널드 백서>였다. 1939년 3월 발표된 이 백서는 그때까지 45만 명의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어서 발포어 선언이 제시한 '민족의 터전'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태인 국가 수립은 영국의 정책 목적이 아니며 향후 유태인 이주를 영국 당국의 치안 능력 범위 내로 제한한다고 했다. 1940~1944년의 5년간 7만5000명이 한도로 설정되었다.
<맥도널드 백서>는 영국이 전쟁을 앞두고 아랍인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유태인은 배려해 주지 않아도 연합국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날 때는 이 수준으로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영화 <엑소더스>(1960년)는 이 상황에서 일어난 갈등을 그린 것이다.
이 문제 해결에 미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1946년 4월 영-미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는데, 트루먼 대통령이 조사위원회의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유태인 10만 명의 이주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이스라엘 건국 지원 작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1947년 봄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를 불원간 끝내겠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그 후속 대책을 유엔에 맡겼다. 그래서 1947년 5월 유엔 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가 11개국으로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3개월간의 조사 작업 끝에 가을 총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7개국의 지지를 받은 유태인 국가-아랍인 국가 분할 건국안과 3개국의 지지를 받은 연방 건국안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는 아랍인 120여만, 유태인 60만 남짓으로 약 2대 1 비율이었다. 연방 국가가 되면 유태인이 소수파가 될 것이므로 유태인은 당연히 분할 건국안을 지지했다. 유엔은 임시위원회를 만들어 팔레스타인위원회가 작성한 분할 건국안을 조정했는데, 그 결과는 영토의 약 60퍼센트를 유태인 국가에 주는 것이었다. 아랍인 국가 지역의 유태인 비율은 1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유태인 국가 지역은 주민의 절반이 아랍인이 되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분할 건국안은 총회에서 유효 투표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한 안건이었다. 1947년 11월 26일 표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명확치 않은 이유로 연기되어 11월 29일 시행되었다. 찬성 33개국 반대 13개국(기권 10개국)으로 분할 건국안이 채택되었다. 11월 26일에 표결했다면 부결되었으리라는 견해와 분할 건국안 추진 세력의 치열한 로비 활동에 대한 지적이 <Wikipedia> "United Nations Partition Plan for Palestine" 조에 소개되어 있다.
이 지적 중 제일 뚜렷한 것이 필리핀의 경우다. 로물로 대표가 "안건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것"이라며 "팔레스타인 주민의 민족주의 열망에 명백히 역행하는 방침"에 반대하는 뜻을 밝힌 뒤 본국에 소환되었고, 교체 대표가 찬성표를 던졌다.
인도의 네루 수상도 시오니스트 세력의 뇌물 공세와 동생인 비자야 락슈미 판디트 대사에 대한 암살 위협 등 유엔의 혼탁한 분위기를 불평했고, 리베리아의 유엔 대사는 미국 대표단으로부터 원조 삭감 위협을 받았다고 했다. 원조 정책에 영향력을 가진 미국 상원의원 26명이 서명한 분할 건국안 찬성 촉구 전보를 여러 나라 대표들에게 전해졌다.
투표 내용에서 두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 아시아 11개국 중 필리핀 하나만 찬성했다. 중국이 기권하고 나머지 9개국이 반대했으니 반대표의 3분의 2가 아시아에서 나온 것이다. 분할 건국안이 아시아인의 민족주의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하나는 소련 등 공산권이 대거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그래서 소련과 미국이 이 무렵 유일하게 유엔에서 죽이 맞았던 사례로 일컬어진다. 두 강대국은 경쟁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지원하면서 중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 했다. 공산권 중 유고슬라비아만이 기권을 한 것은 소련과 멀어지고 있는 거리를 보여준 것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이 결의안 반대에 일치단결했다. 평화 공존의 의미에서 분할 건국을 수용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이 결의안의 분할 방식은 너무 불공평한 것이었다. 유엔에서 결의안이 통과되자 팔레스타인은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유엔 결의안 통과 직후 영국은 1948년 5월 15일에 위임 통치를 끝낼 계획을 발표했다. 그 후에는 팔레스타인 행정과 치안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태인은 건국 준비와 아울러 군사력 확보에 매진했고, 5월 14일 자정 위임통치 종식과 동시에 건국을 선포했다.
한편, 아랍인은 유엔 결의안에 반대하는 입장에 머무르며 건국 준비를 진행하지 못했다. 요르단과 이집트 등 인접 아랍국들의 엇갈린 이해관계가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 영향을 끼쳐 정치조직도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영국 군대와 경찰이 손을 떼는 즉시 팔레스타인 안에서는 유태인의 힘이 아랍인을 압도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주변 아랍국들이 개입할 것도 분명한 일이었다. 1948년 초의 팔레스타인은 5월 14일 자정에 맞춰져 있는 시한폭탄이었다.
D-데이가 왔을 때 아랍 5개국의 팔레스타인 침공에 의한 전쟁 발발보다 더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이스라엘 건국 선언 불과 몇 분 후에 나온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서였다.
"미 유태국 승인, 소련 제압이 목적?"
[워싱턴 15일발 UP 조선] 트루먼 대통령은 돌연 미국의 신생 팔레스타인 유태 승인을 발표하였다. 14일 오후 6시 1분에 팔레스타인 유태 국가 성립이 선언된 수 분 후 트루먼 대통령은 아래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태 국가가 수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동 임시 정부의 승인이 요청되었다는 통고에 접하였다. 미국 정부는 동 임시 정부를 사실상의 신생 이스라엘 정권으로 승인하는 바이다."
금반 미국 정부의 승인은 팔레스타인 영국 위임 통치의 정식 종결과 동시에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백악관의 로스 비서관은 금반 유태 국가의 탄생과 또한 미국의 동 정권 승인은 유-아 쌍방 간에 평화를 재래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조그만치라도 줄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결정은 지난 2일간 상층부의 비밀에 속하였으며 일단 이가 공표되자 국무성 내부의 하층부조차 일경(一驚)을 금치 못하였던 것이다. 금반 미국 정부의 응급조치에 대한 외부의 반향에 의하면 미국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종결과 동시에 유태 측에서 신정부 수립을 내외에 공표하자 소련이 이를 급속 승인할 것을 예상하고 그 기선을 제하기 위하여 금번의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6일)
지난 가을의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할 건국안을 밀어붙인 데서부터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미국의 뜻은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분할 건국안의 나머지 반쪽인 아랍인 국가의 성립 전망이 보이지 않는 단계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한다는 것은 미국 외교관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국의 전격적인 이스라엘 승인은 유엔을 필요할 때는 이용하지만 유엔 입장에 구애받지는 않는 미국의 태도를 보여준 것이었다. 당시 임시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의 전쟁 위기에 대한 대책이 토론되고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의 토론이 필요 없게 되었다.
"소(蘇)도 '유태국 존재' 인정-UN 임총 무위, 성지 결국 분할"
[뉴욕 16일발 AP 합동] 미 트루먼 대통령의 유태 국가 승인 선언으로써 결국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실패의 암향(暗響)을 받게 되었다. 과거 4주일간 성지 문제 조정자를 5대 강국이 선정하자는 가결 이외에는 아무런 결실도 없이 토의를 계속하여 온 UN 임시 총회는 15일 야로써 폐회되었는데 이 총회 폐막의 최후 순간에 트 대통령이 유태인 국가를 승인하였다는 보도가 전달되어 총회는 일시 혼란 상태에 빠졌었다. 유태 측은 환호성을 올렸고 아랍 측은 "우리는 속았다"고 외쳤었다.
그런데 소련 수석대표 안드레 그로미코 씨 역시 총회에서 "유태 국가는 존재한다"라고 언명함으로써 소연방 역시 유태국가를 승인하는 측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청천벽력으로 제시되었던 미 측의 팔레스타인 탁치안이 자태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트 대통령의 유태국 승인으로 미국은 사실상 무언 중에 성지 분할안을 재긍(再肯)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8일)
5월 19일자 <동아일보> "소(蘇)도 유태국 승인" 기사를 보면 소련도 바로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이 기사에 미국 소련과 '파례알라' 세 나라가 유태국을 승인했다고 했는데, '과테말라'의 오기가 아닐지. 그런데 붙어 있는 기사를 보면 영국은 훨씬 신중한 태도다.
"유태 승인 조건 불비-영 대변인 성명"
[런던 18일발 UP 조선] 영 외무성 대변인은 유태국 승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영 정부는 현 단계의 이스라엘은 국가 승인을 받을 만한 조건을 구비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 정부의 유태국 승인에 필요한 조건은 (1)국가 기능을 개시한 정부의 존재, (2)명확히 제정된 국경, (3) 국제적 의무를 수락하고 이를 수행할 통치 기관의 존재 등이다.
그러나 상기와 같은 조건의 실현은 아직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설령 영국의 승인 조건이 미국의 그것과 상위한다 하더라도 영국의 유태국 승인 문제에 관한 태도는 추호도 선입관 또는 편견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며 다만 법적 고려에 의하여 인도될 뿐이다.
영국의 신중한 태도는 팔레스타인의 위임 통치국으로서 책임이 있는 입장에서 아랍국의 반발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외무성 대변인이 내놓은 조건은 국가 승인을 위한 최소한의 형식 요건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격적 이스라엘 승인은 국제 관계의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안보리 회의에서 시리아대표 앨크리가 미국을 격렬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조선위원단에서 시리아 대표가 미국 방침에 가장 비판적인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여사한 미국의 행동에 관하여 나는 그 합법성을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에 위임할 것을 요구한다. 여사한 유태국 선포를 승인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미국인이 정신결함자가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0일, "미의 유태국 승인으로 안보 논쟁 격화")
이 회의에서 '이스라엘 임시 정부'라는 이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시리아 등 아랍국의 주장에 영국과 중국도 동조해서, 영국 제안에 따라 '팔레스타인 유태 영역 내의 임시 행정 기관'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미국의 독단적 조치에 대한 반발이 대단하다.
이 사태가 많은 조선인들이 미국의 정치적 태도와 유엔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신문 아닌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까지 실렸다.
"2차의 미 태도 돌변으로 국련 면목 상실-성지 문제"
[뉴욕 26일 중앙사 공립] 국제연합은 또 새로운 사태에 의하여 그 위신을 잃은 일에 한 가지를 더 보태게 되었다. 이는 즉 최근 2주일간에 걸쳐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성지 문제인데 이 문제는 벌써 전번 총회에서 아랍 측 지구와 유태 지구를 분할하는 데 미-소 간에 유엔 창설 이후 최초의 합의를 그때에 큰 성공이라고 일반은 호감을 가지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성지를 위임 통치하던 영군이 5월 15일에 철퇴한 후에는 당연히 총회가 일단 결정한 방침이 적용되어 지금 같은 극도의 혼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유엔의 권위도 다소나마 유지되었을 것이다. 이렇던 문제가 미국의 2차에 걸친 돌발적 태도로 유엔은 여지없이 그 권위를 잃어버린 것이다.
즉 1차는 미국이 성지 분할안에 솔선 찬성을 하여 놓고 그 후 월여가 지나지 않아 이것을 반대하고 성지의 유엔 탁치를 주장하여 각국 대표를 일경(一驚)케 하였으며 이것의 시비가 자자하자 미국은 유엔에 사전 하등 제의도 없이 돌연 5월 19일 소련에 솔선하여 유태국 승인이라는 청천의 벽력을 내린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매 유엔 안보의 활동이라든가 성지대책위원회의 사업은 전혀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으며 유엔은 여지없이 그 무력한 기구인 것을 폭로하였다. 그런데 미국의 이와 같은 정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즉 중아(中亞)지방의 석유자원 개발권을 위요하고 아랍 측을 지원하여 이것을 의연히 지배하려는 영국과 새로이 문제에 개입하려고 유태 측을 성원 지지하는 소련 측에 제선하여 미국이 이 지위를 획득하려는 것으로 금후 영-미 간에 이스라엘국 승인 문제를 두고 연출할 외교전의 귀추가 주목되는 바인데 결국 미국의 영국에 대한 압력은 사태가 지연되면 될수록 가중해질 것으로 영국의 양보에 의하여 해결될 것이나 그밖에는 유태국을 중심으로 전개될 중아에 있어서의 미-소 간의 신 세력 균형전이 세계의 새로운 주목을 끌게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8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 직전에 유엔 임시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쟁조정관을 임명할 것을 결의했었다. 이에 따라 5월 20일 스웨덴 외교관 폴케 베르나도테가 유엔의 첫 조정관으로 임명되었다. 53세의 베르나도테 백작은 오스카2세 왕의 손자로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교섭하여 억류자를 구출해 내는 인도주의 사업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베르나도테가 협상안을 작성해 6월 28일 전쟁 관계자들에게 제시한 내용이 1주일 후에 보도된다.
"아-유태 연방을 형성-UN 베 백작 안 발표"
[레이크석세스 5일발 AP 합동] UN에서는 4일 UN 팔레스타인 분쟁조정관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이 예루살렘을 아랍 측 영토로 하는 구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을 유태-아랍 양 국가로 하는 안을 제출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르나도테 백작의 제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트란스요르단을 포함한 당초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써 아랍-유태 양 국가의 연방을 형성할 것.
2. 이 연방은 양국의 외교 국방 정책을 조정하고 공동의 이익을 촉진할 것.
3. 예루살렘은 아랍 측 영토로 하고 동 시 거주 유태인에 대하여서는 자치를 부여하는 동시에 성지에 대하여서는 보호를 가할 것. (<경향신문> 1948년 7월 6일)
두 나라를 세우더라도 연방으로서 연계되지 않고 완전히 따로 세워진다면 분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베르나도테는 인식한 것이다. 애초의 팔레스타인에서 요르단(당시는 '트랜스요르단')을 떼어낸 것은 영국이 자기네 편의를 위해 저지른 짓이었다. 그리고 작아진 팔레스타인을 완전 별도의 두 나라로 쪼갠다는 것은 미국과 소련이 합작해서 밀어붙인 방침이었다. 그런 조건 위에서는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이제야 확인되었다.
베르나도테는 조정관에 임명된 지 석 달을 못 채운 9월 17일 예루살렘 시내에서 암살당했다. 유태인 극렬단체 레히의 소행이었다. 레히 지도자들이 몇 사람 체포되었지만 아무도 암살로 기소되지는 않았고, 테러단체 조직으로 기소된 자들도 곧 석방되고 사면을 받았다. 공소시효가 훌쩍 지난 1977년에야 사건 진상이 발표되었다.
베르나도테의 죽음은 소신껏 일하던 유엔 관계자들이 겪은 고난과 고통의 한 사례일 뿐이다. 조선위원단의 각국 대표가 조선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 좋은 역할을 맡아주지 못한 것이 아쉽게 생각되더라도 그들 모두 주어진 제약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겠다.
사실, 유엔위원단이 5·10 선거를 비판적으로 보내는 의견을 총회에 보고한다 해서 미국이 조선의 분단건국을 포기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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